메뉴 건너뛰기

close

1420년에 명제국이 베이징에 건설한 거대한 자금성.
 1420년에 명제국이 베이징에 건설한 거대한 자금성.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1644년 ‘주식회사’ 명 제국의 부도는 이른 바 ‘흑자부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명 제국은 세계 최대의 수출국이었을 뿐만 아니라 경제가 기본적으로 상승무드를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14세기 이후의 중국경제는 17세기 중반에 잠시 흔들렸을 뿐, 이후 19세기 초반까지 기본적으로 상승 추세를 탔다는 것이 경제사 학자들의 대체적인 의견이다. 

그런데 그런 ‘대기업’이 고작 ‘중소기업’에 불과한 만주족(여진족)에게 허망한 인수·합병(M&A)을 당한 이유는 무엇일까? 군사력 때문이 아니겠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당시 명 제국은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갖고 있었고, 아무리 약해졌다고 해도 만주족에게 허망한 패배를 당할 정도는 아니었다.

임진왜란 때문에 명나라 군대가 약해졌을 수도 있지 않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임진왜란 때에 일본군에 맞서 싸운 군대는 주로 조선 의병과 관군이었으며, 병사들에게 제공된 보급품도 주로 조선 현지에서 조달된 것들이었다. 물론 명 제국이 임진왜란에서 일정 정도의 군사력과 물자를 소모한 것은 사실이지만, 조선측이 소모한 것에 비하면 그것은 ‘새 발의 피’라고도 해도 괜찮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세계 최강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보유한 명 제국이 ‘하청기업’에 불과한 동북방 만주족에게 허망한 패배를 당한 이유는 무엇일까? 만주족을 하청기업이라고 한 것은, 16세기말까지만 해도 만주족 경제가 조선과 명나라에 대한 조공무역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하긴 했지만, 비유적으로 말하면 명 제국의 파산을 가져온 결정적 요인은 ‘독감’과 ‘빈혈’의 복합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독감과 빈혈이라는 것에 대해 각각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세계 정상급의 국력을 보유한 명나라는 멸망 직전에 갑작스러운 ‘독감’에 걸렸다. 그 독감을 원인은 17세기 초중반 지구상에 불어 닥친 기후환경의 변화였다.

17세기 초중반의 유라시아 대륙에서는 광범위한 혹한·유행병 등으로 인해 농작물 생산이 감소하고 인구성장이 정체되고 무역이 부진해지는 등의 이상 현상이 나타났다. 명 제국에서도 냉해로 인해 농작물 생산이 감소하고 유행병이 창궐하고 경제가 일시적으로 위축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이때의 명 제국은 ‘지독한 독감’에 걸린 ‘천하장사’였다.

둘째, 경제가 일시적으로 위축된 상황 속에서 명 제국은 설상가상으로 ‘악성 빈혈’까지 걸리게 되었다. 악성 빈혈이라고 한 것은, 경제의 윤활유라고 할 수 있는 은(화폐)이 대거 부족해지는 현상이 나타났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질병을 치유할 수 있는 힘은 혈액 순환에서 나온다. 인체를 순환하면서 각 기관에 에너지를 공급할 혈액이 부족해진다면, 아무리 천하장사일지라도 ‘감기 한 방’에 쓰러질 수 있는 것이다.  

기후 변화에 따른 농작물 생산 감소와 무역 위축 등으로 인해 명 제국에서는 은의 유통에 비상이 걸리게 되었다. 그래서 명 제국 멸망 직전에는 심한 자금난에 봉착한 명나라 상인들이 마닐라에서 채무를 변제하지 못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통화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멸망 직전인 1643년에 명나라 정부에서는 지폐 발행까지 검토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 때문에 이것은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일종의 IMF라 할 수 있는 이런 상황 하에서 명 제국의 목을 더욱 더 옥죈 것은 핵심 교역국인 일본의 정책 변화였다. 당시 일본정부는 은의 대(對)중국 유출을 줄이는 정책을 취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명나라 경제의 ‘혈액 부족’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물론 일본이 은의 대중국 유출을 줄인 최대의 이유는 일시적 위기로부터 자국 경제를 보호하려는 데에 있었다. 하지만, 명나라에 들어가는 은의 주요 출처 중 하나가 일본(당시의 주요 은 생산국)이었기 때문에, 이 같은 일본의 정책 변화는 명 제국의 경제를 쓰러뜨리는 데에 주요 계기로 작용하게 되었다.

화폐 부족이 초래한 결정적 부작용 중 하나는 군대의 기강 와해였다. 멸망 연도인 1644년 초반에는 병사들에게 지급하지 못한 체불임금이 은화 수백만 냥에 달했다. 게다가 만주족 군대가 북경을 포위했을 때 명 제국의 북경 수비병들은 다섯 달째 봉급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전쟁의 승패는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명 제국은 세계 최대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보유한 강대국이었지만, 17세기 초중반에 불어 닥친 기후변화로 인해 경제가 일시적으로 흔들리는 상황 속에서 화폐(은)마저 제대로 유통되지 않는 등의 일대 위기를 겪게 되었다.

이는 경기(만주족과의 대결) 직전의 천하장사가 독감에 빈혈까지 겹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상황이 이와 같다면, 웬만한 기량의 씨름선수일지라도 기운 빠진 천하장사를 들배지기 한 판으로 쓰러뜨릴 수 있었을 것이다.

‘중소기업’ 만주족이 ‘대기업’ 명 제국을 인수·합병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배경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명 제국은 만주족을 압도할 만한 기량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국가 시스템을 가동하는 데에 필요한 ‘총알’(화폐)이 부족하여 허망하게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명나라의 멸망은 이른 바 흑자부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100억 재산을 보유한 사업가가 단돈 100만원이 부족하여 부도를 당한 것과 유사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명 제국의 경험이 결코 남의 일만 같지 않다. 왜냐하면, 지난 1997년의 IMF 금융위기로 인해 한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들이 유사한 위기를 겪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IMF에서 벗어나는 대신, 한국은 알짜 기업과 알짜 부동산들을 이미 외국인들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미국과 EU가 주도하는 소위 세계화 속에서, 아시아 등 제3세계의 경제는 잘못하다가는 고유의 독자성을 잃고 좌초할지도 모르는 위기에 처해 있다. 서양이 주도하는 세계화는 제3세계 경제의 인수·합병이라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고 해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제3세계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통화정책·금융정책의 폭은 점차 좁아지고 있다. 21세기의 세계 화폐경제는 17세기의 세계 화폐경제보다도 한층 더 긴밀하게 엮여져 있다.

향후 미국이나 EU가 도리어 명나라 신세가 될지 아니면 제3세계가 명나라 신세가 될지는 아직 단언할 수 없다. 어느 쪽이 독감에 빈혈까지 겹쳐 갑자기 쓰러질지는 알 수 없지만, 한국경제가 명 제국처럼 허망한 인수·합병을 당하지 않으려면 미국 등의 눈치를 살피기보다는 어떻게든 자신의 몫을 챙기면서 독자적 영역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태그:#세계화, #흑자부도, #명 제국, #통화위기, #IMF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