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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에 대한 사랑 때문에 스스로 날개를 접은 혹은 가부장제가 옥죈 사슬에 얽매여, 남동생과 오빠를 위해 날개를 꺾인 채 살아온 언니들이 있다. 

 

할당량을 맞추느라 눈썹이 휘날리도록 미싱을 돌리고 졸음에 겨워 깜빡 졸다 자신의 손가락이 박음질 되고 하루에 수백 장씩 수출용 옷을 만들면서도 자신을 위해 옷 한 벌 마련하려면 가족이 먼저 눈에 밟힌다던 언니들이 있었다.

 

그렇게 제살 깎아먹으며 미싱을 돌리고, 졸음 참아가며 실밥을 뜯어 가족을 먹여 살려야만 했던 언니들은 어쩌면 자신의 깃털을 한 올씩 뽑아 섞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옷감을 짰다던 학의 화신은 아니었을까?

 

가랑잎 굴러가는 것만 봐도 까르르 웃음을 터뜨린다는 소녀들이 날개를 접은 채 어느덧 아줌마가 되고 할머니가 되었다.

 

강산이 두세 번씩 변해 그들의 피와 땀이 서린 옛 일터의 모습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지만 언니들 가슴에 남아있던 날개옷에의 추억과 찬란한 비상에의 소망은 조금도 빛바래지 않았다 그 언니들이 마침내 자신의 날개옷을 되찾고 조용히 날개짓을 시작한 것이 2006년 12월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비상의 날개짓을 시작한 지 1년 여가 가까워지는 2007년 11월 9일 창신동 아줌마들의 조용한 날개짓은 마침내 거대한 바람을 일으키며 동대문 패션가를 휩쓸었다. 그들이 일으킨 돌풍은 무엇일까?

 

[바람 하나] 불어라 행복의 바람(Wind)

 

봉제경력 21년인 이희정씨는 초등학교 6학년인 딸 유명선양과 눈처럼 하얀 드레스를 입고 무대의 피날레를 장식했다. 가수 양희은씨는 어머니 윤순모씨와 디자이너 이형우씨의 작품을 입고 무대를 누볐다.

 

비록 자신이 무대에 선 것은 아니지만 무대를 누비는 모델을 바라보는 이들은  모두 기쁨과 행복이 넘쳐 보인다. 조금은 수줍은 듯 무대를 걸어나오는 아내나 엄마에게 꽃다발을 건네는 가족들의 모습이 정겹다.

 

수십 년 남의 옷만을 만들어 오던 창신동 아줌마들은 손수 옷감을 골라 그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 선보일 날개옷을 지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빛 고운 설빔을 머리맡에 두고 한밤 내내 잠 못 이루던 행복한 어린 시절을 떠올렸을까? 아니면 분홍치마에 연두 회장저고리로 함진아비를 기다리던 수줍은 젊은 날을 떠올렸을까. 아마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처음 수다공방의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리던  바로 그날의 두근거림을 떠올렸을 것이다.

 

무대에 선 창신동 아줌마들의 깊은 가슴에서 불어나오는 행복의 바람이 살그머니 온 장내를 감싼다. 그렇게 소리 없이 시작된 작은 날개짓과 행복한 사람이 만든 행복한 옷에서 날리는 사람냄새와 행복의 냄새가 가득 넘쳐나고 있었다.

 

[바람 둘] 잡혀라 희망의 바람(Dream)

 

"지난해 펼쳤던 희망의 날개는 꿈을 이루기 위한 간절한 '마음의 몸짓(기도)'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날개 짓을 할 수 있는 것은 무(無)에서 유(有)를 만드시는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전순옥(참여성노동복지 대표)씨는 이렇게 고백했다. 그렇다. 꿈꾸며 기도하는 자, 그 꿈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자는 반드시 꿈을 현실의 열매로 손에 쥔다. 그들의 꺾인 꿈의 날개를 펴준 이는 물론 따로 있었다.

 

 

37년 전 전태일이라는 한 노동자는 인간답게 살고 싶은 꿈이 있었고 그 꿈의 실현을 앞당기려 자신을 불살랐다. 꿈을 잃고 살아가는 청계천 미싱공과 시다들을 위해 희망의 기폭제가 된 것이다. 그 후 봉제사도 시다도 자아를 되찾을 꿈을 꾸었고(When they dream) 그들의 꿈은 마침내 실현되었다(Dream will come true).  결코 포기하지 않는 인내심으로 희망을 움켜잡은 것이다. 

 

비상을 꿈꾸는 자 아름답다! 꿈을 포기하지 않는 자도 아름답다!  날개를 활짝 펼쳐 창공을 향해 나는 자 더욱 아름답다!

 

[바람 셋] 바꿔라 유행의 바람(Trend)

 

동대문은 한국 의류패션산업의 원조이며 한국의 유행을 선도하는 메카 역할을 해 왔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값싼 중국 제품에게 조금씩 자리를 내어주어 이제는 설 자리가 없어졌다. 당연히 일감도 줄었다. 값싼 물량 공세를 펼치는 중국, 고급화된 브랜드로 유행을 선도하며 세계 패션계를 주름잡는 프랑스, 이태리, 일본 등과 어떻게 경쟁할 수 있을까?

 

천연염색제로 자연바람에 곱게 물들인 차별화한 원단, 전통한복의 아름다움을 현대감각과 적절하게 조화시킨 세련되고 감각적인 디자인, 섬세하고 정교한 마무리 기술 등 전문적이고 숙련된 기술력 확보를 통해 밀라노, 뉴욕, 파리 등 세계 패션계를 선도하는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2007년 5월 발족한 한국패션사업발전센터 6개 단체(동대문패션총상인협회, 동대문의류봉제협회, 패션디자이너그룹, 참여성노동복지센터, 서울의류업노동조합, 남대문패션악세사리유통협의회)는'Made in Korea' 프리미엄 프로젝트 추진을 위한 제안서를 산업자원부에 제출해 놓고 관계자들의 긍정적인 검토를 기다리고 있다.

 

남이 재단해 넘겨준 것들을 기계적으로 박이내기만 하는 수동적 노동자가 아닌, 스스로

기획하고 창의력을 발휘하여 패션을 선도하는 전문가들로 거듭나기 위해 신바람 난 아줌마들은 자신감이 넘치고 행복해 보였다.

 


[비상] 날아라 넓은 창공을!


노동자와 노동부장관, 어머니와 딸, 스승과 제자가 바람(Wind), 바람(Dream), 바람(Trend)을 일으키며 보무도 당당하게 무대 위를 걷는다. 날개 단 창신동 아줌마들이 신바람을 타고 마음껏 무대 위를 누빈다. 어르신도 어린 학생도 아줌마도 아저씨도 모두 아름답다.

 

나비의 날개짓은 비록 연약하지만 그 날개짓이 일으킨 바람이 지구 저 반대편에 거대한 폭풍을 일으키는 동력이 된다고 한다. 창신동 아줌마들이 일으킨 바람, 그 시작은 비록 미약하지만 그 바람이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너 세계 패션계를 강타할 거대한 회오리바람이 되고 창신동 아줌마들이 그 바람을 타고 세계를 무대로 화려하게 비상할 그날을 눈 앞에 그려본다.

 

바람난 창신동 아줌마들. 아자 아자 파이팅!!!


태그:#수다공방, #패션쇼, #창신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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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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