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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대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에게 패배한 뒤 2002년 12월 20일 눈물의 기자회견을 통해 정계은퇴를 선언한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왼쪽)가 7일 오전 제17대 대선에 도전하기 위해 대선출마를 선언 한 뒤 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를 참배한 뒤 미소를 짓고 있다.
 제16대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에게 패배한 뒤 2002년 12월 20일 눈물의 기자회견을 통해 정계은퇴를 선언한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왼쪽)가 7일 오전 제17대 대선에 도전하기 위해 대선출마를 선언 한 뒤 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를 참배한 뒤 미소를 짓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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칩거정치의 예상된 결론.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다.

텔레비전 생중계로 진행된 기자회견에서 그는 5년 전 혹은 10년 전 출마 당시와 별로 다를 바 없는 꼿꼿한 자세를 보였다. 선언문 낭독과 질문응답에서도 대쪽의 결기가 넘쳐났다. 역시 이회창이었다.

이명박에게서 찾아보기 어려운 엘리트 출신 정치인의 당당함이라고나 할까. 깔끔함, 세련됨, 당당함, 명료함, 교양있는 태도 등 어느 한 곳 나무랄 데가 없었다. 정치행사가 아니었다면 박수받을 풍경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새롭지도, 감동적이지도, 아름답지도 않는 출마선언

그러나 보기 좋은 장면은 여기까지. 기자회견에는 새로움도 없었고, 감동도 없었고, 아름다움도 없었다. 당당함 뒤에는 이 좋은 가을에 인간의 삶이 노욕에 겨워 노추로 퇴행하는 72살 노 정객의 적나라한 욕망이 웅크리고 있었다.

기자회견을 보다가 두 번 놀랐다.

회견문의 내용이 무미건조한 언어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지난 5년 절치부심 인내해온 마음으로 작성한 후 고치고 또 고쳤다는 내용은 허접한 수준이었다.

그가 이명박의 대선승리 가능성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다시 놀랐다. 단순한 정권교체가 아니라 지난 10년간의 잘못을 바로잡는 정권교체를 해야 하며, 그 역할을 본인이 맡겠다는 것이었다.

문제의 초점이 정권교체가 아니라 제대로 된 정권교체인 동시에 정권교체를 위한 지도자의 역할론, 나아가서는 후보 교체론에 있었다. 96년 정계입문 후 3김청산을 주장하면서 수없이 비판했던 "나 아니면 안된다"는 대사를 이번에는 본인의 입으로 반복했다. 대선 3수의 옹색한 처지와 궁색한 변명이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이런 부실한 논리구조로 대선 막판에 3수를 강행하려니 ‘대쪽’의 화려한 영광은 사라지고 극우세력에 기대어 데모 반대, 점거 반대, 북한 반대의 시대착오적인 주장으로 치장된 “좌파정권 종식”이라는 신기루 구호가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명백한 오조준이자 시대정신을 역행하는 것이다.

잔돈이 남기지 않으려는 이회창의 '대선 도박'

이회창은 두 차례 대선에서 국민의 심판을 받았다. 두 차례 모두 아들 병역비리 의혹으로 국가적 홍역을 치렀다. 2002년 대선에서는 삼성을 비롯한 재벌돈을 이용하여 '차떼기' 선거를 치렀고, 그로 인해 선거참모 여럿을 감옥에 보냈으며, 본인은 국민 앞에서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정계은퇴를 맹약했다.

맹약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더구나 본인이 소속되고 본인이 '태상왕'이라고까지 불리는 그 정당의 공식후보가 압도적으로 높은 지지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출마를 하겠다니 그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가 8일 여의도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회창 전 총재의 대선출마에 대해 맹비난하고 있다.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가 8일 여의도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회창 전 총재의 대선출마에 대해 맹비난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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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은 두 차례 대선에서 각각 1000만표에 달하는 지지를 받았던 '국민정치인'이다. 97년에는 김대중과 싸워 994만표를 받았고 02년에는 노무현과 싸워 1145만표를 받았다. 유권자의 1% 남짓한 40만~50만표 차이로 연거푸 석패했으니 그 기반이 어디 가겠는가?

도박은 잔돈을 남기지 않는 법이다. 승자독식의 대선 또한 도박과 같아서 잔돈을 남기지 않는다. 지지기반이 남아있는 한 정치가는 움직인다. 김영삼씨가 재수로, 김대중씨가 4수로 대통령에 도전한 것도 지지기반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대선상황도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정동영·문국현·권영길, 이인제 할 것 없이 진보개혁진영의 대선 칼날이 무디어져 사실상 외부의 적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인데다 한나라당 당원의 절반 이상이 경선 패배의 열패감에 빠져 있는 상황이니 가연성 소재가 안팎으로 쌓여있다.

이명박 후보가 당내 단합에 실패하는 등 경선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BBK 주가조작 사건을 비롯한 온갖 부패추문에 연루되어 있는 상황이니 물질적 지지기반을 가진 정치인으로서 출마 유혹을 포기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착각과 오판의 결론

이회창의 출마는 원론에서 잘못되었다. 그것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행동이며 정치적으로는 잘못된 선택이다. 개인적으로 불행한 일이며 한나라당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당정치를 훼손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서도 불행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회창은 과거의 교훈을 오독했다. 대선 4수생인 김대중 전 대통령을 벤치마킹한 것이라면 번지수가 틀렸다.

김대중의 출마를 둘러싼 당시의 논란은 차치하더라도 그는 민주화와 통일이라는 시대정신을 체현한 고난의 정치지도자로서 행동했다. 민주화를 그릇되게 해석하고 남북관계의 진전을 부정하는 이회창의 출마와는 격이 다른 것이다.

출마 소식이 언론에 보도되자마자 단박에 20%를 넘어선 지지율에 고무되었다면 그 이면도 보아야 한다. 대한민국의 모든 언론과 사회단체, 지식인과 평론가들이 한 목소리로 비판하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까.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결론은 만장일치의 반대다. 이회창은 역사의 흐름을 거슬러 가고 있는 것이다.

이회창도 편승한 대선구도는 이명박에게 치명적인 구도이자 한나라당에게는 지극히 불안한 구도이다. 이명박의 낙마에 대비한 배수진이라고 한다면 불행중 다행이겠지만, 역으로 낙마를 재촉할 수도 있으니 무턱대고 반길 수도 없다. 이명박과 한나라당이 엇나가는 지점이다.

이명박에겐 위기, 개혁진영엔 절대위기

6일 오후 서울 올림픽공원 펜싱경기장에서 열린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한농연) 주최 대선후보 초청 토론회에 참석한 권영길 민주노동당 후보와 문국현 창조한국당 후보가 대기실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6일 오후 서울 올림픽공원 펜싱경기장에서 열린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한농연) 주최 대선후보 초청 토론회에 참석한 권영길 민주노동당 후보와 문국현 창조한국당 후보가 대기실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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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진영의 아전인수격 평가는 맞지 않다. 수구보수세력의 총궐기와 전진배치가 초래할 대선구도의 보수적 재편이라는 중대한 변화를 간과하고 이명박 대세론에 집착하여 이명박의 위기를 한나라당의 위기로 간주하면서 '기회' 운운하는 것은 듣기 민망하다.

이명박 후보 혼자서 과반의 지지율을 독점하던 상황이 더욱 악화되어 수구보수진영이 2/3의 지지율을 확보해버린 상황에서 보수의 분열을 승리의 기회로 착각하여 독자 대응을 강변한다면 더욱 맞지 않는다. 상황은 개혁진영에게 절대위기 그 자체이다.

이명박의 낙마나 이회창의 추락이 없는 한 대선구도는 이명박과 이회창 두 이씨가 끌어가는 쌍끌이 구도로 재편되어 두 사람이 선거담론을 주도할 상황이다. 이 구도에서는 15%를 겨우 넘긴 상태에서 정체된 정동영의 반전카드는 무력한 무기일 수밖에 없다.

문국현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권영길을 제치고 3파전 구도에 진입했지만 조직력의 열세로 주춤하고 있다. 권영길은 가치논쟁에서 문국현에게 뒤져 있으며, 이인제는 오히려 보수화되고 있다. 결국 세 후보는 4~6위 군소후보가 겨루는 마이너리그로 가야하는가?

이회창 출마의 파괴력은 세 차원으로 나타날 것이다.

첫째, 이명박과 정동영을 포함해서 대선에 참여한 모든 후보들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쓰나미 현상. 둘째, 대선구도가 보수-보수 대결구도로 재편되면서 개혁진보진영의 담론 실종. 셋째, 한나라당 우위의 선거구도를 재편할 가능성이 소멸되면서 대선승리의 가능성 소멸. 이것이 위기가 아니라면 다른 무엇을 위기라 하겠는가?

이회창의 출마에 위기적 요소와 기회의 요소가 공존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기회의 요소는 오직 위기에 대한 대응 속에서만 주어진다. 물론 상응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 대가가 기득권의 포기와 진정한 정치연합의 실현이라는 사실을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궁즉통(窮則通)이라는데, 위기가 기회로 전환될 수 있을까?

한나라당의 표정은 대략 난감한 딜레마 그 자체다. 97년과 2002년에는 이회창 후보의 부패문제로 집권에 실패했는데 이번에는 그의 출마 때문에 실패할 비극적인 운명이다. 기회는 한나라당의 비극을 현실화시키는 데서 시작된다.

다행인 것은 부패로 망하는 보수세력에게서 분열이 시작된 반면 분열로 망하는 진보개혁세력에게는 아직 단결의 기회가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87년 대선에서 경험한 단일화 실패의 악몽이 교훈으로 남아 있다는 점도 진보개혁세력에게는 약이다. 이 교훈을 바탕으로 무작정 단일화를 넘어서는 정책과 세력의 연합을 이루어낸다면 기회가 올 것이다.

대선 후보는 있는데 지도자는 없다

예년 같으면 국민들이 먼저 움직이는 상황도 가능했다. 그러나 선조가 의주로 몽진하자 경복궁을 불질러버린 국민들의 마음이 대선에 작용하고 있다.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에 지친 국민들이 정권 재창출을 거부하는 마당에 누가 움직이겠는가? 국민들이 움직이려면 명분과 기회가 필요하다. 움직일 이유를 정확하게 말해주어야 한다.

살아가기가 고달프다는데 다른 소리를 하니 국민들이 외면하는 것이다. 국민들이 정권교체를 원한다는데 정권 재창출을 말하니 돌아서는 것이다. 하나같이 약체라고 판단하는데 독자노선을 주장하니 잘들 해보라는 것이다.

그러니 함께 모여 손잡고 약속해야 한다. 노무현의 시대를 극복하겠다고,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를 능가하는 정말 좋은 정부를 만들겠노라고. 김대중 노무현 정부와 비교되지 않는 새정권을 만들겠다고 말해야 한다. 재창출이 아니라 새창출이다. 이것이 지도자의 역할이다.

국민들이 바라는 지도자의 상은 무엇일까? 역사의 진행방향을 예측하는 지혜로 길을 제시하는 예지자, 국민들의 고통을 단결로 전환하는 조직자, 과감한 자기희생적 결단과 명료한 대안으로 위기를 돌파하는 추진자 등등. 참으로 어렵다. 그러나 어려우면 지도자이기를 포기해야 한다.

지금까지는 대선후보만을 보았지 지도자를 보지 못했다. 국민들도 아직 지도자를 발견하지 못했다. 우왕좌왕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위기의 시대, 참다운 지도자의 현신이 가능할까?

덧붙이는 글 | 정대화 기자는 상지대 교수입니다.



태그:#이회창, #이명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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