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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군파(RAF)의 유명한 로고
 적군파(RAF)의 유명한 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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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은 지금 '독일의 가을' 문제로 떠들썩하다. 날씨 이야기가 아니라, 적군파(RAF)의 테러가 정점에 이른 1977년 9월과 10월을 일컫는 말이 '독일의 가을'이다.

올해 30주년을 맞아 언론은 이 사건을 재조명하는 특집을 앞다퉈 내놓았다. 신문은 말할 나위도 없고, TV도 관련 방송을 되풀이해서 방영하고 있다. 대표적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독일의 가을'이라는 제목의 대형 기획 시리즈를 매주 연재하고 있다.

1977년 4월과 7월 적군파의 검찰청장과 은행장 살해로 서막을 연 독일의 가을은 10월 루프트한자 비행기 납치와 경제인연합회 회장 살해로 절정에 오른다. 특히 비행기 납치와 인질극은 전 세계를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납치범들은 당시 감옥에 있던 적군파 지도부와 인질의 맞교환을 요구했지만 결국 특공대에 소탕되었다.

사건 직후 안드레아스 바더를 비롯한 적군파 지도부 3명이 감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자, 9월부터 인질로 잡혀 있던 경제인연합회 회장도 곧장 보복 살해된다. 이렇게 '독일의 가을'은 막을 내렸지만, 적군파는 1998년 자체해산을 선언할 때까지 산발적인 테러를 멈추지 않으며 수십 명의 희생자를 냈다.

적군파는 왜 무기를 들었을까. 적군파 1세대는 1967년 6월 한 시위자가 경찰의 총에 희생되며 국가에 대한 분노를 키웠다고 한다. 이 총격 사건은 독일 '68운동'의 기폭제로도 작용한다. 하지만 68운동이 비판과 계몽을 통한 대중운동의 길을 택한 반면, 적군파는 억압적인 국가와 체제로부터의 해방을 목표로 내걸고 지하로 들어갔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하인리히 뵐에 따르면 결국 적군파의 길은 '6천만 명에 맞선 6명의 전쟁'이었기에, 대다수 독일인에게 해방이 아닌 경악으로 기억된다. 68운동이 내건 '비판의 무기'가 적군파의 '무기를 든 비판'에 자리를 내주며, 사회비판의 정당성은 무자비한 테러 행위로 모독되고 만 것이다.

아무튼 '독일의 가을'이 남긴 상처는 차가운 독일의 겨울 만큼이나 길고도 깊이 흐르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부산일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적군파, #독일의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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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부산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로 있으며, 저서로는 『68혁명, 상상력이 빚은 저항의 역사』, 『저항의 축제, 해방의 불꽃, 시위』(공저), 역서로 『68혁명, 세계를 뒤흔든 상상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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