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스윙 타이밍을 잡아라! 현재 사회인야구를 하고 있는 기자의 타격 모습. 남영동 야구 연습장이다. ⓒ 박상익



야구 연습장에서 '홈런왕'을 꿈꾸다 남영역 야구 연습장 시속 125km 타석.

▲ 야구 연습장에서 '홈런왕'을 꿈꾸다 남영역 야구 연습장 시속 125km 타석. ⓒ 박상익


지난 20일 저녁, 남영역 야구 연습장에서 어떤 남녀 커플의 대화.

"오빠, 야구 잘 해?"
"그럼~ 오빠가 한 때 홈런 좀 쳤지~ 하하하!"


의기양양한 남자는 가장 빠른 공이 날아오는 곳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공은 매정하게 방망이를 지나쳤고 결국 그는 마지막 헛스윙과 함께 넘어지고 말았다.

누구나 왕년엔 '홈런왕'이었다

야구 연습장. 배팅 연습장 혹은 배팅 센터로도 불린다. 사실 운동 연습장 중에서 이런 모호한 특징을 가진 곳이 없을 것이다. 탁구장과 당구장은 그 자체로 하나의 게임을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야구연습장에서는 오직 타격만 할 수 있다. 흔히 야구는 '투수놀음'이라는데 참 아이러니하다.

과거 프로야구가 절정의 인기를 누리고 있을 때부터 동네 곳곳에서 호황을 누리던 야구 연습장. 오랜 기간 사람들과 함께 호흡한 탓에 추억도 많고 사연도 많다.

야구 선수가 아니더라도, 야구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누구나 야구 연습장에 들러 재미로 공을 쳐볼 수 있다. 경쾌한 타격음에 스트레스를 날릴 수도 있고, 밥값내기 시합도 벌어진다. 이 때 스친 공도 타격으로 인정해야 하는지 입씨름을 벌인다.

야구 연습장은 영화에도 종종 등장한다.  <내 머리속의 지우개>에서 야구 연습장은 중요 장면의 배경이 되었으며, <슈퍼스타 감사용> <복수는 나의 것> 등의 영화에도 야구 연습장이 등장한다. 메이저리그의 시애틀 매리너스의 스즈키 이치로는 어릴 적부터 야구연습장에서 수많은 훈련으로 자신만의 타격 감각을 익혔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런 사연을 담고있는 야구 연습장의 모습이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다. 이제 야구 연습장에서 타격을 즐기려면 물어물어 찾아가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 많던 야구연습장은 다 어디로 갔을까?

지난 16일부터 20일까지 이제는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서울 시내의 유명한 야구 연습장들을 찾아가 보았다.

[남영동] 시속 125㎞의 살인타석... "짜릿한 강속구를 원해?" 

남영동 야구 연습장 야구장·탁구장·당구장. 가히 도심의 종합운동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남영동 야구 연습장 야구장·탁구장·당구장. 가히 도심의 종합운동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박상익


서울 용산구의 남영동 야구 연습장의 건물 구조는 특이하다. 1층에는 당구장이 있고 2층에는 야구연습장과 함께 탁구장이 있다. 연습장과 함께 있는 펀치 머신(권투)이나 골킥 머신(축구)까지 합친다면 '종합운동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하철 1호선 남영역에서 나오자마자 '깡! 깡!' 하는 타격음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혹한다. '왕년에 동네 야구 좀 했다'는 사람들은 발걸음을 돌리기 힘들 정도다. 이곳은 남영역 바로 앞에 위치해 출퇴근 하는 직장인과 학생들이 많이 찾는다.

이곳은 공이 아주 빠르기로 이름난 곳이다. 멋모르고 시속 125㎞ 타석에 들어서면 공을 쳐내기는커녕 스치기도 어려워 '살인타석'으로도 불린다. 500원에 14~16개의 공이 나온다.

하지만 빠른 공에 매력을 느껴 이곳을 자주 찾는 사람들도 있다. 사회인 야구를 하는 김정식(26)씨는 "공이 빨라 치기 어렵고 타격자세도 흐트러질 수 있지만, 반사신경을 키워 강속구에 대비할 수 있어 좋다"고 말한다.

기자도 이곳을 중학생 때부터 줄곧 찾았다. 그 당시에는 공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빨라 '감히' 빠른 공 타석에는 가보지도 못하고 느린 공이 나오는 곳에서만 타격을 했다. 하지만 야구를 조금씩 배워가면서 '살인타석'에 들어갈 수 있었고, 어떤 때는 아저씨에게 "공이 왜 이렇게 느려졌어요?"라고 말하며 내심 뿌듯해 한다.

최근 인터넷을 떠도는 동영상으로 시속 185㎞의 광속구가 나오는 일본 야구연습장이 소개된 적이 있다. 게다가 11살짜리 초등학생이 그 공을 쳐내는 모습까지 소개됐다. 역시 세상은 넓고 고수는 많다.

[신림동] 젊은이들의 휴식공간... 안타 잘 치면 '뽀너스'도

신림동 야구 연습장 다른 곳보다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 젊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 신림동 야구 연습장 다른 곳보다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 젊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 박상익


서울 관악구의 신림동 야구 연습장은 유동인구가 많은 신림사거리에 위치해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 이곳에는 음료수 자판기와 케이블TV, 테이블이 갖춰져 있다. 이 덕분에 꼭 야구를 하지 않더라도 음료수를 마시며 친구를 기다릴 수 있는 휴식 공간으로 이용돼 젊은 사람들이 자주 찾는다.

저녁 시간에 찾은 신림동에는 학생들과 직장인들이 모여 왁자지껄하게 야구를 즐기고 있었다.

"다섯 개!"
"야 그게 어떻게 맞은 거냐? 스친 거지!"
"이것도 맞은 건 맞은 거니까 당연히 세야지!"


치열하게 '음료수 내기 타격'을 마친 사람들은 음료수를 마시며 중계 방송 중인 일본 프로야구를 보고 있었다. 회사원 정일현(29)씨는 "가끔 친구들끼리 모이면 이 곳에서 밥값이나 술값내기를 하는데, 야구를 하게 되면 기분이 상쾌해진다"며  내기에 이긴 승자답게 미소를 지었다.

이곳은 만들어진 지 약 4년밖에 되지 않아 시설이 깔끔한 편이며 공도 치기 쉽게 날아오는 편이다. 이곳은 처음 영업을 시작할 때 땅볼 없이 정면으로 날아가는 '안타'를 일정 개수 이상 치면 또 할 수 있도록 동전을 상품으로 주는 홍보 전략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이 곳의 기계는 다른 연습장보다 공 장전이 느려, 잘못하다간 돈을 넣고도 공이 나오지 않을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12~13개의 공이 나오며, 한 게임에 500원.

[인사동] 데이트 하신다고요? 힘자랑하고 싶다면

인사동 야구 연습장 인사동은 남녀 커플이 많이 찾는 편이다. 요새는 직접 스윙을 해보는 여성들도 늘었다.

▲ 인사동 야구 연습장 인사동은 남녀 커플이 많이 찾는 편이다. 요새는 직접 스윙을 해보는 여성들도 늘었다. ⓒ 박상익


서울 종로구의 인사광장 입구에 위치한 인사동 야구 연습장은 시설이 오래되었지만 데이트 장소로 유명한 이 지역의 특성상 연인들이 많이 찾는다. 이곳에도 골킥 머신·펀치 머신·미니 농구 게임 등이 갖춰져 있다.

여자친구가 있는 남성이라면 이곳에서 힘자랑을 해도 좋을 법하다. 인사동을 데이트 코스로 잡았다면 아기자기한 소품을 선물해 환심을 사고, 야구 연습장에서 힘자랑을 하며 만능 스포츠맨임을 내세우자. 여성들도 평소 구경하기도 힘든 야구 배트를 손에 쥐고 날아오는 공을 향해 힘차게 휘둘러보자. 묵은 스트레스가 '확' 풀릴 것이다.

인사동 야구 연습장은 한 게임에 500원이며, 10~12개의 공이 나온다. 공의 개수가 적고 공이 나오는 시간 간격이 좁다는 점이 아쉽다. 타석에 들어서서 몸이 풀렸다 싶으면 끝나버린다. 공이 높게 날아와 정확한 스윙을 할 수 없다는 것도 단점. 느린 변화구(?)를 정확히 맞추지 못한다면 연인에게 따가운 눈총을 받을지도 모른다.

야구연습장의 스타가 되려면?

그렇다면 야구 연습장에서 잘 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연습장에서 스윙을 하는 것도 기본적으로는 실제 야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야구는 투수가 공을 던질 때 타자가 그에 맞춰 타이밍을 잡지만 연습장에서는 툭 하고 나오는 공에 타이밍을 잡지 못해 헛스윙을 하기 쉽다.

이를 보완하려면 공이 날아오는 피칭머신을 유심히 살펴봐야 한다. 대개의 연습장에서는 공이 날아올 때 신호등이 켜져 이에 맞춰 휘두르면 된다. 신호등이 없다면 공이 날아오기 직전 기계에 장전되는 것을 봐야 한다.

이때 바른 자세로 백스윙 하고 스윙을 시작하면 무리없이 공을 맞출 수 있다. 다만 즐기기 위해 하는 연습이니만큼 무조건 빠른 공에 도전하는 것은 좋지 않다. 자신의 능력에 맞춰 부담없이 치는 것이 다치지 않고 타격을 즐기는 방법이다.

야구 연습장의 추억, 그 많던 연습장 어디로 갔을까?

한 판에 300원 강원도 춘천시 남춘천역 앞의 야구 연습장.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 듯 곳곳이 녹슬어 있다.

▲ 한 판에 300원 강원도 춘천시 남춘천역 앞의 야구 연습장.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 듯 곳곳이 녹슬어 있다. ⓒ 오마이뉴스 김귀현



과거 동네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야구 연습장은 점차 땅값이 오르면서 하나둘 사라지게 되었다. 한 판에 300~500원의 적은 돈을 받으면서, 많은 공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현재 남아있는 야구 연습장은 1층에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 대신 주로 건물 옥상이나, 주차장 위에 설치해 공간 효율을 높이고 있다. 남영동 연습장은 1층에 당구장이 있으며, 신림동 연습장은 화장품 매장, 인사동 연습장은 주차장으로 땅의 이용도를 높이는 쪽으로 살아남았거나 새로 만들어졌다.

최근엔 실내에서 사격장과 야구장을 겸하는 방식의 연습장이 생겼다. 그러나 이곳은 매우 좁고 공이 나오는 거리도 매우 짧아 정상적인 타격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 많던 야구연습장은 세월이 변하는 것처럼 서서히 우리 곁에서 사라졌다. 동시에 '왕년의 동네 홈런왕'에 대한 추억도 서서히 희미해지는 것만 같다. 하지만 기분이 울적할 때, 친구들과 왁자지껄하게 놀 때, 애인에게 멋진 모습을 보이고 싶을 때. 아무 때나 와서 누구나 즐길 수 있는 500원의 행복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쭉~.

"공에 맞으면 물파스 발라주죠"
[인터뷰] 15년간 야구 연습장 운영한 유태인씨
야구 연습장의 안전수칙 '한 타석에는 한 사람만 출입합시다', 솔로천국 커플지옥?

▲ 야구 연습장의 안전수칙 '한 타석에는 한 사람만 출입합시다', 솔로천국 커플지옥? ⓒ 박상익

"10년도 넘었어. 한 15년쯤 되나?"

공 속도가 빠르기로 소문난 남영동 야구연습장에서 10년 넘게 연습장 관리를 맡고 있는 유태인씨(60)를 만나 보았다.

유씨는 이 곳이 나름의 역사가 있는 곳임을 강조했다. 비록 야구 인기가 예전만 못하다지만 최근 포스트시즌 등의 흥행은 분명 연습장에도 좋은 일일터.

유씨는 "축구도 월드컵 시즌에 인기가 올라가는 것처럼 야구도 흥행이 되면 이곳도 영업이 잘된다"고 말했다.

남영역 야구연습장이 다른 곳과 달리 특별한 점은 운영상의 개선사항을 건의해 채택이 되면 3만원어치 문화상품권을 준다는 것이다. 실제로 '연습장 내 불편사항을 말하려는데 카운터가 어디있는지 몰라 안내문을 붙이면 좋겠다'는 의견과 '쓰레기통이 넘어질 것 같은 위치에 있어 불안하니 다른 곳으로 옮겨달라'는 의견이 채택되어서 문화상품권을 보냈다고 한다.

오랜 시간동안 연습장을 운영하면서 여러 일들을 겪었을텐데 재미있었던 일화는 없었을까?

유씨는 "다른 사람들이 빤히 보고 있는 데도 애정행각을 벌이는 젊은이들이 있는데 정말 꼴불견"이라면서 "애인의 타격을 거들어준다며 타석에 같이 들어가는 것은 정말 못 봐준다"며 혀를 찼다.

또한 취객이 공을 치려다가 타구에 빗맞아 타박상을 입은 적도 있다고. 그런데 "취객이 책임을 연습장으로 돌려 경찰에 신고를 하는 어이없는 일까지 있었다"며 "공에 맞으면 내가 할 수 있는건 물파스를 발라주는 것"이라면서 웃었다.

참고로 야구연습장에 붙어있는 안내문을 읽어보자.

'2인 1타석 금지, 취객 이용 금지'

재미를 위해 기본을 포기하면 사고 위험과 함께 다른 사람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다.

야구 야구연습장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