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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환이 쓴 산문 "대동아전쟁과 문필가의 각오"라는 글이 실린 <만선일보>
 유치환이 쓴 산문 "대동아전쟁과 문필가의 각오"라는 글이 실린 <만선일보>
ⓒ 박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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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환(청마, 1908∼1967)이 쓴 친일 산문이 발견되어 관심을 끈다.

유치환이 1942년 2월 <만선일보>에 발표한 ‘대동아 전쟁과 문필가의 각오’라는 제목의 산문이 발견되었다. 이 산문은 박태일 경남대 교수가 발견했는데, 박 교수는 오는 27∼28일 영남대에서 열리는 ‘한국어문학회 전국학술대회’에서 <청마 유치환의 북방시 연구-통영 출향과 만주국, 그리고 부왜 시문>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할 예정이다.

유치환은 이 글에서 “오늘 대동아전(大東亞戰)의 의의와 제국(帝國)의 지위는 일즉 역사의 어느 시대나 어느 나라의 그것보다 비류 없이 위대한 것”이라고 해놓았다. 다음은 “대동아전쟁과 문필가의 각오”라는 제목의 산문 전문이다.

<만선일보>에 실린 유치환의 산문.
 <만선일보>에 실린 유치환의 산문.
ⓒ 박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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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대동아전(大東亞戰)의 의의와 제국(帝國)의 지위는 일즉 역사의 어느 시대나 어느 나라의 그것보다 비류없이 위대한 것일 겝니다. 이러한 의미로운 오늘 황국신민(皇國臣民)된 우리는 조고마한 개인적 생활의 불편가튼 것은 수(數)에 모들 수 업는 만큼 여간 커다란 보람이 안입니다.시국(時局)에 편승하여서도 안 될 것이고 시대(時代)에 이탈하여서도 안 될 것이고 어데까지던지 진실한 인간생활의 탐구를 국가의 의지(意志)함에 부(副)하야 전개시켜 가지 안으면 안 될 것입니다. 나라가 잇서야 산하도 예술도 잇는 것을 매거(枚擧)할 수 업시 목격하고 잇지 안습니까. 오늘 혁혁(赫赫)한 일본의 지도적(指導的) 지반(地盤) 우에다 바비론 이상의 현란한 문화를 건설하여야 할 것은 오로지 예술가에게 지어진 커다란 사명이 아닐 수 업습니다.”

이에 대해 박태일 교수는 “유치환이 고향을 부리나케 떠나 만주로 솔가해 올라간 것은 흔히 알려져 온 바와 같이 시대적 억압과 왜의 지식인 탄압으로 말미암은 신변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지사적 결단이 아니었다”고 밝혔다.

박 교수는 “오히려 통영 지역사회 안쪽에 널리 그리고 오래도록 전승되어 오는바, 더는 고향 사회에 머물기 힘들만 한 극히 개인적인 집안 안쪽 문제를 일으켜 급작스레 떠날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논리적”이라고 지적했다.

유치환의 친일 논란은 그동안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유치환이 썼던 시 “수”(首, 1942.3)와 “전야”(前夜, 1943.12), “북두성”(北斗星), 1944.3) 등을 두고 일부에서는 친일성을 제기해 왔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이들 시편들은 친일성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해석에 있어 논란을 빚기도 했다. 이런 속에 유치환이 일제를 노골적으로 옹하는 내용의 산문이 나와 관심을 끈다. 이는 유치환이 만주 체류 시절 내놓은 유일한 산문으로 보인다.

거제시 둔덕면에 있는 '청마 고향 시비'.
 거제시 둔덕면에 있는 '청마 고향 시비'.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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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 둔덕중학교 교정에 조성된'청마동산' 전경.
 거제 둔덕중학교 교정에 조성된'청마동산' 전경.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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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룡 회장 “호들갑 떤다”-김영만 대표 “기념사업 중단해야”

통영과 거제에는 유치환과 관련된 기념물을 조성해 놓았고, 이곳에서는 내년 탄생 100주년을 앞두고 기념행사를 계획하고 있다. 이런 속에 유치환의 친일산문이 나와 기념사업과 관련된 논란도 일고 있다.

통영 남망산 공원에서 유치환이 쓴 시 “깃발”을 새겨놓은 시비가 있으며, 생가도 복원해 놓았다. 또 거제 둔덕중학교는 ‘1교1특색사업’으로 교내에 ‘청마동산’을 조성해 놓고 ‘유치환의 문학 체험활동’을 해오고 있다. 또 통영문인협회는 ‘유치환 추념 편지쓰기 대회’를 열어오고 있다.

지난 해 전교조 경남지부는 “1943년 조선의 청년 학생들에게 일본 천황을 위해 기꺼이 죽음의 전장터로 나가라고 선동하는 시를 특집으로 꾸몄던 <춘추>지 12월호에 시 ‘전야’를 발표했고, 서구 근대를 극복한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의 수립을 축원했다는 내용의 <조광>지에 시 ‘북두성’을 발표하는 등 친일문학을 했다는 의혹을 사고, 친일적 성격의 ‘하얼빈협화회’라는 조직에 근무했다”며 “다양한 기념사업의 중단”을 촉구한 바 있다.

통영 남망산 공원에 있는 유치환 시비.
 통영 남망산 공원에 있는 유치환 시비.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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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룡 통영예총 회장은 “이번 산문 발견을 놓고 심해에서 석유를 발견하거나 산에서 금맥을 찾은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면서 “지금 우리의 잣대로 그 시대를 제단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청마의 산문을 보면 대개 원고지 10~20매 정도이고 1950년대 대구매일에 쓴 칼럼도 그 정도다”면서 “이번에 발견된 산문은 원고지 2매 정도 밖에 안된다. 시 한 편도 원고지 3~4매 정도다. 당시 만선일보가 일본 기관지 비슷했는데, 원고 분량이 적다는 것은 청마가 마지못해 실었다는 반증”이라고 말했다.

또 그는 “글 내용이 친일이라면 학도병이나 정신대, 나라를 팔아먹는다는 내용이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내용을 보면 예술을 더 잘하자는 것이다”고 덧붙였다.

정 회장은 “청마가 쓴 글이라고 하는데 문체가 이상하다. ‘~겝니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청마가 쓴 산문을 읽어보면 이런 표현은 없다. 박태일 교수가 중국에 가서 연구를 했다고 하는데, 신문 지질도 봐야 한다”고 말했다.

김영만 친일청산시민행동 대표는 “시 ‘수’ 등의 해석을 놓고 논란이 있었다. 그동안 자료를 찾는데 미흡했던 측면이 있었다”면서 “이번 산문을 볼 때 유치환은 친일하겠다는 입장을 그 당시에 확고하게 가지고 있었던 사람임이 확인되었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통영에서는 내년에 유치환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을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이번 친일산문 발견으로 인해 그 사업 추진을 당장에 중단해야 하고, 자치단체와 중앙정부의 지원도 중단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정 회장의 주장에 대해 박태일 교수는 “이런 자료가 나왔는데도 아직도 문제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 유치환에 대해 긍정과 부정을 떠나서 사실을 시인하고, 문제를 바닥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교수는 “당시 만선일보는 자기들의 논조에 맞는 사람 9명에게 똑 같은 분량으로 원고를 청탁해서 연재로 실었다”면서 “9명 모두의 원고 분량은 400자 정도다. 만선일보는 당시 대동아전쟁이 시작되면서 그같은 원고를 부탁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 교수는 “신문 지질 운운하면서 조작 가능성을 주장하는 모양인데, 만선일보 자료를 영상을 떠서 공개하고 있다. 조작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말했다.

남망산 공원에서 내려다 본 통영 시가지 전경.
 남망산 공원에서 내려다 본 통영 시가지 전경.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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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유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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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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