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상원사로 가는 길.
 상원사로 가는 길.
ⓒ 안병기

관련사진보기



상원사로 오르는 길은 아늑하다. 세조가 목욕할 때 옷을 걸어놓았다는 관대걸이에서의 소란스러움과는 딴판이다. 아마도 길바닥이 블록을 깔지 않은 흙길이었다면 더 오롯한 길이었을 것이다.

왁자지껄 떠들며 내려오는 한 떼의 등산객들이 지나가길 기다려 천천히 상원사로 향한다. 상원사는 월정사에서 서북쪽으로 9㎞쯤 떨어진 오대산 산록에 좌정하고 있다. 신라의 보천과 효명(신라 성덕왕), 두 왕자가 이곳에서 1만 문수보살을 친견한 후, 왕위에 오른 성덕왕이 즉위 4년 만인 서기 705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처음 이름은 진여원(眞如院) 이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세조가 이곳에서 기도하던 중에 두 차례나 문수보살을 만나 병을 고쳤다는 얘기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얘기다. 이에 보답이라도 하려는 듯 세조는 절 이름도 '상원사'라 바꾸고 원찰로 정하는 등 갖가지 인연을 맺었다. 그렇게 해서 상원사는 서서히 문수보살의 성지가 된 것이다.

상원사의 정신적 바탕을 이루는 세 스님

부도밭. 좌로부터 방한암, 탄허 스님, 희찬 스님의 순이다.
 부도밭. 좌로부터 방한암, 탄허 스님, 희찬 스님의 순이다.
ⓒ 안병기

관련사진보기



상원사로 올라가기 직전, 오른쪽 산기슭에 있는 부도밭으로 향한다. 이곳에는 상원사의 오늘을 있게 한 세 분의 스님이 세상의 분주함을 그치고 적멸에 들어 있다. 방한암 스님과 탄허 스님, 그리고 만화 스님이다.

방한암 스님(1876~1951)은 경허, 만공, 수월 스님 등과 더불어 근세의 선풍을 다시 일으키신 것으로 유명하신 스님이다. 한국전쟁 때 국군이 적의 군사 거점이 된다 하여 상원사를 불사르려 할 적에 "나는 부처님의 제자요, 법당을 지키는 것이 나의 도리이니,  법당과 함께 소신 공양하겠다"하여 절을 끝내 지켜냈다.

1913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난 탄허 스님은 불교 경전의 최고봉인 화엄경 120권을 번역, 출간한 것을 비롯하여 화엄론 40권, 육조단경, 보조법어 등 수많은 불전을 번역하신 역경의 선구자셨다.

1919년 평북 덕천에서 태어난 만화당 희찬 대선사는 6.25 때 조실인 방한암 스님만 남겨두고 떠날 수 없다며 끝까지 남아서 방한암 선사의 좌탈입망을 지켜보았던 효가 돋보이는 스님이다.  다년 간 월정사 주지로 있으면서 6.25 전쟁으로 소실된 전각을 복구하는데 진력한 스님이다.

음역이 높고 여운이 길게 가는 상원사동종의 종소리

소림초당 앞에 있는 동종각.
 소림초당 앞에 있는 동종각.
ⓒ 안병기

관련사진보기


국보 제36호 상원사동종에 새겨진 비천상.
 국보 제36호 상원사동종에 새겨진 비천상.
ⓒ 안병기

관련사진보기


돌계단을 올라와 상원사에 발을 디디자, 가장 먼저 객을 맞는 것은 2층 누각인 만화루다. "너에게는 볼일이 없어"라며 무심하게 만화루 옆을 스치듯 지나면 작고 아담한 건물이 눈에 들어 온다. 우리나라 종 가운데에서 가장 오래된 종인 상원사동종을 보호하고 있는 동종각이다.

상원사동종은 성덕대왕신종, 국보 제120호 수원 용주사범종과 함께 현재 우리나라에 남은 완전한 형태의 통일신라시대 범종 3구 가운데 하나이다. 신라  성덕왕 24년(725)에 조성된 이 종은 본래 안동부 누문에 걸려 있었다고 하는데, 조선시대 예종 원년(1469)에 이곳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종의 이동에도 왕실의 원찰이라는 힘의 논리가 작용한 모양이다.

종각의 문은 굳게 닫혀 있다. 할 수 없이 문틈으로 종의 요모조모를 살핀다. 높이 167cm, 지름 91cm라 한다. 그나마 종복(鐘腹)에 새겨진 비천상이라도 볼 수 있으니 다행이다. 상원사 동종의 비천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비천상으로 널리 알려졌다.

허공에 뜬 비천상은 각기 무릎을 세우고 수공후와 생황을 연주하고 있다. 천의의 끝 부분은 인동 모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휘날리는 천의 자락이 매우 아름답고 경쾌한 느낌을 준다.

수공후는 우리나라 고유의 악기가 아니라 서역 계통의 악기이다. 외래 악기가 등장하는 것은 비천상의 형식이 중앙아시아-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전래되었음을 말해주는 증거이다. 종의 모양은 이렇게 아름답지만 소리는 어떨까. 최순우 선생의 이야기로 한 번 들어보자.

"어느 해 겨울 눈이 강산처럼 쌓인 달 밝은 하룻 밤을 오대산 상원사에서 지낸 일이 있었다. 새 소리 물 소리도 그치고 바람도 일지 않는 한밤 내내 나는 산 소리도 바람 소리도 아닌 고요의 소리에 귓전을 씻으면서 새벽 종소리를 기다렸다. 웅장한 소리 같으면서도 맑고 고운 첫 울림이 오대산 깊은 골짜기와 숲속의 적막을 깨뜨리자 길고 긴 여운이 뒤를 이었다. 어찌 생각하면 슬픈 것 같기도 하고 어찌 생각하면 간절한 마음 같기도 한 너무나 고운 소리였다" -<최순우 전집> 2권, '상원사 동종' 중에서

매우 안타까운 일이지만, 지금 우리는 상원사 동종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종의 보호를 위해 더는 종을 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내겐 상원사 종소리가 녹음된 CD가 있다. 그것이라도 가끔 들을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CD에 녹음된 종소리를 근거로 평하자면 상원사동종의 소리는 에밀레종의 그것보다 음역이 훨씬 높다. 에밀레종 소리보다 경쾌하게 들리면서 "데애앵댕~" 울리는 여음이 에밀레종보다 훨씬 멀리까지 가는 느낌이다. 

만약 이렇게 비 내리는 날에 상원사동종을 친다면 그 소리가 낮게 깔려 오대산 골짜기를 굽이굽이 휘감고 돌아가리라.

권력이 섬긴 부처와 민중이 섬긴 부처

문수전.
 문수전.
ⓒ 안병기

관련사진보기


국보 제221호 문수동자상의 얼굴 부분. 상원사 게시판 부착물을 사진 찍어 트리밍한 것이다.
 국보 제221호 문수동자상의 얼굴 부분. 상원사 게시판 부착물을 사진 찍어 트리밍한 것이다.
ⓒ 안병기

관련사진보기


문수전 계단 옆에 있는 고양이 석상.
 문수전 계단 옆에 있는 고양이 석상.
ⓒ 안병기

관련사진보기



종각을 지나 문수동자상을 친견하려고 문수전으로 향한다. 문수전 안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상원사 문수동자상은 예배의 대상으로서 만들어진 국내 유일의 동자상이다.

동자상은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다. 머리는 양쪽으로 묶어 올린 동자머리를 하고 있으며 얼굴은 볼이 도톰하다. 오른손은 어깨 높이로 들어 엄지 손가락과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고 있으며 왼손은 엄지 손가락과 집게손가락이 닿을락말락 하다. 왼쪽 다리를 안으로 접고 오른쪽 다리를 밖으로 둔 자세로 앉아 있다.

1984년, 동자상 안에서 발견된 발원문에는 "세조 12년(1466)에 세조의 둘째 딸인 의숙공주와 남편인 정인지의 아들 정현조가 세조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고자 오대산 문수사에 여러 불·보살상을 만들어 모셨다"라는 내용을 담겨 있다. 아마도 아버지인 세조가 저지른 업보가 딸이 보기에도 안타까웠나 보다.

문수전 계단 옆에는 고양이석상이 있다. 법당에 들어가려던 세조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면서 들어가지 못하게 함으로써 자객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준 고양이에게 보답하고자 세운 것이라고 한다. "개에게도 불성(佛性)이 있다"더니 고양이에게도 불성이 있나 보다. 고양이 이야기는 도리어 세조가 찬탈한 권력이 얼마나 허약한 기반에 자리 잡은 것인지를 웅변해준다.

영산전.
 영산전.
ⓒ 안병기

관련사진보기


영산전 앞 석탑 몸돌에 새겨진 부처상들.
 영산전 앞 석탑 몸돌에 새겨진 부처상들.
ⓒ 안병기

관련사진보기


문수전 오른쪽에 있는 영산전으로 올라간다. 돌 계단 옆, 단풍진 담쟁이덩굴이 이 전각을 고풍스럽게 보이게 한다. 실제로 영산전은 오대산을 통틀어 가장 오래된 전각이다.  안에는 석가 삼존상과 십육나한상을 봉안하였다.

영산전 앞에는  본래의 모습을 알 수 없을 만큼 심하게 파손된 돌탑이 있다. 지붕돌에는 연화문이 새겨져 있고, 몸돌에는 여기저기 부처의 형상이 조각되어 있다. 마치 석탑의  미니어처를 보는 것 같아 그 옛날 석탑 조형의 한 단면을 추측할 수 있게 한다.

내 심미안이 남다른 것일까. 미안하지만, 나는 눈을 약간 아래로 내리 깐 문수전 문수동자상에서 성스러움 대신 거만한 권력의 모습을 보았다. 문수전에 좌정한 문수동자는 어디까지나 권력자의 부처일 뿐, 민중의 부처는 결코 아니다. 내겐 문수전의 화려한 문수동자보다 이름없는 각수(刻手)가  돌에 새긴 이 투박한 부처님이 훨씬 더 좋다.

'상원'이란 이름을 헛되이 얻은 것이 아니더라

문수전 마당에서 바라본 풍경.
 문수전 마당에서 바라본 풍경.
ⓒ 안병기

관련사진보기



상원사를 떠나기 전, 문수전 앞마당에 비켜서서 노인봉 기슭을 에워싼 구름을 바라본다. 정말 탈속한 풍경이 아닐 수 없다. 그러길래 320년 전 이곳에 왔던 조선 선비도 그토록 감탄을 아끼지 않았으리라.

<산중일기>의 저자 정시한(1625 ~ 1707)은 한양에서 태어났지만, 이곳에서 멀지 않은 원주에 은거하면서 농업에 종사하는 한편으로 후진 양성에 힘썼다. 그가 상원사에 온 것은 1687년 3월 11일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사흘을 묵다 떠났다. 그는 도착 첫날인 11일치 일기에다 "전에 들으니 우리나라에서 상원사가 제일이라고 하더니 이름을 헛되이 얻은 것이 아니었다 "라고 쓴다.

"13일 맑았다. 비가 온 뒤에 날씨가 청명하였다.

아침 식사 후에 경신 및 경수와 승려 유선과 함께 뒷봉우리에 올라가니 눈 아래 수백리에 흰 구름이 펼쳐져서 마치 은빛 바다가 아득한 듯하고 늘어선 산봉우리가 구름 위로 솟아 있었다. 바라보니 파도가 출렁이는 형상과 같았다. 크고 작은 백조, 중령, 월악, 속리, 용문, 팔봉 등의 산이 있는 듯하고 정규, 비로, 백운 등이 마치 지척 사이에 있는 듯하여 참으로 일생일대의 기이한 장관이 아닐 수 없다.


한동안 바라보고 있노라니 몸과 마음이 가벼워져서 자연히 속세를 벗어난 듯한 생각이 들었다. 얼마 후에 내려오니 승려들이 꽃을 만들어 놓고 음식을 차려 놓은 다음 법복을 입고 북과 징을 치면서 법사를 열고 있었다. 볼만하였다. 우징이 법문을 강론하니 승려나 속인으로 수십 명의 보고 들은 자들이 모두 칭찬하였다."-정시한의 <산중일기>, 1687년 3월 13일치

그렇다고 그가 상원사의 모든 것에 만족했던 것은 아니다. 3월 12일치 일기를 보면 "암자의 승려 광해가 기일로 인하여 재를 차리느라 시끄럽고 객승도 많았다. 지대가 높았으나 한적하지 못한 것이 흠이었다"라고 쓰고 있다. 320년 전의 상원사나 지금의 상원사나 소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소음으로 쟁쟁한 두 귀로 아름다운 상원사의 종소리를 들을 수 있겠는가. 어쩌면 굳이 쇠의 부식을 핑계삼지 않더라도 우리에겐 이미 상원사의 종소리를 들을 자격이 없는지도 모른다.

다시 여기에 올 적엔 상원사가 온갖 삼라만상이 내는 소라를 다 들을 수 있을 만큼 차분하고 조용한 암자가 되기를 희망하며 상원사를 나선다.

덧붙이는 글 | 지난 17일에 다녀왔습니다.



태그:#오대산 , #상원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