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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는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만나고 있다. 그런 와중에 서울의 정치권에서는 또 다른 만남의 계획이 논란거리로 떠올랐다.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후보와 부시 미국 대통령 사이의 면담이 그것이다.

 

두 사람 사이의 면담계획을 둘러싼 논란이 확대되는 가운데, 2일 오후 주한 미국대사관은  면담계획이 없다고 공식 확인했다. 맥스 곽 주한 미 대사관 대변인은 "백악관이 부시 대통령과 이명박 후보간 면담 요청을 받았으나 그러한 면담은 계획되어 있지 않다"면서 "이는 미국 정부의 공식 입장"이라고 밝혔다.

 

이로써 한나라당이 발표했던 ‘부시-이명박 면담’ 일정은 없었던 일이 되었다. 그러나 이를 둘러싼 논란까지 일단락된 것은 아니다. 대통령선거를 불과 2개월 앞둔 시점에 이같은 ‘속보이는’ 면담을 추진한 발상에 대한 비판은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이다.

 

김칫국부터 마신 이명박 후보

 

애당초에 부시 대통령과의 면담일정은 잡히기나 한 것이었을까. 한나라당은 지난 달 28일, 10월 중순으로 예정된 이 후보의 미국 방문 기간에 이 후보와 부시 대통령간 면담이 예정돼 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주한 미 대사관 측에서는 이 후보 측에서 과잉해석한 것이라는 말이 나왔다. 문서상으로 보아도 부시 대통령의 면담계획이 확정된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백악관이 이 후보 측에 보낸 문서에는 ‘두 사람의 만남이 매우 가치 있는 기회라고 판단하고 이번 면담 추진에 모든 최선을 다할 것(give every consideration)’이라고 돼 있다고 한다. 상황에 따라서는 애당초 확정된 것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면담추진의 주역으로 알려진 강영우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차관보는 면담계획을 확정된 것처럼 공개했고, 한나라당도 같은 내용을 알렸다. 면담을 둘러싼 여러 논란이 확산되는 가운데서도, 이 후보 측은 면담은 예정대로 진행될 것이라고 애써 낙관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결국 면담은 불발로 그치게 되었다. 무수한 논란만 남긴채, 이명박 후보 측은 김칫국부터 마셨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확인되지 않은 또 하나... 한국 정부가 방해했는가

 

그런데 확인되지 않은 또 하나의 주장이 있다. 강영우 차관보가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가졌는데, 그는 이번 면담이 한국 정부의 방해 압력으로 혼선을 빚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강 차관보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외교적으로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미국 대통령이 한국의 야당 대선후보를 만나려한다고, 한국 정부가 방해 압력을 가한다?

 

분명한 내정간섭인데,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강 차관보가 제시하는 ‘사실’(fact)을 찾아보려 하니 막상 별 것이 없다. "부시 대통령과 이 후보의 면담 결정이 알려지자 미 행정부에 많은 항의와 압력이 들어왔다고 들었으며, 이는 면담을 막아보려고 한국 정부가 그랬을 것이 뻔하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 정부가 면담 결정에 대해 주한 미 대사관과 미 행정부에 항의했고, 워싱턴의 주미 한국 대사관에도 야단을 쳤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강 차관보의 주장대로라면, 한국 정부의 압력에 따라 백악관이 면담결정을 취소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물론 사적인 경로를 통한 의사소통은 있었을지 모르지만, 정부 차원에서 그같은 내정간섭을 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한국 정부는 단호하게 부인하고 있다. 청와대는 한국 정부의 항의설에 대해 "어떤 지시를 내리거나 미국 측에 우리 의견을 제시한 바 없다"고 부인했다. 외교부도 "사실관계 확인차 물어본 것일 수는 있지만 한국 정부가 반대나 찬성 입장을 나타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밝혔다.

 

자칫 외교적 논란거리가 될 수 있는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에 정부로서도 매우 조심스러운 입장일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속으로야 부글부글 끓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내놓고 뭐라 하기도 어려운 입장이었을 것이다.

 

독이 든 사과를 베어 물은 이명박 후보

 

결국 가장 당혹스러운 것은 한국 정부가 아니라 이명박 후보가 되어버렸다. 여러 가지 논란만 남기고 면담계획이 없었던 것으로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번 면담계획을 잡는 과정에서 한미 양국의 외교라인이 배제된데 대한 불만이 제기되고 있고, 특히 특정 대선후보를 민다는 논란에 부담을 느낀 백악관이 면담을 재고할지 모른다는 관측이 대두되었다. 그럼에도 이 후보측에서는 설마했던 것 같다.

 

결국 부시 대통령과의 면담추진은 이 후보에게는 득보다 실이 큰 프로그램이었다.

 

대통령선거를 불과 2개월 남겨놓은 시점에 미국 대통령을 만나려 하고, 거기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모습이 어떻게 비쳐졌을까. 더구나 아직 확정되지도 않은 일정을 가지고 ‘기대성’ 발표를 한 것이 되어, 한국 유력 대선후보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 것이다.

 

미국 대통령의 등에 업혀 대선에서 덕을 보려한다는 ‘사대주의’ 비판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되었다. 또한 확정되지도 않은 내용을 발표했다는 문제도 드러내었다.


부시 대통령도 마찬가지이다. “일정을 잡아보라”고 한 그의 의중은 무엇이었을까. 이명박 후보가 아무리 차기 정권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 있는 후보라 해도, 부시 대통령은 한국의 대선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는 의심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되어있다.

 

한국의 대선후보들 가운데 가장 미국에 가까운 입장을 보이고 있는 인물에게 힘을 실어준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다. 마지막 순간에 발을 빼기는 했지만, 공연한 논란만 초래하였다.

 

애당초 이명박 후보에게나 부시 대통령에게나, 모두 득보다는 실이 클 수밖에 없는 면담계획이었다. 미국 대통령 40분동안 한번 만난다고 해서 표가 늘어나는 시대는 이제 지나지 않았을까.

 

부시 대통령 면담이라는 사과 속에 독이 들어있는지, 약이 들어있는지도 모르고 덥석 베어물었던 이명박 후보. 미국 대통령에게 인정받는 모습을 통해 대선에서 대세를 굳히려 할 생각이었다면, 낡은 사고였다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래저래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부시- 이명박 면담’. 한미관계의 21세기 버전으로는 처음부터 어울리지 않는 발상이었다.


태그:#이명박, #부시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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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종양 수술 이후 방송은 은퇴하고 글쓰고 동네 걷기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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