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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만남 뒤에는 정상회담을 만들어낸 숨은 주역들이 있다.
▲ 2007 남북정상회담 드라마의 두 주인공. 이들의 만남 뒤에는 정상회담을 만들어낸 숨은 주역들이 있다.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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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간에는 공개와 비공개, 여러 가지 채널이 있다. 정상회담 추진과정에서 공개-비공개 채널이 모두 활용됐지만, 내적으로는 아주 투명하게 처리됐다. 그 부분에 관해서는 참여정부의 정신이 그대로 살려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겠다."

지난 8월 8일 오전 청와대 춘추관. 제2차 남북정상회담 합의 사실을 발표한 기자회견장에서 이번 정상회담 준비과정에 '뒷거래' 의혹이 없다는 걸 분명히 밝혀 달라는 한 기자의 질문에 김만복 국가정보원장은 이렇게 답변했다.

김만복 원장의 설명대로, 이번 제2차 남북정상회담 합의의 이면에는 비공식 채널과 공식 채널이 다양하게 가동되었다. 특히 이번 합의는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8월초까지 10개월간 정부의 대북 비선과 비공식-공식 채널이 극도의 보안 속에서 가동되어 이뤄낸 결과물이다.

<오마이뉴스>는 남북정상회담 개최에 직간접으로 관여한 남측 인사들뿐만 아니라 이들의 '협상 채널'이었던 북측 인사들을 다각도로 취재해 이같은 사실을 처음 확인했다.

<오마이뉴스>, 지난해 11월 안희정씨의 베이징 대북 비밀접촉 첫 보도

노무현 정부에서 남북정상회담 추진 사실이 가장 먼저 알려진 것은 지난해 11월 9일 <오마이뉴스> 보도(노무현-김정일 핵심 측근, 베이징 등에서 두 차례 접촉)를 통해서였다.

<오마이뉴스>는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신뢰를 받는 핵심(측근) 인사들이 북한 핵실험 이후인 10월 20일경 베이징에서 연쇄 접촉을 갖고 6자회담 복귀 일정 및 향후 정상회담 추진 등에 대해 원칙적으로 합의했다"고 보도했다.

기사에서 언급한 노 대통령의 핵심 측근은 노 대통령의 '동업자'로 통하는 안희정씨였다. 안씨는 당시 북한 미사일 발사의 의도를 파악하고, 남북 관계의 대화채널을 복원하는 데 주로 초점을 맞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씨는 이후 <오마이뉴스>의 2차 보도를 계기로 "10월 20일 베이징에서 북한의 이호남 참사를 만났다"고 밝혀 비밀접촉 사실을 시인했다. 그러나 안씨는 "당시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으로 남북간 대화채널이 무너진 상황이었다"면서 '남북 정상회담 밀사설'을 부인했다.

'2007 남북정상회담'이 2일부터 4일까지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평양에서 열린다. 사진은 2일 낮 노무현 대통령 일행의 평양도착 환영식이 열릴 예정인 3대헌장기념탑.
 '2007 남북정상회담'이 2일부터 4일까지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평양에서 열린다. 사진은 2일 낮 노무현 대통령 일행의 평양도착 환영식이 열릴 예정인 3대헌장기념탑.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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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오마이뉴스>가 리호남 북한 내각 참사를 만나 확인한 바에 따르면, 안희정씨와 이화영 의원, 그리고 리호남 참사 3인은 지난해 10월 20일 베이징 쿤타이호텔(昆泰大飯店)에서 만나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특사를 파견하는 문제'를 의논했다. 안씨는 당시 리 참사에게 자신을 '대통령의 어린 동업자'라고 소개하며 "대통령의 뜻을 전하러 왔다"고 말했다.

다만, 공식라인의 부활을 통한 특사 및 정상회담 추진을 도모한 안희정측과 비선라인을 통한 특사 및 정상회담 추진을 예상하고 나온 리호남측의 입장이 서로 달라 협상이 결렬되었던 것이다.

3인은 이날 기념사진을 찍고 '평양 모란각'에서 함께 저녁식사를 했으며 다음날 리 참사는 평양의 지시를 받아 특사와 정상회담 문제를 협의할 '확정회담'을 갖자고 역제안했다. 이후 리 참사는 안씨가 직접 평양을 방문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안씨는 이를 거절하고 대신 특사로 이해찬 전 총리가 들어가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12월 16일 이화영 의원이 그 전 단계로서 평양을 방문해 리 참사와 민화협의 김성혜 참사 및 박경철 부회장 등을 만났다.

리호남 "남북정상회담은 '안희정' 접촉부터 시작되었다"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안희정-이화영 의원과의 첫 비밀접촉 개설자이다 .
▲ 리호남 내각참사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안희정-이화영 의원과의 첫 비밀접촉 개설자이다 .
ⓒ 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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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베이징에서 <오마이뉴스> 기자와 만난 리 참사는 "그후 정상회담이 굉장히 전격적으로 이뤄진 것 같다"는 기자의 질문에 "그거야 '안'(안희정)을 만난 그 때부터 한 거죠"라고 답했다.

그는 "그 때부터 시작한 것이 마지막에 다 정해져서 몇 사람(김만복 국정원장과 서훈 대북전략국장 등)이 들어와서 수표(서명)한 것"이라고 밝혔다.

리 참사는 "그러면 정상회담은 '안'부터 시작되었다고 봐야 되나요"라는 기자의 거듭된 질문에 웃으면서 "그렇게 봐야 옳지 않아요?"라고 반문했다.

물론 안희정씨의 대북접촉 이전에도 비밀접촉은 있었다. 이와 관련 가장 주목할 대목은 지난해 5월 9일 노무현 대통령의 몽골 동포간담회 발언이다.

당시 몽골을 국빈방문중이었던 노 대통령은 울란바토르에서 가진 동포간담회에서 제2차 남북정상회담 개최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내 눈길을 끌었다.

노 대통령은 당시 "6월에 김대중 대통령께서 북한을 방문한다"고 전제하고 "김대중 대통령이 길을 잘 열어주면 저도 슬그머니 할 수 있고…, 저는 북한에 대해 완전히 열어놓고 있다"면서 "언제, 어디서, 무슨 내용을 얘기해도 좋으니 만나서 얘기해 보자"고 말해 사실상 '무조건 정상회담'을 제안했다.

그 다음에 주목할 대목은 지난해 8월 13일 가진 4개 언론사 외교·안보분야 논설위원들과의 비공개간담회 발언이다. 노 대통령은 이날 남북정상회담을 직접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남북 비밀접촉이 시도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말을 했다.

"북한과의 통로는 공식적인 통로가 가장 정확하다. 그간 비공식적 통로도 시도해봤으나 성과가 없었다. 그것이 정말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통하는 통로인지도 확인하기 어렵다." (2006년 8월13일, 4개 언론사 외교·안보분야 논설위원 비공개간담회)

본격적인 정상회담 추진은 1월 남북한 공식라인 금강산 접촉부터

리호남 참사와 바톤 터치해 이화영-이해찬 의원과의 면담을 이끈 대남사업 전문가이다.
▲ 김성혜 민화협 참사 리호남 참사와 바톤 터치해 이화영-이해찬 의원과의 면담을 이끈 대남사업 전문가이다.
ⓒ 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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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은 그후 내부논의를 통해 비공식 채널의 접촉을 중지시키고 공식채널(국정원)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물론 비공식적 통로는 우리측의 '진정성'을 전해 공식통로를 여는 역할에 초점이 맞춰졌던 것으로 보인다.

앞서 말한 대로, 친노 직계로 분류된 이화영 당시 열린우리당 의원은 12월 평양을 방문해 정상회담을 위한 특사를 제안하는 노 대통령의 의사를 전했다.

흥미롭게도 이 의원이 전한 '노 대통령의 뜻'에는 전에 영화배우 문성근씨를 통해 북측에 보낸 친서가 전달되었는지를 확인하고 싶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이후 이화영 의원의 대화 채널은 김성혜 참사로 지정되었다. 김성혜 참사는 2000년 6·15 공동선언 서명식장에도 모습을 드러낼 만큼 대남사업에서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본격적인 남북정상회담 추진은 사실상 남북한 공식라인이 금강산에서 접촉을 시작한 1월부터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는 사이에 지난 3월 초순 이해찬 전 총리의 방북이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청와대는 이 전 총리의 '대통령 특사' 자격을 부인했다. 하지만 그가 방북할 때 쓰고 간 '열린우리당 동북아평화위원회 위원장'이라는 모자는 급조된 것이었다.

이해찬 전 총리와 이화영 의원 등은 3월 중국 선양에서 리호남 참사의 안내를 받아 평양에 들어갔다. 그 때 평양에서 이해찬 전 총리와 접촉한 김성혜 참사는 그후 <오마이뉴스> 기자와의 만남에서 "서울 측이 약속을 잘 지키지 않고 말만 앞세운다"면서 남측이 공식라인과 비공식라인을 동시에 가동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피력했다.

공식라인과 동시에 진행된 이해찬-이화영의 3월 방북

결국 '노 대통령의 오른팔' 안희정-이화영 의원이 제2차 남북정상회담 레이스에서 노 대통령의 진정성을 북측에 전달하기 위해 투입된 '선발투수'라면, 남북한이 모두 믿을 수 있는 이해찬 전 총리의 역할은 '중간계투'였던 셈이다. 그리고 '최종 마무리'는 공식라인(국정원)에 넘겨졌다.

그러나 이때까지의 북측 입장은 "정상회담 개최에는 원칙적으로 동의하나, 시기는 주변정세와 남북관계 상황을 보면서 검토하겠다"는 것이었다.

본격적인 남북 고위급대화의 분위기가 무르익은 것은 북한이 영변 핵시설을 폐쇄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 감시단원을 받아들이는 등 2·13합의 이행이 순조롭게 진행되면서부터이다.

그 과정에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지난 3월 최측근인 김양건 국방위 참사를 대남정책을 총괄하는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에 임명한 사실이 나중에 알려져 관심을 끌었다. 통전부장 자리는 김용순 부장이 2003년 10월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지난해 초 림동옥 부장이 이어받았으나 림 부장마저 8월에 폐암으로 사망한 이후 공석이었다.

그동안 공석이었던, 대남정책을 총괄하는 통전부장이 확정됨에 따라 비로소 남북관계가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된 셈이다.

2006년 10월 베이징 비밀접촉의 주역들. 왼쪽부터 이화영 의원, 안희정씨, 이해찬 전 총리(자료사진).
 2006년 10월 베이징 비밀접촉의 주역들. 왼쪽부터 이화영 의원, 안희정씨, 이해찬 전 총리(자료사진).
ⓒ 오마이뉴스 권우성·이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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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차에 지난 5월 30일에는 김만복 국정원장이 심야에 서훈 국정원 3차장을 동행하고 남북장관급회담이 진행중인 서울의 한 호텔을 은밀히 방문해 남측 수석대표인 이재정 통일부장관과 밀담을 나눈 모습이 언론에 포착되기도 했다. 이재정 장관은 그 다음날 비공개로 청와대를 방문해 노 대통령과 면담했다.

서훈 3차장은 제1차 남북정상회담 추진을 위한 국정원 비밀접촉의 실무 책임자였다. 서훈 차장은 물론 그 이후에도 통전부 핫라인과 비밀접촉을 유지해왔다. 그런데 남측 정보기관 책임자가 남북정상회담 비밀접촉에 관여했던 당국자를 대동하고 남북 회담장에 나타난 것이다.

특히 지난 6월 전격적으로 이뤄진 6자회담 미국 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의 방북은 김만복 국정원장을 남북정상회담 레이스의 최종 '마무리 투수'로 투입하는 정세 판단으로 이어졌다. 극도의 보안을 요하는 사안의 성격상 김만복 원장의 투입은 안성맞춤이었다.

7월 김만복 국정원장-김양건 통전부장 채널 가동으로 정상회담 급진전

지난 7월초 우리측은 국정원 대북 채널을 통해 남북관계 진전 및 현안사안 협의를 위해 김만복 국가정보원장과 김양건 통일전선부장 간의 고위급 접촉을 제안했다.

그런데 7월 29일 북측은 뜻밖에도 김양건 통일전선부장 명의로 "8월 2~3일간 국정원장이 비공개로 방북해 달라"며 공식 초청했다. 김 국정원장은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두 차례에 걸쳐 비공개 방북해 북측과 협의하고, 제2차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합의하게 됐다.

방북과정에서 북측의 김양건 통전부장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위임에 따른 중대제안 형식으로 '8월 하순 평양에서 수뇌상봉을 개최하자'"고 제안했다. 특히 김 위원장은 '참여정부 출범 직후부터 노 대통령을 만날 것을 결심했으나 그동안 분위기가 성숙되지 못했으며, 최근 남북관게 및 주변 정세가 호전되고 있어, 현 시기가 수뇌상봉의 가장 적합한 시기'라고 언급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 국정원장은 8월 3일 서울 귀환후 노 대통령에게 이를 보고했다. 노 대통령이 북측 제안을 수용할 것을 지시하자 김 국정원장은 4일 재차 방북, "북측의 남북정상회담 개최 제안을 수용한다"는 대통령의 친서를 김양건 통전부장을 통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전달했다. 이 과정을 거쳐 김 국정원장과 김양건 통전부장은 '제2차 남북정상회담 개최 합의서'에 나란히 서명하게 됐다.

지난 8월 5일 평양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남북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한 김만복 국가정보원장(왼쪽)과 김양건 북측 통일전선부장이 합의서를 교환하고 있다.
 지난 8월 5일 평양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남북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한 김만복 국가정보원장(왼쪽)과 김양건 북측 통일전선부장이 합의서를 교환하고 있다.
ⓒ 청와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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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건 부장은 노동당 국제부에서 일을 시작해 국제부 부부장, 국제부장, 국방위 참사 등을 거치면서 대 중국 외교와 6자회담에도 깊숙이 간여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고 국제정세 및 북미관계와 조율된 남북관계를 추진해 나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그는 김정일 위원장과 정동영 당시 통일부 장관이 남북정상회담 개최에 원칙적으로 합의한 2005년 6·17면담에도 배석했고 지난 3월에는 김 위원장의 중국 대사관 방문에도 동행했다. 그는 또 국방위 참사 자격으로 6자회담과 관련된 사안을 챙겨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결국 '2007 남북정상회담 레이스'를 완주하기 위해 지난해 10월 안희정-리호남의 접촉으로 시작된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의 비선 채널은 이화영-리호남, 이화영-김성혜, 이해찬-김성혜(이상 비공식 채널)를 거쳐 김만복-김양건 공식채널로 완성된 것이다.


태그:#남북정상회담, #리호남, #김성혜, #안희정, #이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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