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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종주의 기억

화엄사 민박촌에서 바라본 노고단
▲ 지리산 노고단의 아침 화엄사 민박촌에서 바라본 노고단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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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날 송광사를 나와 우리 식구가 짐을 풀었던 곳은 지리산 화엄사 부근의 민박집이었다. 다음 목적지가 노고단인 이상 그곳이 숙박하는 데 있어서 최적의 장소였던 까닭이었다. 벌써 네 번째 맞는 이곳에서의 아침. 언제나 그랬지만 저 멀리 보이는 지리산에 마음이 푸근해졌다. 항상 저기 말없이 그대로 서 있는 지리산.

많은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지리산은 10년이 넘게 나의 가슴을 뜨겁게 달궈왔던 단어 중 하나다. 지금 내가 밟고 있는 이 땅의 역사를 알고 난 이후부터 지리산은 내게 성스럽고 경이로운 존재로 자리매김 되었으며, 따라서 지리산 종주는 나의 20대에 있어 가장 소중한 목표 중의 하나였다.

물론 한낱 산에 의미부여를 한다는 것이 우스운 일일수도 있겠지만, 지리산에 대한 감정은 단순히 돌과 흙, 나무에 대한 숭배 그 이상이다. 그건 산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의 문제요, 사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영호남을 가르며 구별과 동시에 소통의 길이 되어 왔으며 특히 격동의 근현대사에 있어 많은 사람들을 푸근히 안아주었던 지리산. 따라서 역사를 공부하는 이에게 지리산 종주는 성지순례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지리산 종주는 결코 쉬운 여정이 아니었다. 어느 산이고 혼자 훌쩍 떠나는 것이 나의 여행 스타일이건만 지리산만은 그러지 못했다. 워낙에 깊고 큰 산이라 어머니께서 혼자 종주하는 걸 말리시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지리산을 대상으로 어머니의 근심걱정을 만들 수는 없었다. 그것은 지리산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지리산 종주는 계속해서 미뤄졌고, 2005년 10월에야 난 논문을 쓰다 말고 친구와 함께 지리산을 종주할 수 있었다. 아직도 꿈만 같은 그때의 지리산 종주. 내려오면서 결심했다. 다시 한 번 충분한 시간을 내어 좀 더 천천히 지리산 구석구석을 훑어보리라고.

어쨌든 그런 지리산을 휴가를 맞아 식구들과 또다시 찾아오게 된 것이다.

화엄종찰 지리산 화엄사

화엄사의 풍경
▲ 지리산의 여명 화엄사의 풍경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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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고단을 목적으로 일찍 일어난 우리 식구. 일찌감치 밥을 해먹고 길을 나섰지만 노고단까지 가는 길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노고단까지 가는 길에는 이미 예상했었던 복병들이 숨어있었고, 그 첫 번째는 지리산 화엄사 표지판이었다. 지리산 화엄사의 거부할 수 없는 유혹.

그냥 그렇게 화엄사 표지판을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비록 식구들 각자 몇 번이고 들렀던 화엄사였지만 어제 본 송광사와 마찬가지로 시시각각 변하는 것이 사찰의 풍광인지라 우리는 또다시 화엄사로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여기까지 와서 화엄사를 들르지 않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 않겠는가.

예의 보았던 그 멋대가리 없이 크기만 한 일주문을 지나 화엄사 들어가는 길. 아스팔트 포장이 되어 있어 차를 몰고 가는 데에는 불편함이 없었지만, 그 아름다운 숲길을 걷지 못한다는 것 자체가 비극이었다. 지리산 화엄사도 오대산 월정사만큼이나 아름다운 흙길을 만들 수 있었을 텐데 왜 이곳에다가는 아스팔트 도로만 남겨 놓았을까. 그것도 천하의 지리산 산기슭에 말이다.

지리산 화엄사의 진정한 시작점
▲ 지리산 화엄사 일주문 지리산 화엄사의 진정한 시작점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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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보았던 거대한 일주문의 잔상이 사라질 때쯤 또다시 작은 일주문이 시야에 들어왔다. 송광사의 그것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 화엄사의 일주문은 굵고 힘찬 글씨의 현판을 걸고 그곳이 바로 화엄사의 시작임을 장엄하고 장쾌하게 알리고 있었다. 지리산 화엄종찰 화엄사.

일주문을 지나 금강문, 천왕문을 거쳐 화엄사의 중심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화엄사 역시 경내에는 백일홍이 만발했지만 그전 날 송광사에서 느꼈던 감동과는 사뭇 달랐다. 송광사의 백일홍이 경내 여백을 채우고 있었다면, 화엄사의 백일홍은 그 자체가 사찰의 일부분으로서 존재를 따로 인식할 수 없었다. 그것은 모든 것이 그대로 하나 되는 화엄사상의 소소한 발현이었다. 피아의 구별이 불필요한 화엄사상의 세계.

새벽이어서인지 스님들이 나와 경내 곳곳을 쓸고 계셨다. 그런데 어째 그 수가 많아 보인다 했더니, 스님뿐만 아니라 화엄사 템플스테이 과정을 듣고 있는 이들도 섞여 열심히 청소를 하고 있었다. 아마도 스님들이 쓰레질 역시 수행의 일부로서 그런 하찮은 일에서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을 것이다. 지리산의 상쾌한 새벽공기를 쐬며 열심히 도를 닦고 있는 그들.

그러나 그들의 진리를 향한 진지함과는 상관없이 템플스테이를 여는 사찰의 의도가 궁금한 것은 사실이었다. 지리산 화엄사 정도라면 돈이 부족해 템플스테이 과정을 열 리 없을 텐데 진정 중생의 구원을 위함일까? 아님 교세확장?

열심히 수도를 닦고 계시는 그분들
▲ 화엄사의 스님들 열심히 수도를 닦고 계시는 그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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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진리를 얻겠다고 이곳까지 찾아오는 이들이, 사소한 일상이 곧 진리임을 얼마나 빨리 깨달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다만 그 많은 템플스테이 지망생들을 보면서 이 사회가 구성원들의 정서적 정화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깨달을 뿐.

화엄사의 가람 배치는 봉정사나 부석사 등 여는 화엄사찰과 마찬가지로 일주문을 지나면 길을 따라 주요 전각이 점차적으로 높은 지세에 자리하는 형식이었다. 그것은 본전을 높은 곳 중앙에 위치해 놓아 사찰을 오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권위를 최대한 인식하게끔 하는 방식이었다. 모든 것이 곧 하나로 귀결된다는 화엄사상이 과거 중앙권력의 공식적인 지원을 받았던 만큼 화엄사찰들은 그 가람 배치를 통해서도 민중들에게 국가권력과 교단의 위엄을 내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 가람 배치가 얼마나 효과적인지 화엄사에 처음 와 본 동생 역시 그 길을 따라 걸으며 감탄하더니 마지막으로 화엄사의 백미, 각황전을 봤을 때는 크게 탄성을 내질렀다. 깊은 지리산 노고단을 배경으로, 구중궁궐 같은 화엄사에서도 최고의 위엄을 갖춘 각황전. 규모도 규모였지만 바라진 단청은 고색창연함이 무엇인지, 세월의 힘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여명의 아침 햇살을 받아 황금색을 띠는 각황전은 그야말로 환상이었다.

금빛의 각황전
▲ 지리산 화엄사 각황전 금빛의 각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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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황전 앞의 석등
▲ 지리산 화엄사의 거대한 석등 각황전 앞의 석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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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작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각황전보다 그 앞에 서 있는 거대한 석등이었다. 차분히 내면의 성불을 닦아야 하는 사찰에 어울리기보다는, 서릿발 위엄을 내세우며 지존의 명이 얼마나 지엄한지를 보여주어야 하는 궁궐에 어울릴 듯한 힘차고 굳건한 모습의 석등.

도대체 조선시대 복원하기 전 모습의 각황전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기에 이만큼 우람한 석등이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일까. 오래전 많은 백성들은 일주문을 지나 무시 못할 경사를 따라 올라온 뒤 그 끝에 서 있는 각황전과 석등을 보면서 다시 한 번 국가와 부처의 권위에 굴복했을 것이다.

이제 그만 화엄사를 나온다. 스님들과 템플스테이 수련생들은 아직까지도 열심히 경내를 쓸고 있었고 아침 햇살을 받은 전각들은 제각기 위용을 뽐내며 하나 된 화엄의 세계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그 규모만으로도 화엄세상을 보이는 화엄사
▲ 구중궁궐 같은 화엄사 그 규모만으로도 화엄세상을 보이는 화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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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천은사

화엄사를 나와 노고단 가는 길. 예전처럼 버스를 탔더라면 더 이상의 방해는 없었겠지만 승용차를 모는 관계로 화엄사에 이은 두 번째 장애물이 나타났다. 바로 지리산 천은사. 예전부터 한번쯤 가고 싶었지만 항상 버스를 탔던 관계로 한 번도 들르지 못했던 바로 그 천은사였다.

이미 화엄사를 봤던 터라 또 굳이 사찰을 들를 필요가 있겠느냐는 아버지 말씀도 있었지만, 이는 노고단 가는 길에 냈던 통행료가 천은사 소유의 땅을 통과하는 분이라는 설명에 묻히고 말았다. 어차피 입장료 명목의 통행료를 냈다면 꼭 들러야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불만은 불만이었다. 국립공원 통행세도 아니고 일반 사찰 소유지의 통행료라니.

웅장한 본전
▲ 지리산 천은사 극락보전 웅장한 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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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이 넘치는 글씨
▲ 지리산 천은사 극락보전의 현판 힘이 넘치는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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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천은사는 화엄사, 쌍계사와 함께 지리산 3대 명찰의 하나로서 결코 작지 않은 규모와 위용을 가지고 있는 사찰이었으나 화엄사를 보고 난 터라 그 감흥이 반으로 줄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지역, 최소한 지리산 다른 기슭에 있었어도 충분히 더 많은 관심을 끌었을 텐데 천은사는 화엄사 때문에 그 이름처럼 숨은 절이 되고 말았다. 덕분에 그 주위는 더 깨끗하게 보전되고 있는 듯했지만.

일주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가는데 상수원으로 조성되었다는 천은지가 나타나더니 그 위를 지나는 다리 위에는 수홍루라는 누각이 서 있었다. 천은지 자체가 최근에 지어진 터라 누각 역시 오래되지는 않았을 텐데 저수지에 비친 누각의 그림자는 그럭저럭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오고 가는 사람들은 이를 배경으로 사진 찍기에 바빴다.

수홍루 너머에는 감로수라는 샘물이 있어 몇몇 사람들이 목을 축이고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이곳 천은사는 그 샘물이 예전부터 만병에 특효라고 하여 처음 감로사라고 칭해졌다가, 임진왜란 이후 중건 당시 스님 한 분이 샘물가의 구렁이를 죽은 이후 물이 솟아나지 않는다 하여 천은사, 즉 샘이 숨은 절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가을의 풍경
▲ 익어가는 가을 가을의 풍경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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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은 또한 이 구렁이가 절의 수기(水氣)를 지켜주는 뱀이었기에 그 뒤로 사찰에 화재가 빈번했다고 전하는데, 조선시대 명필 중 하나인 이광사의 수체(水體)로 물 흐르듯이 쓴 '지리산 천은사' 현판이 걸리자 화재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도 중건 당시 사찰의 맥을 채 파악하지 못한 인부들이 샘물의 길을 막은 이후, 이광사가 썼다는 현판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만들어진 전설이리라. 부석사 등에서도 그렇듯이 구렁이는 꾸불꾸불한 수맥을 의미하는 법이다.

어쨌든 샘물은 특별히 시원하지도 않은 것이 밋밋하고 그저 그랬다. 사찰의 이름이 천은사인 만큼 최근에 조성된 감로수가 맛이 있겠는가.

감로수를 지나 계단을 오르니 그곳 중앙에 극락보전이 자리하고 있었다. 극락보전은 투박하지만 힘이 넘치는 모습의 전각으로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누가 썼는지 모를 그 현판이었다. 살아 움직이는 듯한 필체는 천은사를 감싸고 있는 지리산의 그 웅장함을 충분히 표현하고 있었다. 천은사의 전각 대부분이 영조시대 때 복원되었다 하니 아마도 저 필체는 그 시대의 자신감을 드러내는 것이리라.

천은사를 뒤로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다음 목적지는 지리산 노고단. 날씨가 좋아 저 멀리 섬진강이 보이길 바랄 뿐이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지리산, #화엄사, #천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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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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