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다시 찾은 송광사

 

내가 처음 송광사를 찾은 건 2004년을 맞이하는 겨울이었다. 대학원 진학이 결정됐지만 나의 선택에 확신이 없었던 그 때, 내게는 위로가 필요했었다. 그래서 매서운 바람이 불던 어느 날, 난 그 바람을 피해 남도의 따뜻한 햇살의 기운을 얻고자 훌쩍 길을 떠났고 정처 없이 밑으로, 밑으로 내려갔다. 남도에는 지친 나를, 시대의 불확실함에 잔뜩 겁을 집어먹은 나를 안아줄 곳이 있을 것만 같았다.

 

무작정 향한 광주. 어느 도시보다도 익숙한 거점인 그 곳에서 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낯선 이름을 찾아 버스를 잡아탔고, 그 버스는 휑한 창밖 풍경을 뒤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따뜻한 겨울의 햇살은 스며들지 않았고 창밖의 스산한 겨울의 풍경은 오히려 나의 급한 마음을 채찍질할 뿐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버스 종점. 그곳에 송광사가 있었다. 

 

송광사의 첫인상은 스산함이었다. 삼보사찰이라더니 그 유명세에 걸맞은 사찰의 규모는 오히려 그 삭막함을 더할 뿐이었다. 도대체 저 커다란 여백을 무엇으로 채우려는 것인지. 따뜻한 남도를 찾아갔던 내 마음을 오히려 더 쓸쓸하게 만들었던 그곳. 물론 그 모든 것이 나의 불안한 심리 상태에서 기인했었겠지만 어쨌든 송광사에 대한 나의 기억은 잿빛 하늘과 앙상한 나뭇가지였다.

 

그랬던 송광사를 나는 2007년 늦여름 식구들과 함께 다시 찾게 되었다. 직장인으로서 처음 맞게 된 8월 말의 휴가, 2박3일의 여정으로 갈 곳을 물색하며 남도를 힐끗거리고 있는데 아버지께서 어머니께 송광사의 그 유명한 비사리구시를 보여주셔야 한다며 송광사를 턱하니 찍은 것이다.

 

평소 여행할 때 한 번 가 본 곳은 더 이상 가지 않으려는 나였지만 아버지께 무턱대고 싫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평소 아버지가 어머니께 항상 송광사를 이야기하셨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나 역시 이 기회에 송광사를 다시 한 번 보고 싶었다. 내 기억 속에는 너무도 우울하게 각인된 송광사. 과연 그곳은 이 가을로 가는 길목에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결국 난 또 다시 송광사를 향하게 되었다.

 

송광사 가는 길 
 


 

늦여름의 송광사는 그 가는 길세부터 달랐다. 겨울에는 그 앞의 주암호도 썰렁한 것이, 보는 사람의 기분마저 스산하게 만들더니 이번에는 호수의 잔잔한 수면 위로 산란되는 햇살이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다. 간혹 구름 뒤로 숨는 햇살과 어우러진 호수의 풍경은 그야말로 하나의 작품이었다. 

 

이윽고 도착한 송광사. 나뭇잎이며 흐르는 물이며, 온통 녹색으로 물든 주위 풍경이 낯설었다. 과연 이 초록빛의 향연을 따라가다 보면 사찰 경내에는 어떤 꽃과 색깔이 우리를 반기고 있을까. 겨울과는 확연하게 달라진 풍경에 기대를 갖고 쭉쭉 뻗은 나무들 사이 곧게 난 길을 따라 송광사 경내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 부도 밭이 보이는가 싶더니 곧이어 송광사의 일주문이 나타났고, 일주문을 지나치니 물에 비친 우화각 전경이 펼쳐졌다. 송광사에서 아름답기로 유명한 바로 그 전경. 거듭 감탄하며 사진을 찍고 있는데 두 분의 스님이 거침없이 징검다리를 건너고 계셨다. 이 아름다운 풍경도 자꾸 보다 보면 무감각해지는 것인가. 어쩌면 그 아름다움도 구도를 위해서는 버려야 할 미혹일지 모른다.  

 

 

우화각을 건너 종고루를 지나 들어선 송광사 경내. 우선 화려한 지붕에 큼지막한 대웅전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대웅전을 중심으로 양옆으로 펼쳐져 있는 그 많은 전각들. 그것은 차라리 하나의 숲이었다. 전각 하나하나에 눈길을 모두 보내기에도 벅찬 그런 전각의 숲.

 

평소 다른 사찰 같았으면 마냥 규모를 지향하는 그 천박함에 혀를 끌끌 찼을 텐데 송광사는 그와 같은 규모를 하나로 묶는 묘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전체가 하나 되고, 하나가 곧 전체와 같은 송강사의 힘. 이는 단순히 오랜 세월의 힘이 아니었다. 그것은 송광사가 가지고 있는 위엄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승보사찰 송광사

 

사람들은 송광사를 가리켜 삼보사찰, 그 중에서도 승보사찰이라고 부른다. 불교에서의 삼보란 말 그대로 세 가지 보물 즉, 불(佛), 법(法), 승(僧)을 가리키는데 부처님 사리가 모셔져 있는 통도사가 불보사찰, 팔만대장경을 간직하고 있는 해인사가 법보사찰, 그리고 송광사는 그곳에서 고려시대 지눌을 비롯해 16명의 국사가 배출되었다 해서 승보사찰이라고 일컬어진다고 한다. 결국 송광사의 위엄은 그 많은 전각들에서 유래되는 것이 아니라, 그 전각들 사이를 유기적으로 엮고 있는 스님들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16명이나 되는 국사를 배출한 기록이 마냥 사찰의 자랑이 될 수 있을까? 국사란 국가가 지정한 스님의 수장이라는 뜻일 터, 이는 과거 송광사가 국가의 중앙권력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른바 호국불교라고도 불리는 불교와 국가권력의 연대. 국가는 이를 통해 지방 토호들을 다스렸을 것이며, 사찰은 이를 이용하여 그들의 세력을 확장했을 것이다.

 

따라서 모든 권력이 집중되는 국사란 직책은 오히려 종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해탈과 멀어질 공산이 크다. 스님들의 궁극적 목표로서의 깨달음이란 국가에서 내리는 직위와 상관없이 그 모든 것을 비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불교 내부에서도 굳이 이판과 사판을 나누는 것은, 조직으로서 존재하는 불교와 수련의 방법으로서 존재하는 불교의 공존이 힘들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인하기 때문이며, 같은 맥락으로 최근 두 남녀와 함께 뉴스의 앞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스님들은 이 시대의 국사일 뿐 진정한 구도자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승보사찰이라는 명칭은 송광사에게 과분한 수식일까? 아니다. 송광사 경내에는 다른 사찰과 달리 그 흔한 석등 하나 없었고 대신 만발한 백일홍이 큼직한 전각들 사이의 여백을 메우고 있었다. 순한 조계산에 어울리지 않는 사찰의 웅장한 규모와 경내의 화려한 꽃.

 

어쩌면 이것이 송광사가 큰스님들을 배출하는 조건인지도 모른다. 석가모니나 예수가 40일 동안 온갖 미혹을 뿌리치면서 득도했듯이, 송광사의 규모와 아름다움은 궁극적으로 스님들이 극복해야 하는 하나의 미혹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송광사는 많은 국사를 배출한 것만큼 큰스님들을 배출했을 것이다. 다만 역사는 공식적 직책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할 뿐이다.

 

 

대웅전 옆으로는 성보 박물관이 있었고 그곳은 특이하게 회색 자동 철문으로 되어 있었다. 무어가 그리 지킬 것이 많다고 저리도 굳게 닫아놨는지 궁금함에 이끌려 박물관 안으로 들어갔더니 그곳에는 송광사가 배출해 낸 국사들의 업적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명색이 승보사찰인데 그들을 기념하지 않았겠는가.

 

자신이 죽어도 우상을 만들지 말라던 석가모니의 일갈은 역시나 원론적인 이야기일 뿐, 불교의 대형화와 관료화는 우상화를 수반하게 마련이다. 결국 그와 같은 우상화를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모든 종교가 가지고 있는 숙제이며, 궁극적으로는 그 종교가 오래 지속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성보 박물관을 나와 이만 사찰을 나선다. 마음 같아서는 사찰 주위의 아무 암자에나 올라 송광사의 전경을 한눈으로 보고 싶었지만, 다음 목적지 지리산까지 가기에는 시간이 허락지 않았다. 경험상 어느 사찰이건 그 부속 암자에서 바라보는 전경이 가장 아름다움을 알고 있는 터, 그냥 발걸음을 옮기자니 무척이나 아쉬웠다. 특히 송광사처럼 많은 전각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면 그 전경은 더욱 아름다웠을 텐데.

 

큰스님이 그리운 이 시대, 다시 한 번 묻는다.

 

“스님들, 안녕하십니까?”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송광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