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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 역사박물관 외벽에 걸린 현수막.
 전주 역사박물관 외벽에 걸린 현수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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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8월 일제의 강압에 의한 국권 피탈 이후 1945년 8·15광복에 이르기까지 35년간은  우리의 역사가 단절되고 민족의 정통성이 뿌리 뽑힌 암흑의 시기였다.

그 시기를 견디는 방법은 3가지였다. 적극적으로 저항하거나 일제에 빌붙어 친일함으로써 개인의 영달을 도모하거나 굴종과 침묵으로 견디는 것이다.

이 3가지 방법 중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친일 행위일 것이다. 일제 치하 문화, 예술, 종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군상이 친일을 했다.

안타깝게도 광복 62주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친일 청산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현안으로 남아 있다. 우리에게 친일 청산과 민족정기 확립이라는 역사의 과제는 영원한 미결로 남을 것인가.

지난 16일(일요일), 전주역사박물관이 주최하고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가 주관하는 '캐리커처로 보는 한 시대의 다른 삶 -항일과 친일' 전시회를 다녀왔다. 8월 14일부터 열린 전시회의 마지막 날이었다. 전시회가 열리는 전주역사박물관 2층 민화관은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한가했다.

전시회장으로 들어서자 내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캐리커처가 아니었다. 입구에서 정면으로 바라다 보이는 벽면에 붙은 커다란 글씨였다.

"과거의 잘못을 단죄하지 않는 것, 그것은 미래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레지스탕스에 가담했던 알베르 까뮈가 나치에 협력한 프랑스인에 대한 강력한 응징을 주장하면서 했던 말이다. 전시장 안엔 친일에 가담한 19명의 캐리커처와 일제에 항거하는 삶을 살았던 19명의 캐리커처 38개가 액자에 넣어진 채 다소곳이 관람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같은 시대를 호흡했지만 항일의 길과 친일의 길로 극명하게 갈라진 삶을 살았던 각 분야의 인물 38명을 통해 우리의 근대사를 조명해봄으로써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친일의 잔재를 재확인하고 올바른 역사의식을 일깨우고자 하는 작가와 전시회를 주관하는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 측의 의도가 엿보이는 대목이었다.

사람이 하늘이냐, 천황이 하늘이냐

 최린과 최동희.
 최린과 최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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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최린(1878~?)은 출옥 후 천도교 간부로 활동하면서 자치운동단체인 연정회를 구성하지만 실패로 끝나고 천도교는 신파(최린계)와 구파(박인호· 이종린계)로 분열되기에 이른다.  

이후 1934년 총독부 자문기관인 중추원 참의에 임명됨으로써 본격적인 친일의 길로 들어선 최린은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사장과 전시동원을 위한 친일단체 간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천도교 2대 교주인 최시형의 아들인 최동희(1890~1927)는 3·1운동에 참여한 뒤 상해로 망명한다. 그리고 1926년 4월 중국 길림성에서 양기탁 등과 함께 고려혁명당을 조직하여 만주를 중심으로 무장투쟁을 하면서 이를 지원하는 국제연대를 모색하기도 한다.

고려혁명당 결성 직후 상해로 건너가서 김규식의 집에 거처하던 그는 위장병으로 병원에 입원했는데 고려혁명당 간부들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병이 악화하여 1927년 1월 38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님이 침묵하는 시대의 상반된 승려상

 강대련과 한용운.
 강대련과 한용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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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련(?~1942)(창씨명 이하라 가오루)은 1899년 불교전문교원대를 졸업한 후 1911년부터 사망(1942)할 때까지 수원 용주사 주지를 지냈다.  "일본승려와 조선승려들이 조선 왕족 여자나 양반 딸과도 혼인할 수 있게 한다면 조선 동화와 불교 감화에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말해 민족계열 학승들에게 큰 반발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는 일본군 국위선양과 무운장구를 기원하는 법요식을 봉행하며 수차례 거액의 국방헌금을 헌납하는 등 일제의 종교시책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한용운(1876~1944)은 우리에게 민족독립에 대한 신념과 희망을 형상화 한 <님의 침묵>으로 널리 알려진 승려 시인이다. 3·1운동에 불교계를 대표로 참여해 3년간 옥고를 치르기도했던 그는 창씨개명과 징병제 실시를 반대하며 불교혁신운동과 문학작품 집필에 힘썼다.

저항과 굴종으로 갈라진 신앙인의 자세

 김길창 대 주기철.
 김길창 대 주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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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창(1892~1977)은 1923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거창, 부산  등지에서 장로교 목사로 목회 활동을 하다가 1933년 부산 항서교회에 부임하여 죽을 때까지 재직했다.

1938년 9월 평양에서 열린 장로교 총회에서 총회 부회장을 맡은 그는 신사참배 가결을 독려했으며 총회가 끝난 뒤 각 노회장을 이끌고 평양신사를 참배하기도 하였다. 그해 12월엔 기독교계 지도자 5명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이세신궁, 야스쿠니신궁 등을 참배했다.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 경남교구장을 지내며 경남 장로계 황민화의 선봉장으로 활약했다.

주기철(1897~1944)은 1925년 평양신학교 졸업 후 1931년 부산 초량교회 목사로 재임하던 중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단호하게 거절해야 한다는 의견서를 장로교 노회에 제출했다. 1936년 평양 산정현교회에 부임한 그는 1938년 9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했지만 이에 불복하여 궁성요배와 신사참배를 끝내 거부했다.

1939년 의성농우회사건에 관련되어 7개월간 복역한 후 출옥한 뒤 "5가지의 나의 기도"라는 제목으로 우상숭배를 거부하자는 설교를 함으로써 바로 다음날 다시 일경에 체포되고 말았다. 그러자  평양 임시노회는 그를 목사직에서 파면할 것을 결의하고 1940년 3월엔 산정현교회까지 폐쇄한다.

주기철은 황실불경죄, 치안유지법 위반 등의 죄목으로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44년 순교하였으며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최태용과 김교신.
 최태용과 김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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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용(1897~1950)은 명치학원대학 신학부를 마치고 귀국한 뒤 '조선의 신학'을 주창하면서 지지자들을 그러모아 1935년 기독교조선복음교회를 창립하였다.

'조선자치정부론'을 역설하던 그는 1942년 친일잡지인 <동양지광>에 기고한 '조선기독교회의 재불발'이란 글에서 "조선을 일본에 넘긴 것은 신(神)이다. 그러므로 우린 신을 섬기듯 일본국가를 섬겨야 한다"라고 궤변을 늘어놓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 막바지에 교역자들과 글라이더 모형비행기 공장을 세워 군수공장 인가를 받아 교인들을 사역시키기도 했다.

김교신(1901~1945)은 1920년대 초반 동경 유학 당시 일본 군국주의에 반대하고 무교회운동을 전개하던 우치무라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는다. 이후 송두용, 함석헌 등과 함께 조선성서연구회를 조직하였으며 월간 기독교 잡지인 <성서조선>을 창간했다.

1942년 3월, 그가 쓴 '조와'(弔蛙)가 민족의식을 고취했다는 이유로 <성서조선>이 강제폐간되고 함석헌 등과 함께 검속되어 1년간 옥고를 치른다. 출옥 후 1944년 흥남 질소비료공장에 강제징용된 한국인 노무자들의 비참한 생활을 돕기 위해 입사하여 교육, 후생 등의 문제에 진력하다가 1945년 45세의 나이로 급서했다.

 정춘수와 신석구.
 정춘수와 신석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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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춘수(1875~1951)는 남촌동교회 목사로 재직하던 중 민족대표 33인으로 3·1운동에 참가하여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1936년 조선총독 우가키가 추진한 심전(心田)개발운동 강연회 연사로 참여하면서 친일로 돌아서 감리교단의 황민화에 앞장섰다.

기독교조선감리교단 회장을 맡았으며 임전보국단 평의원, 조선전시종교보국회 이사 등 시국단체 요직을 지냈으며 1943년, 서울 상동교회에 '황도문화관'이란 간판을 내걸고  황도문화관장에 취임한 뒤 신도들에게 황도문화를 역설하고 신사참배케 하였다.

신석구(1875~1950)는 수표교회 목사로 재임 중 삼일운동에 기독교측 민족대표로 참가한 뒤 체포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다. 1937년 감리교단이 신사참배를 결의했지만 거부하여 다시 투옥되었으며 1945년에는 대동아전쟁 전승기원 예배거부와 일장기 게양 거부로 3개월간 구금되었다. 

해방 후 북한에서 목회활동을 하다가 1947년 기독교민회당 비밀결사사건으로 피검되어 총살당했다.

조선영화의 영예와 치욕

 최인규와 윤봉춘.
 최인규와 윤봉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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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규(1911~?)는 1939년 영화 <국경>의 감독으로 데뷔하였으며 그해 8월, 친일영화단체인 조선영화인협회 평의원에 선임되었다.

1941년에는 조선의 부랑아들을 교육하여 충량한 황국신민을 만든다는 내용의 영화 <집 없는 천사들>을 감독하였으며 <태양의 아이들>, <가미가제의 아이들>, <사랑과 맹세> 등 다수의 어용 국책영화를 제작하는 등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윤봉춘(1902~1975)은 3·1운동 당시 나운규와 함께 독립선언문을 작성하과 태극기를 제작하다가 체포되었으며 1920년에는 북간도 국민회 소속 독립군에 가입하여 터널 폭파 등 항일투쟁을 벌이다 옥고를 치렀다.

1930년 <도적놈>의 감독으로 영화계에 데뷔했으며 <큰 무덤>, <두만강을 넘어서> 등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영화를 발표했다. 1938년 일제가 조선영화인협회를 만들어 친일영화만을 제작하게 하자 낙향하여 신곡학원을 세우고 계몽교육운동을 펼쳤다.

해방 후 다시 연출활동을 시작하여 <윤봉길 의사>, <3·1혁명기>, <유관순> 등을 다수 제작하였으며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기도 했다.

 전창근과 이경손.
 전창근과 이경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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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창근(1908~1975)은 중국으로 건너가 수학한 뒤 중국영화계에서 활약하였다. 1932년 이후 중국인으로 가장하여 일제의 검속을 피해 시나리오 작가와 배우로 활동하였으며 <대지의 비극>, <초악>, <춘시> 등을 감독하였다.

그러나 1938년 귀국한 그는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이 복된 땅을 일궈 풍요한 생활을 누린다는 일제의 만주이주정책을 홍보한 <복지만리>라는 영화를 각본·감독·주연까지 맡아 제작한다. 이후 영화 활동을 접고 <빙화>, <밤마다 돋는 별> 등 친일연극에 매진하였다.

이경손(1905~1978)은 1924년 조선키네마사에서 제작한 <해의 비극>에 단역으로 출연해 조연출을 맡음으로써 영화계에 발을 들여 놓았다.1926년 항일 영화소설 <백의인>을 조선일보에 연재함으로써 요시찰 인물이 된 그는 1931년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가담해 항일운동에 참여하였다.

정기탁 등과 함께 '상해파'의 일원이 된 그는 <이원염사>(梨園艶史)와 <양자강> 등을 감독하기도 했지만 1932년 윤봉길 의사 의거로 쫓기는 몸이 되어 태국으로 탈출해 그곳에서 여생을 마쳤다.

목숨 건 장정과 추악한 귀화

 장혁주와 김사량.
 장혁주와 김사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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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명 노구치 미노루인 장혁주(1905~?) 는 1932년 일본잡지인 <개조>현상문예에 일어소설 <아귀도>가 입선함으로써 문단에 데뷔하였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문필활동을 하던 그는 1939년부터 본격적인 친일활동을 시작하였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한 왜장을 영웅으로 미화한 <가등청정>과 지원병 제도를 선전하는 <이와모토 일등병> 등을 발표하였으며 동경에서 일본문학보국회의 황도조선연구회 위원과 대륙개척문학위위원을 역임하였다. 해방 후 <오호조선>을 출간한 뒤 일본에 영구 귀화했다.

김사량(1914~1950)은 평양고보 시절 동맹휴학을 벌이다 퇴교당하고 나서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대에 들어갔다. 유학시절 처녀작 <토성랑>을 발표하였으며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에 가담하여 사상불온으로 일경에 검거되었다.

이후 <기자림>, <산의 아들> 등 참담한 한국농촌의 실상을 생생히 그린 일어 소설을 냈으며 1940년에 쓴 <빛속에>는 일본의 아쿠타가와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1945년 5월, 노천명과 함께 국민총력조선연맹 병사후원부 파견으로 '재지반도 출신 학도병 위문단'의 일원으로 중국에 간 그는 일본군의 봉쇄선을 뚫고 조선의용군의 항일근거지인 태항산 남장촌에 도착하여 의용군에 가담하였다. 이때 겪었던 숱한 고난과 감격을 자전소설 <노마만리>에 형상화하기도 했다.

창공이라고 다 같은 창공인가

 박경원과 권기옥.
 박경원과 권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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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원(1901~1933)은 조선-만주-일본의 일체화를 꾀하며 전쟁 총동원 분위기 조성의 일환인 '일만연락비행'의 비행사로 선정된 여자비행사다. 일제는 '일만연락비행'의 비행사에 일본인 아닌 조선인 여비행사를 선정함으로써 선전 효과를 극대화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1933년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함으로써 일찌감치 친일의 역사를 마감하고 말았다. 최근 그의 일대기가 <청연>이라는 영화로 만들어져 친일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반면 권귀옥(1903~1983)은 3·1독립운동에 참가했고 군자금모금 활동과 상해임시정부활동을 했으며 1923년 운남육군항공학교를 졸업한 뒤 중국 공군에서 한국 최초의 여류비행사로 복무했다. 그는 그 공로로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동갑내기로 이 땅에 태어난 두 여성의 인생 행로가 너무나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친일 청산 없이 역사는 진전하지 못한다

이 밖에도 이광수/홍명희, 김동인/조명희, 서정주/이육사 등의 문학계 인사와 현제명/정율성, 홍난파/채동선 등 음악계 인사, 김은호/오지호(미술),  정만조/김창숙(종교), 최남선/신채호(학술), 방응모/안재홍(언론), 김활란/차미리사(교육) 등의 캐리커처가 걸려있다.

우리는 흔히 "역사의 법정엔 시효가 없다"라고 말한다. 언제든지 역사라는 이름으로 단죄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여기서 역사는 '훗날'이라는 시간의 다른 이름이다. 역사의 법정을 들먹이는 것은 어쩌면 어찌할 수 없는 무기력과 절망의 다른 표현인지도 모른다.

왜 당대의 잘못을 당대에 심판할 수 없는가. 역사의 법정에서 유죄를 선고한 다음 부관참시를 한다 한들 정의가 올바로 세워질 수 있을까.

기억을 먹고사는 게 역사라는 말은 역사가 얼마나 더딘 걸음으로 정의를 향해 가는지를 환기시킨다. 이번 '캐리커처로 보는 항일과 친일전' 같은 기억을 환기시키는 전시가 필요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전시회를 돌아본 뒤 밖으로 나온다. 여전히 비가 퍼붓고 있다. 우산 없이는 한 발자국도 걸어갈 수 없을 정도다. 혹 친일 청산은 우리 역사의 우산이 아닐까.

캐리커처 작가 안중걸 프로필

1961년 3월 17일 생
1986년 만화가 입문
전시
2002 한일 월드컵 당시 70여 명의 세계 축구 스타 캐리커처 전시
2005 독립운동가 31인 캐리커처 전시회
2006 독일 월드컵 태극 전사 캐리커처 전시
현)신문, 잡지 캐리커처 만평 연재
작품
청소년 만화 <말려줘>
월간 《테니스 저널》에 테니스 만화 <듀스> 연재
아동 학습 만화 <암행어사 박문수>, <무인시대>
《월간 중앙》에 <용비봉무> 삽화 연재
《캐리커처로 만나는 독립운동가 -내 소원은 조국의 독립이오!》 청솔,2005

덧붙이는 글 | *인물에 대한 설명은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의 자료를 참조하였습니다.

*사진은 일반에게 덜 알려진 친일 인물 위주로 올렸습니다.



태그:#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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