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미디어에 비친 세상사가 불편할 때가 많다. 그 중 하나가 사람 목숨 값이 달리 매겨질 때다.

 

대표적인 것이 비행기 사고다. 버스가 전복돼 많은 사람이 죽어도 신문에서 그것은 한 장의 사진과 간략한 사진기사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수학 여행 중인 학생들이 탔다거나 할 경우 등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대부분 그렇다.

 

하지만, 해외에서 비행기 사고라도 나게 되면 상황은 180도 달라진다. 한국인이 한두 명만 탑승했더라도 모든 언론의 포커스가 온통 이 비행기 사고에 맞춰진다. 취재팀이 현지에 급파되는 것은 물론이다.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비행기 사고가 버스 사고에 비해서는 드문 사고이다 보니까 아무래도 뉴스의 비중이 더 높다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사람의 목숨 값을 버스와 비행기에 따라 달리 매기는 듯한 언론의 차별 대접을 보노라면 왠지 속이 불편해진다.

 

기상청의 늑장 예보, 제주 피해 키웠다

 

제주지역과 전남 고흥 등 남해안을 휩쓸고 지나간 태풍 나리가 몰고 온 폭우 피해를 보도하는 언론, 특히 중앙일간지들의 보도도 그렇다.

 

제주에서만 사망 11명, 실종 2명의 인명 피해가 났다. 인명 피해의 대부분이 제주 시내에서 났다. 이런 일은 처음이다. 그만큼 충격이 크다. 만약 서울시내에서 비 때문에 사람 11명이 죽었다면 '난리'가 났을 것이라는 게 어제(17일) 전화통화한 제주지역 전현직 기자들의 한결같은 지적이었다.

 

제주에서는 태풍 피해는 있어도 물난리를 겪는 경우는 드물다. 지반이 낮은 저지대를 제외하면 더 그렇다. 제주 시내가 이처럼 물에 푹 잠긴 것은 처음이다. 농작물이나 도로 유실, 기반시설 붕괴 등 재산 피해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피해 집계조차 엄두를 내고 있지 못하다.

 

무엇보다 늑장 예보에 대한 불만이 컸다. 태풍 나리가 이처럼 큰 피해를 줄 것이라고 생각한 제주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기상청의 예보와 경보가 조금만 더 정확하고, 사태의 심각성을 조금만 더 빨리 일깨워줬더라면 인명 피해는 그래도 많이 줄일 수 있지 않았겠느냐는 아쉬움이 크다.

 

그런데도 기상청은 예보가 빗나가지 않았다고 항변한다고 한다. "100~500mm의 비가 내릴 것이라고 예측했다"는 것이다. 제주 도민들은 이 때문에 더욱 분통을 터트린다. 그런 예보라면 누가 못하겠느냐는 것이다. 500mm가 쏟아진다고 보았다면 더 조기에 경보 체계가 가동됐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신정아' 소식으로 도배된 17일자 일간지들

 

제주 시내가 이처럼 물에 잠긴 데에는 도시 설계 문제도 있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한천, 산지천 등 시내를 관통하는 하천 복개지가 폭우로 상류에서 떠내려 온 각종 흙과 돌, 공사 자재 등으로 막히면서 하천 범람의 주요 요인이 됐다는 분석이다. 저지대 침수야 많은 비가 내릴 때면 있었던 일이지만, 이처럼 큰 피해가 난 것은 기본적으로 하천 복개 등 도시 설계의 구조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는 풀이다.

 

워낙 예상을 뛰어넘는 폭우 때문이기도 했지만, 긴급 대응 및 구난 시스템도 완전히 무너졌다. 일요일인 16일 낮 12시 쯤 제주 지역 여러 곳의 도로가 완전히 차단되고, 침수 피해가 잇따르면서 제주시 거의 모든 지역에서 정전 사태를 빚었다.

 

이 때문에 TV나 인터넷은 아예 이용할 수가 없었다. 의지할 것은 오로지 라디오 정도였다. <제주KBS>가 모두 20회에 걸쳐 긴급 속보를 편성했다. TV-라디오 동시 편성이었다. 하지만 시시각각 차오르는 긴박한 상황을 제주도민들에게 전하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나오든, 안 나오든 다른 TV 방송에서는 '명랑한 일요일 방송'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런데도 어제 대다수 신문들은 사진 한 장과 사망자와 피해자 숫자만을 간명하게 적시하는 수준으로 보도하는 데 그쳤다. 사상 처음으로 겪은 제주시민들의 물난리의 현장을 실감 있게 전해주는 기사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국민일보>가 이 소식을 1면 머리기사로 올린 것 정도가 그나마 제주시민들에게는 그래도 성의를 보인 편이다.

 

대신 '그녀는 왜 갑자기 돌아왔나'(조선일보), '변양균-신정아, 입 맞춘 듯 같은 날 조사 받아'(중앙일보), '변양균 씨와 나는 예술적 동지'(동아일보)와 같은 '감각적 제목'들이 1면 헤드라인을 차지했다.

 

변양균씨와 신정아씨의 검찰 출두 사진, 두 사람 변호사들의 친분관계를 비롯해 시시콜콜한 사건 뒷이야기로 서너 면씩을 채웠다. 정작 확인된 '사실'은 두 사람이 검찰에 출두했다는 것을 제외하곤 거의 없었다.

 

사람 목숨, 우습게 여겨도 되는 것일까

 

이래도 되는 것일까. 변양균-신정아 두 사람이 아무리 국기를 뒤흔들었다고 하지만, 졸지에 목숨을 잃은 11명(실종자 제외)의 목숨 보다 더한 것일까. 언제부터 폭풍에 희생당한 사람들의 명단은 아예 싣지도, 방송하지도 않게 된 것일까? 사람 목숨을 이렇게 우습게 여겨도 되는 것일까.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 누드 사진까지 게재하는 무모함을 과시했던 <문화일보>는 어제 서울의 청명한 가을하늘 사진을 1면에 시원스레 게재했다. <문화일보> 뿐만이 아니다. <경향신문>과 <세계일보> <한겨레>도 오늘(18일) 활짝 갠 서울 하늘과 가을 운동회 사진 등을 1면에 실었다.

 

청명한 가을하늘이 반갑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으랴. 그럴수록 수마가 할퀴고 간 제주와 남부지방의 상처 또한 더 도드라지지 않겠는가. 이처럼 따로 놀아서야 어디 같은 하늘 아래 사는 사람들이라고 하겠는가.

 

서울에는 오늘(18일) 비가 내리고 있다. 제12호 태풍 위파가 벌써 영향을 미치고 있는 걸까.

 

마침 제주도에 사는 한 전직 기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서울에 비가 오고 있다는 말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한강이 넘쳐봐야 돼. 그래서 여의도 잠기고, 그래야…."


태그:#태풍, #나리, #제주, #서울공화국, #신정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