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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공산주의 유격대 총사령관이던 이현상의 일대기 <이현상평전>을 지난 7월 30일 출간한 후, 실천문학사에는 항의와 협박전화가 쇄도했다. 주로, 이런 빨갱이 책을 왜 출간했느냐, 작가와 출판사를 고소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정작 작가인 나는 누군가 고소 고발만 해봐라, 재판정에 끌고 가서 역사적 사실을 생생히 증언할 기회로 만들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항의보다 더 많은 적극적인 격려 전화에 힘입은 자만이었다.

그런데 지난주에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전화를 받았다. 빨치산 토벌대장 중 한 명인 제2연대장 차일혁 총경의 후손 차길진씨로부터의 항의전화였다. 에필로그 부분에서 ‘차일혁의 아들은 아버지가 너무 많은 사람을 죽여 혼을 빼앗긴 것 같다고 술회한다’고 묘사한 부분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었다. 차일혁은 죽은 이현상의 장례식을 치러준 인물로, 다른 토벌대장들에 비해 상당히 우호적으로 묘사했는데 그 후손으로부터 항의를 받다니 당황스러웠다.

차일혁 총경의 아들로부터 항의 전화를 받다

우선 내가 어떻게 이 문장을 썼는가 찾아보았다. 이상했다. 후배로부터 비슷한 말을 듣기는 했으나, 그 많은 자료 어디에도 차길진씨가 정확하게 그런 말을 했다는 기록은 찾을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는 빨치산 토벌이 그를 비극적인 죽음으로 몰고 간 이유가 되었다’는 내용의 인터뷰 기사를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일까? 어딘가 글로 정리되어 있거나 사건 당사자의 직접증언만을 옮기는 것이 원칙이던 내가 왜 이런 실수를 했을까?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나야말로 정말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솔직히, 책에 등장하는 친일파 출신의 다른 토벌대장 유족들의 항의였다면 질 때 지더라도 당당히 재판해 보자고 맞섰을 것이다. 그러나 내 스스로 우호적으로 묘사한 인물의 유족과 싸울 의사는 없었다. 본인의 직접 증언 없이 간접 진술로 묘사한 점은 사과하는 것이 옳았다. 곧장 차길진씨를 만났다.

항의전화를 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차길진씨는 진심으로 환대하고 반가워해 주었다. 그리고 내가 몰랐던 놀라운 사실들을 말해 주었다. 차일혁 총경이 일제시절 만주에서 사회주의 무장단체에 소속되어 활동했다는 것, 전쟁 중 좌익들에게 온정적으로 대했다는 이유로 곤경에 빠졌고 결국 그것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야기였다.

아직 정식으로 취재를 한 것은 아니어서 또 다른 오류가 있을지 모르지만, 차길진씨의 말을 토대로 간략히 차일혁 총경의 일생을 재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차일혁의 아버지는 차경석이란 인물로, 증산교의 맥을 이은 민중 종교인 보천교의 창시자였다. 일찍부터 항일정신을 배운 차일혁은 중국으로 건너가 중앙군관학교 황포분교 정치과를 졸업한 뒤 조선의용대에 들어가 김학철 등과 함께 항일유격전에 참가한다. 민족주의자인 차일혁이 좌익계열인 조선의용대에 들어간 것은 당시 중국의 조선인 민족주의 세력들이 일본과의 무력투쟁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해방 후 귀국한 차일혁은 미군정의 보호를 받고 있던 악랄한 일본인 경찰 ‘삼륜’을 저격하고 수배되어 공장의 경비대장을 하던 중 전평의 총파업을 맞아 좌익노동자들의 공격을 받으면서 우익으로 나선다. 한국전쟁이 발발해 남한이 3개월 간 인공 치하가 되자 유격대를 결성해 인민군과 싸우던 그는 경찰에 특채되어 이현상의 남부군과 맞서게 된다.

이념이라는 집단적 광기에 빠져 있던 시절이었다. 좌우익 할 것 없이 반대편에 선 사람이라면 심지어 그 가족들까지 아무 죄책감 없이 몰살시키던 시절이었다. 특히 친일파 출신 남한 군경의 잔혹함은 악명 높았다. 그러나 일제하 사회주의자들의 헌신적인 투쟁을 잘 알고 있던 차일혁은 빨치산 토벌에 큰 공을 세우면서도 가능한 한 한 명이라도 살리려 애쓴다.

생포된 빨치산 중에는 그와 함께 만주에서 항일투쟁을 했던 동지들도 있었다. 그는 어떻게든 이들을 전향시켜 경찰에 편입시켰고, 심지어 부상한 빨치산 간부에게 자신의 피까지 수혈해 준다. 적장 이현상의 장례를 치러준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차일혁의 남다른 인명존중의 정신은 극단적 반공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남한 사회에서는 용납되기 어려웠다. 전쟁이 끝난 후, 차일혁은 이현상의 장례를 치러주었다는 점, 생포한 빨치산들에게 남다른 관용을 베풀었다는 점, 무엇보다도 과거 팔로군 산하 조선의용대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사상적인 의심을 받게 된다. 

진해경찰서장으로 근무하던 중 좌익 혐의로 이틀간 조사를 받고 나온 그는 공주경찰서장으로 좌천된 후에도 수사 대상이 되어 심리적으로 큰 타격을 받는다.

죽기 2주전, 그는 11살짜리 아들 차길진에게 이현상의 시신에서 찾아낸 가래 두 알을 자신의 유품이라며 건네주고, 1주일 전에는 ‘죽음도 삶의 연속이다’ ‘절대 벼슬을 하지 말라’는 등 유언 같은 말들을 남긴다. 

사망 당일, 가족과 함께 금강으로 물놀이를 간 그는 어린 아들을 강 가운데 바위에 앉혀놓은 채 조선의용대 팔로군의 노래인 <볼가강의 노래>를 부르며 홀로 천천히 물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아들은 엉엉 울며 아버지를 외쳐 불렀으나 그는 다시는 떠오르지 않았다. 시신은 19시간 뒤, 곰나루 근처를 도강하다 가라앉은 인민군 탱크를 끌어안은 자세로 발견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산중의 생존 빨치산들이 이현상에게 가한 비판 중 하나는 온정주의자라는 것이었다. 생포한 경찰이나 군인은 물론, 심지어는 전향하여 첩자로 온 이들까지 죽이지 않고 살려주었다는 이유였다. 생사를 함께 했던 동료들의 비판에 직면한 이현상은 군인들에 체포된 상태에서 총알도 없는 권총을 든 채 다가가다가 사살되었다. 사실상 자살이었다.

차일혁은 넓은 강을 가볍게 오가는 수영 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여러 정황은 차일혁 총경이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게 아닐까하는 의혹을 갖게한다. 차일혁에 대한 비판 역시 적에게 온정적이었다는 것이었고, 그를 죽음으로 내몬 이들 역시 생사를 함께 했던 동료들이었다.

차길진씨에게 정정광고를 약속하고 지킨 것은...

먹먹한 가슴으로 차씨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의문을 버릴 수 없었다. 과연 오늘의 한국 사회는 어떠한가? 사람의 목숨을 살리려는 마음이 죄가 되던 그 시절로부터 얼마나 멀리 와 있을까? 그 미치광이 같은 대립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가? 이현상을 죽인, 나아가 차일혁을 죽인 광기는 과연 사라졌는가? 나는 또 거기서 얼마나 자유로운가?

확실한 것은 차일혁 총경이 죽은 빨치산들에게 혼을 빼앗긴 것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나는 즉석에서 정정 광고를 약속했고, 출판사를 통해 중앙일보에 게재했다. 작가로서는 쉽지 않은 결단이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살아 있는 나야 이렇게 또 다른 지면을 통해 해명이라도 할 수 있지만 죽은 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으니 대신 말을 해줘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의 정정 광고나 유족에 대한 사과는 특수한 경우라는 것을 말해두고 싶다. 전쟁의 광기가 휩쓸던 그 시대는 물론이요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 땅을 지배하려는 폭력적인 세력에 대해서는 전투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 자신들의 권력이나 이념을 지키기 위해 타인의 고통과 죽음을 요구하는 세력에는 적대적으로 맞설 수밖에 없다는 것, 약자를 옹호하기 위해 나 자신의 희생은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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