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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험가 김현국
 탐험가 김현국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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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질 사람은 언젠가는 헤어지게 된다. 또 만날 사람은 언젠가 반드시 만나게 된다. 그게인연이다. 내가 그를 만나게 된 것도 인연이 준 선물이었다.

어느 날인가, 가수 김원중을 만났다.

"내가 요즘 노래를 하나 만들고 있어. 탐험하는 후배 얘기를 듣고 만들고 있는 중인데 가사에 이런 대목이 있어.  '마을엔 사람이 두려워 가지 못하고, 숲엔 짐승이 무서워 가지 못하고…'. 그 후배가 시베리아를 오토바이로 횡단할 때 그런 경험을 했다는 거야. 어디에도 끼지 못하고 정확하게 경계에 서 있는 한 인간…."

그리고 한 달 가량 지났을까. 한 행사장에서 그가 소개시켜 줄 사람이 있다며 손목을 끌었다.

"탐험가 김현국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흐릿한 조명아래였지만 야성이 덜 빠진 사내의 눈빛은 형형했다. 그의 구렛나루 수염처럼 도시풍으로 정제되지 않은 말투는 '이 사내가 아직 시베리아를 유랑하고 있나'하고 의심케 만들었다.

탐험가 김현국(39). 그는 세계 최초로 시베리아를 오토바이로 횡단한 인물이다. 그게 벌써 십년도 더 지난 96년의 일이다. 러시아 하바로브스크에서 모스크바까지 장장 1만2000km를 국산 125cc 오토바이를 타고 횡단해버린 것이다.

궁금한 게 많았다. 늘 떠남을 동경하면서도 단 한 번도 늑대처럼 '도전'하며 떠나진 못해왔던 나다.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왜 하필 시베리아였냐고, 왜 '함께'가 아니고 '혼자'였느냐고….

상처를 안고 떠난 길에서 새로운 길을 찾다

상처를 당해본 자만이 '떠남'이 절실해지는 모양이다. 그의 집안은 정읍에서 알아줄 정도로 부유했다. 그 넉넉한 재력으로 큰아버지는 야당 정치인을 후원했고 정치적으로 성장시켰지만 집안은 거꾸로 몰락의 길을 가파르게 탔다.

일제시대 때 대학까지 나온 아버지는 쇠락하는 집안만큼 함께 흔들리며 술에 의지했다. 가족들의 생계는 어머니의 몫이 됐다. 마음속에서 아버지를 증오하는 벽은 높아만 갔다.

"십대 땐 '어서 집을 나가 돈 벌어서 리바이스 청바지 하나 사 입자'는 생각밖엔 하지 않았어요. 집꼴이 너무 보기 싫었으니까. 87년 대학 들어가서 시위 현장에서 돌멩이도 던져보고 했지만 내 마음의 상처는 치유되지 않았어요. 청년의 정열을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미래에 대한 불안은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어요, 다들 도서관에 앉아 취직공부만 했으니까…."

그는 그 안에 숨은 자신과 자신의 상처를 제대로 보고 싶었다. 군대도 1학년 1학기를 마치자마자 가버렸다. 제대 후 2년여 동안을 인도, 티벳, 네팔 등지를 떠돌며 살았다.

"인도에서 유럽인들을 만나면 하나같이 십대 때부터 국경을 넘나들며 살았더라구요. 그런데 나는 네팔에서 국경을 넘을 때 빠르고 멀쩡한 큰길을 놔두고 시골길만 찾아 돌아 다녔어요. 한국에선 국경을 넘으면 간첩 취급 받았으니까요."

2년의 유랑은 그 안에 있던 두 개의 벽을 넘을 수 있는 자신감을 줬다. 아버지에게로 향했던 증오의 벽과 청춘을 가두고 있던 국경과 경계의 벽. 그는 몇 차례나 강조해서 말했다.

"인도에 갔기 때문에 깨달은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제대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깨달은 것일 뿐이에요.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고, 경계 너머에 대해서 고민하게 된  장소가 마침 인도였을 뿐이죠."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과 진짜 하고 싶은 일, 혼자서도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정리가 됐다. "이력서 들고 남들과 똑같이 삼성 정문 앞에 줄 서서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같았던 일, 그게 그에겐 탐험이 된 것이다.

탐험가가 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한국에 산악인은 많았지만 탐험가는 없었다. 경험을 축적해서 안내해줄 선배도, 정보도 없었다. 주제별로 루트를 잡고 관련 기초 공부를 하는 것도 모두 그의 몫이었다.

말 그대로 탐험하듯 공부를 했다. 미술, 음악, 문학 등등. 지도를 펴놓고 탐험가들의 이동경로를 따라 가면서 해당 지역의 음악이나 문학, 미술 등을 공부한 것이다. 서서히 자신이 가야할 길이 보였고, 주제가 보였다. 그는 이동에 주목했다.

"나는 지구역사를 이동의 역사로 봅니다. 알렉산더의 동방원정을 위한 이동으로 인해 헬레니즘 문화가 나오고 간다라미술이 나오고 그 문명이 신라 석굴암까지 영향을 미쳤거든요. 또 실크로드를 따라 수많은 상인들이 걸어서 이동하고 물자들이 이동했어요. 이동도 진화를 해서 나중엔 전화기를 통해 소리의 이동이 생기고, 디지털시대엔 인터넷 정보고속도로를 따라 가상과 현실이 같이 이동하는 시대가 됐어요." 

인도와 네팔, 티벳의 국경을 놀이하듯 넘나들었던 그에게 반도는 너무 좁았다. 지도를 펼친 그의 눈에 대륙으로 가는 길이 들어왔다. 독립군 출신이었던 그의 큰아버지가 말 타고 내달렸던 길, 만주, 상해, 블라디보스토크….

어쩌면 운명이었는지 모른다. 그의 눈에 유독 시베리아가 잡혀 떠나질 않았다. 안톤 체홉의 <시베리아 여행기>를 읽고 또 읽었다. 시베리아 바람이, 시베리아의 별이, 시베리아의 길이 그를 애타게 부르는 듯 했다.

마침내 시베리아를 횡단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첨부파일
jb070916-2.jpg

덧붙이는 글 | ‘탐험가 김현국 이야기’는 다음 편에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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