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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  큰 황소 한 마리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그 옆에는 소 몰러 나온 아이가 낮잠을 즐기고 있는 그림입니다. 정신없이 바삐 돌아가는 세상에서 여유가 무엇인지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 소를 누군가 훔쳐간다면 그야말로 재앙의 시작일 것입니다. 김두량 <목우도>
▲ 여유 큰 황소 한 마리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그 옆에는 소 몰러 나온 아이가 낮잠을 즐기고 있는 그림입니다. 정신없이 바삐 돌아가는 세상에서 여유가 무엇인지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 소를 누군가 훔쳐간다면 그야말로 재앙의 시작일 것입니다. 김두량 <목우도>
ⓒ 평양조선미술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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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속담에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는 작은 도둑을 제때에 다스리지 못하면 소도둑처럼 큰 도둑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은유적으로 사용한 바늘 도둑은 작은 도둑을 의미한 것으로 이해가 되는데, 왜 굳이 큰 도둑을 소도둑으로 표현했을까요? 소보다, 금덩어리나 보물 혹은 더 값비싼 것이 많은 세상인데, 왜 유독 소도둑을 가장 큰 도둑이라고 은유적으로 사용했을까요?

속담은 쉽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며, 그 안에는 옛 선인들의 상징체계가 담긴 것이기에 여기에서 말하는 소는 그저 고깃국으로 올라오는 소가 아닐 것입니다. 소는 곧 생산의 핵심을 말하는 것으로 전통시대에는 최고의 일꾼으로 인정받았습니다.

한번 역사 속에서 소와 소도둑에 얽힌 진한 상징의 역사를 읽어 봅시다.

소는 곧 농사의 전부였다

전통시대에 소는 곧 농사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보통 농사일의 시작인 논을 갈고, 밭고랑을 만든 것부터 소의 억센 두 다리가 이끄는 쟁기가 있어야만 했고, 농사일의 끝인 가을걷이에도 어김없이 소는 산만한 짐을 수레에 실어 나르는 그야말로 최고의 일꾼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래서 농업이 사회의 근간을 이뤘던 조선시대의 경우 소는 농우(農牛)라고 해서 농사일의 상징으로 불렸습니다.

이런 이유로 유독 소를 함부로 도살시키지 말라는 상소가 <조선왕조실록>에 심심치 않게 실려 있습니다. 그중 조선 초기 세조가 항상 곁에 두고 중용하면서 '나의 제갈량'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대사헌 양성지(梁誠之)는 농우 도살을 금지하자는 상소에서 소의 중요성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중외의 소는 농사를 지어 살아가는 데 자산이 되니, 결코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대저 큰 창고는 곡식을 들여다가 저장하는 그릇이고, 소는 곡식을 생산하는 도구입니다. 만약에 곡식을 생산하는 소가 없다면, 곡식을 들여다 저장하는 창고가 있더라도 이를 장차 무엇에 쓰겠습니까?" <세조실록 41권 세조 13년 1월 4일>

이처럼 소는 농업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생산수단으로 인정되었습니다. 심지어 가뭄이나 홍수 등 농업에 치명적인 사건이 발생하면 이 문제가 소를 귀하게 여기지 않고 함부로 도살해서 생긴 일라며 소 도축을 전면 금지하자는 의견이 개진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렇게 가뭄이나 홍수 등 천재지변을 소 탓으로 돌린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경우에도 임금은 곧 하늘이 내리신 몸이라 하늘과 관련하여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는 임금의 덕이 부족한 것이라 생각했었기에 다만 작은 이유를 찾기 위해서라도 소 도살을 핑계 삼았던 것입니다. 이는 곧 소와 관련된 일을 얼마나 중요한 일로 생각했었는가에 대한 반증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청장관 이덕무의 경우는 그의 저서에서 글 연습과 농사짓는 것을 비유적으로 설명하기도 하였는데, 그 내용 중 소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쉽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종이와 벼루는 농토이고, 붓과 먹은 쟁기와 호미이며, 문자는 씨앗이고, 의사(意思)는 노농(老農 농사일에 익숙한 늙은 농부)이며, 팔과 손가락은 농우(農牛)이고, 책이나 권축(卷軸)은 창고나 상자이며, 연적(硯滴)은 관개(灌漑)이다. 농토ㆍ쟁기ㆍ호미ㆍ종자ㆍ창고ㆍ상자ㆍ관개는 쉽지 않음을 근심할 것이 못 되고 어려운 것은 오직 노농이다." <청장관전서 제4권, 영처문고>

다시 말해 농사를 짓는 소는 글을 쓰는 사람의 팔과 손가락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실질적인 일은 모두 소가 도맡아서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논갈이 김홍도가 그린 <논갈이>입니다. 논을 깊게 갈아야 벼의 뿌리가 잘 자라므로 소의 힘은 곧 농사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이렇게 소 두 마리가 끄는 쌍쟁기는 보통 토질이 딱딱한 곳에서 이뤄졌습니다. 만약 쟁기를 사람이 끈다면 장정 대여섯은 매달려야할 것입니다.
▲ 논갈이 김홍도가 그린 <논갈이>입니다. 논을 깊게 갈아야 벼의 뿌리가 잘 자라므로 소의 힘은 곧 농사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이렇게 소 두 마리가 끄는 쌍쟁기는 보통 토질이 딱딱한 곳에서 이뤄졌습니다. 만약 쟁기를 사람이 끈다면 장정 대여섯은 매달려야할 것입니다.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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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의 얼굴에 소도둑이라는 글자를 새기다

이렇듯 전통시대에 소가 중요한 생산수단이었기에 소도둑은 말 그대로 남의 생산수단을 강탈하는 최대의 도적으로 불렸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소를 훔쳐가면 이젠 사람의 힘으로 그 많은 일을 감당해야 했는데, 소 없이 일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임진왜란 당시 남원의 의병장 조경남(趙慶男)이 지은 책인 <난중잡록(亂中雜錄)>을 살펴보면 소가 없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생했는지 잘 드러나 있습니다.

"갑오(甲午)년에 흉년이 들어 농우(農牛)가 씨가 말라 금년 농사철에 사람들이 스스로 끌며 밭을 가는데 8인이 한 패가 되어 곳곳마다 떼를 이루었다." <난중잡록, 3권>

다시 말해 전쟁으로 국토가 황폐화되고 일하러 나갈 소가 모두 도살되자 사람이 대신 밭을 가는 쟁기를 끌었는데 8명이 함께 소를 대신해서 했다고 하니 소가 농사일에 왜 중요한지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조선시대의 경우 소도둑을 우적(牛賊)이라고 해서 관가에 잡혀가면 목을 매달아 죽이는 사형에 처하는 강력한 처벌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만약 인품이 좋은 수령을 만나 사형을 모면해도 소도둑이라는 죄명을 얼굴에 새겨야만 했습니다. 이렇게 소도둑이라는 것이 죄질이 나쁜 것이어서 종종 멀쩡한 사람을 소도둑으로 몰아 관아에 고발하기도 하였고 어떤 이는 무고죄로 심한 처벌을 받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데리고 있던 노비가 도망을 가면 다시 붙잡아서 더 이상 도망가지 못하도록 다양한 형벌을 양반들 개인적으로 내리기도 했는데, 여기에 소도둑이라는 글자를 얼굴에 새기는 일이 벌어지자 국가에서 이를 직접 개입해서 바로잡은 일까지 생기기도 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성종실록을 살펴보면 도가 지나친 사건이 있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이렇습니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충순위(忠順衛) 이형문(李亨門)은 제 종[奴] 옥산(玉山)이 배반하고 달아났다' 하여 두 귀를 자르고, 오른쪽 볼에, '소도둑[牛賊] 이라 자자(刺子)하고, 두 무릎과 오금을 지졌으니, 죄에 대한 율은 장 1백 대를 때리고 고신을 모두 빼앗으며 사일(仕日)을 삭감하여 환속시키는 것에 해당합니다' 하니, 이형문은 장을 때려서 변방에 충군하고 옥산은 속공하라고 명하였다." <성종실록 74권 성종 7년 12월 29일>

이 내용을 보면 도망간 노비를 붙잡아 두 귀를 자르고, 얼굴에는 소도둑(牛賊)이라는 글자를 영원히 지울 수 없도록 문신으로 새기고, 걷지 못하도록 무릎 안팎을 인두로 지져 버리는 형벌을 가했다는 것입니다. 이후 의금부에서 이 사실을 확인하고 형벌을 가한 이형문을 곤장을 친 후 변방의 군졸로 보내고 만신창이가 된 노비 옥산은 관아의 노비로 넘겼다는 것입니다. 이 내용 중 오른쪽 볼에 '牛賊'이라는 글자를 새긴 것은 당시 소도둑이 얼마나 치욕스런 것인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소도둑은 돈 많은 양반님네들 때문에 생겼다

이처럼 소도둑들에게는 강력한 처벌이 내려졌음에도 소도둑질은 조선시대 내내 끊임없이 벌어졌고, 이에 따라 소의 밀도살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소도둑과 소 밀도살의 중심에는 돈 많고 미식가였던 양반님네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일 년 내내 농사를 지어도 이리저리 세금 내기가 바빴던 서민들이 어디 그 귀하신 소고기를 입에나 댈 수 있었겠습니까?

이런 문제로 인하여 성종 때 부제학 이극기는 나라일 전반에 걸쳐 열 가지의 개혁안을 임금께 제출하였는데, 그 중 나라에서 하지 말라고 하는 만든 법인 '금법(禁法)'에 소 도살과 관련하여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소를 도살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은 일찍이 그 법령이 나타나 있지만, 그러나 성안의 대소인(大小人)의 집에서 아침 저녁의 봉양이나 빈객을 연향(宴享)할 때에 대개 금지한 쇠고기를 쓰고, 관가(官家)에서 공급하는 것도 또한 간혹 이것을 쓰니, 이러한 고기들이 어찌 모두 저절로 죽은 것들이겠습니까? 이러한 일들이 나날이 반복되어 그치는 때가 있지 아니하니 정히 사방의 농민들의 가축이 점차 없어질까 두렵습니다.

이와 같은 유를 진실로 다 열거할 수가 없는데, 조정의 법이 있지 아니한 것이 아니라 봉행하는 것이 지극하지 못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대저 한 번 법이 앞에서 행해지지 아니하면 백 가지 법이 뒤에 폐지될 것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세워진 법을 바꾸지 마시고 가볍게 법을 변경하지 마시며, 유사(有司)에 거듭 명하여 더욱 엄하게 봉행하도록 하여서 그 성효(成效)를 책임지신다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 <성종실록 32권, 성종4년 7월 30일>

이처럼 소 도살의 핵심에는 돈 많은 양반들이 개입되어 있었고, 소 도살을 금지하는 국법이 엄연히 있었음에도 소 도살이 끊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해 성종은 법을 집행하는 관리들에게 더욱 엄격하게 소 도살을 금지하는 법을 확고히 하라고 답을 주었습니다.

양반들의 고기굽기 조선시대 양반님네들이 몰래 모여 화롯불에 고기를 구워 먹고 있는 모습입니다. 추운 겨울날에 소나무 아래 오밀 조밀 모여 앉아 구워 먹는 고기의 맛은 일품이었을 것입니다. 그 맛에 취해 소의 밀도살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작가미상, 1800년대 작품
▲ 양반들의 고기굽기 조선시대 양반님네들이 몰래 모여 화롯불에 고기를 구워 먹고 있는 모습입니다. 추운 겨울날에 소나무 아래 오밀 조밀 모여 앉아 구워 먹는 고기의 맛은 일품이었을 것입니다. 그 맛에 취해 소의 밀도살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작가미상, 1800년대 작품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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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해서 조선후기 학자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흉년에 백성을 구제하는 정책 중에서 반드시 금지해야 할 것이 농사짓는 소의 도살이라는 것을 강력히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수요가 있으면 반드시 공급이 따라가듯이 소고기를 탐하는 사람들이 줄어들지 않자 소의 밀도살은 쉼 없이 계속되었습니다. 심지어 헌종 대에는 사사로이 도살을 금지하는 법이 있었음에도 각 고을의 읍에는 푸줏간이 있었으며, 저잣거리에는 백정이 소도둑놈들과 밀거래를 해서 그 이익을 서로 나눠 갖는 일까지 발생하게 됩니다. 상황이 이 지경이니 농가 소들의 씨가 말라 소 한 마리의 값을 백금(百金)을 줘도 구하기 힘든 최악의 상태까지 빠지기도 했습니다.

여류 시인 이옥봉, 소도둑 때문에 남편에게 버림받다

소도둑과 관련하여 정말 가슴 아픈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데, 그 내용은 조선의 옥 같던 여류시인 이옥봉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옥봉은 조선 선조 때의 여류시인으로 옥천 군수 이봉(李逢)의 서녀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출신이 서녀이니 결혼을 해도 첩살이 밖에 못함을 비관하고 결혼을 포기한 채 서울로 상경하여 왕성한 문인의 길을 걷게 됩니다.

당시 그녀의 시가 선풍적 인기를 끌어 시 한수 쓴다는 서울의 문인들은 모두 그녀의 시에 취하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시에 대한 <허생전>을 쓴 허균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의 누님 난설헌(蘭雪軒)과 같은 시기에 이옥봉(李玉峯)이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바로 조백옥(趙伯玉 백옥은 조원(趙瑗)의 자)의 첩이다. 그녀의 시 역시 청장(淸壯)하여 지분(脂粉)의 태가 없다." <성소부부고 제25권>

이처럼 허균은 그의 누님이었던 허난설헌과 비교하며 그녀의 시가 맑고 기상이 드높아 군더더기가 없었다라고 하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어김없이 사랑의 콩깍지 귀신이 찾아오고야 말았습니다. 이옥봉이 사랑했던 사람은 조원으로 그의 첩이 되기를 간청한 후 그녀는 하지 말아야 할 약속을 하고야 말았습니다. 그것은 두 번 다시 시를 짓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첩살이는 시작되었고 10년 채 안 된 어느 날 그녀의 시련은 시작되었습니다.

그 내용인즉, 조원 집안의 산지기가 소도둑으로 몰려 꼼짝없이 죽을 지경에 처하자 산지기의 아내가 이옥봉에게 찾아와 눈물로 하소연하며 조원과 각별한 사이였던 파주목사에게 살려달라고 부탁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산지기 아내의 말을 들어보니 이것은 분명 소도둑을 빙자해서 아전들이 돈을 갈취하려는 수작이라는 것을 쉽게 알게 되었습니다. 옥봉은 곧장 파주목사에게 자신의 장기인 시를 한 수 적어 보내 산지기는 이내 풀려났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안 조원은 맹세를 깼다는 이유로 옥봉을 쫓아내고야 말았습니다.

이후 그녀의 방황은 시작되었고 급기야 자신이 쓴 시를 온몸에 칭칭 감고서는 바다에 뛰어들어 꽃 같은 생을 마감하기에 이릅니다. 소도둑으로 내몰린 산지기를 구하기 위해 시를 한 수 썼건만, 남편의 앞길을 가로막는다는 어이없는 이유로 사랑하는 이에게 버림받고 바다에 몸을 던져야 했던 이옥봉의 삶이 애처롭기 그지없습니다.

악플러가 해커 된다?

만약 그 산지기의 누명이 소도둑이 아닌 다른 도둑이었다면 아마도 옥봉은 결코 시를 짓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전통시대에 소도둑은 생산 활동의 핵심을 훔쳐가는 최고의 도둑놈으로 인식되었고, 그래서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라는 속담이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럼 과연 이 시대에 소도둑과 같은 존재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그것은 정보화 시대에 정보를 훔쳐가는 해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시대에 걸맞게 '악플러가 해커 된다'라고 바뀌어도 그 뜻은 변치 않을 듯합니다.

덧붙이는 글 | 최형국 기자는 중앙대 대학원 사학과 박사(전쟁사/무예사 전공)를 수료하고 현재 무예24기보존회 시범단 단장을 맡고 있습니다. 무예 홈페이지 http://muye24ki.com 를 운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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