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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악비를 모신 악비묘.
 중국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악비를 모신 악비묘.
ⓒ 조영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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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람선을 타고 서호를 둘러보고 난 후 우리는 악왕묘로 향했다. 악왕묘는 악비(岳飛)를 모신 사당이다. 악비(1103~1142)는 북송이 멸망할 무렵 금나라에 항거하기 위해 조직된 의용군에 가담하여 큰 활약을 한 공로로 장군이 되었다가 그 후 남송 때에 '악가군(岳家軍)'이라는 군대를 이끌고 많은 무공을 세웠던 명장이다.

당시 금나라 군사들은 악비가 이끄는 군대의 깃발만 보고 후퇴할 정도로 악비를 매우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후 악비는 금나라와의 화평론을 주장하는 진회(秦檜), 장준(張俊)에 의해 무고한 누명을 쓰고 살해되었다. 이 악비묘는 남송 가정(嘉靖) 14년(공원 1221년)에 처음 건축되었다.

악묘의 대문을 지나면 악비의 동상이 있는 충렬사가 있고 '심소천일(心昭天日)'이라는 네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대전으로 들어가니 높이 4.5미터에 달하는 악비의 채색 동상이 보였다. 갑옷과 투구를 갖추어 입고 긴 칼을 차고 앉아있는 모습이 영락없이 기골이 장대하고 헌걸찬 영웅의 모습이었다.

동상 위 편에는 악비가 썼다고 하는 '환아하산(還我河山)'이라는 금색 글귀가 있다. 이 글에는 잃어버린 우리 강산을 되찾아오겠다는 악비의 굳은 의지가 담겨 있다. 동상의 좌우에는 '벽혈단심(碧血丹心)', '정충보국(精忠報國)', '충의상소(忠義相昭)', '호기장존(浩氣長存)'이라고 쓴 글귀들이 보인다. 이러한 글귀를 통해 악비가 어떠한 인물이었는지 가늠할 수 있을 것 같다.

 악비의 노모가 등에 ‘정충보국’이라는 네 글자를 새기고 있는 벽화
 악비의 노모가 등에 ‘정충보국’이라는 네 글자를 새기고 있는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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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 안에는 악비의 생애를 벽화로 그려 놓은 것이 있다. 그 중에서 악비의 노모가 출전을 앞둔 악비에게 무공을 세우고 돌아오라는 뜻으로 악비의 등에 '정충보국(精忠報國)'이라는 글자를 새기고 있는 벽화가 인상적이다.

송나라 고종은 악비가 금나라와의 전투에서 많은 무공을 세운 것을 치하하기 위해 '정충악비(精忠岳飛)' 네 글자를 직접 써서 깃발을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그러자 악비는 나라와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고 잃어버린 국토를 다시 찾겠다는 의지를 담아 자신의 등에 '정충보국(精忠報國)'이라는 네 글자를 새겼다고 하는 설이 있는데, 등에 새긴 네 글자가 자신이 새긴 것인지, 아니면 노모가 새긴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우리는 충렬사를 둘러보고 나서 악비기념관 옆의 매점에서 때 지난 점심을 챙겨 먹었다. 중국인 단체 관광객들 틈에 끼여서 15원 하는 도시락을 사서 점심을 때웠다. 좀 부실한 음식이기도 하였지만 더위 탓에 물만 들이켰다.

 정면에 있는 것이 악비의 무덤이고, 오른편에 있는 것이 악운의 무덤이다.
 정면에 있는 것이 악비의 무덤이고, 오른편에 있는 것이 악운의 무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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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대충 마치고 깃발을 따라 이동하는 중국 관광객들을 따라간 곳은 악비묘였다. 묘도에는 문무용(文武俑), 석마(石馬), 석호(石虎), 석양(石羊) 등이 늘어서 있고 중앙에 악비묘가 자리잡고 있었다.

중앙에 '송악악왕묘(宋岳卾王墓)'라고 쓰여 있는 곳이 악비묘이고, 오른쪽에 ‘송계충후악운묘(宋繼忠侯岳云墓)’라고 쓰여 있는 곳은 악운(岳云)의 묘이다. 악운은 악비의 아들이다. 무덤의 규모는 생각했던 것보다 작은 편이었다.

 악비의 무덤 앞에 무릎꿇고 있는 진회와 그의 부인 왕씨.
 악비의 무덤 앞에 무릎꿇고 있는 진회와 그의 부인 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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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비의 무덤 앞에는 악비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고 죽게 한 진회(秦檜), 진회의 부인 왕씨, 만준(萬俊), 장준(張俊) 네 사람이 두 손이 뒤로 묶인 채 무릎을 꿇고 있는 동상이 있다. 철 창살에 갇혀 있는 동상 위에는 침을 뱉지 말라는 문구가 붙어 있다. 얼마나 많은 중국인들이 이곳을 지나면서 민족의 영웅을 살해한 '비열하고 더러운 인간'이라고 침을 뱉었으면 이런 문구가 붙어 있을까 싶었다.

조선시대 김인후는 <송사(宋史)>를 읽다가 진회(秦檜)가 악비(岳飛)를 죽인 대목을 보고 책을 덮고 눈물을 흘리면서 "다른 시대의 충신과 소인이 어찌 나에게 관계되랴만, 자연히 서로 느껴 부질없이 슬피 읊조리네"라는 시를 짓고는 속이 상해서 실컷 술을 마셨다고 한다. 비록 먼나라 중국의 역사지만 악비의 죽음을 두고 조선의 선비도 분한 마음이 든다고 하였는데 중국인은 오죽할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현재 중국 내에서는 이렇게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악비와 악비를 죽게 한 진회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송나라 때 오랑캐이자 야만족으로 여겨온 금나라를 무너뜨리기 위해 싸울 것을 주창한 악비보다는 금나라와의 화해를 주창했던 진회의 외교정책이 타민족을 대거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동북공정 프로젝트와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같은 민족끼리 내분을 조장한 악비는 더 이상 중국의 영웅이 될 수 없다는 식의 논리가 성립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필요에 따라서 지나온 과거의 역사를 현재의 시점에 유리하도록 재해석하려 든다면 중국의 역사는 다시 쓰여야 할 것이다. 나아가 과연 정도(正道)가 무엇인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부터 하여야 할 것이다.


태그:#악비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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