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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산동 고분군에서 가야시대의 유물이 많이 나왔다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이들 고분과 유물에 대한 연구결과를 토대로 2000년 왕릉전시관이 만들어졌고, 2005년 대가야 박물관이 만들어졌다. 우리는 먼저 대가야 박물관에 들러 고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고령 지방을 중심으로 발전해 온 문화를 살펴보았다.

전시실에 있는 토기류: 그릇 받침, 항아리, 접시 등이 보인다.
 전시실에 있는 토기류: 그릇 받침, 항아리, 접시 등이 보인다.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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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실에는 대가야 문화와 관련된 유물이 가장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특히 눈에 띠는 것은 지산동 왕릉에서 출토된 장신구, 토기, 전투용품들이다. 전시실의 절반 이상이 토기류이다. 그릇받침, 목이 짧은 항아리, 뚜껑이 있는 항아리, 굽다리가 있는 접시, 손잡이가 달린 잔 등이 다량 전시되어 있다. 이들이 가야지역에만 발견되는 것인지 아니면 삼국시대의 보편적인 것인지는 알기가 어려웠다.

푸른 녹이 슨 금동관
 푸른 녹이 슨 금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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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한쪽에는 왕관과 귀걸이 같은 장신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왕관은 금동관으로 아래 받침에 둥근 관(冠)이 있고 사슴뿔 모양의 장식이 붙어있다. 신라의 금관에 비해 단순하고 장식이 적다. 그리고 금에 푸른 녹이 있어 더 오래된 것처럼 보인다. 금귀걸이는 귀에 거는 둥근 환에 줄을 매고 장식이 달려있는 형태이다. 요즘의 화려한 귀걸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투구와 갑옷이 입혀진 인형의 모습
 투구와 갑옷이 입혀진 인형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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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공간에는 전투용품이 전시되어 있는데 투구와 갑옷이 대표적이다. 투구는 머리를 보호하는 것으로 현대의 철모와 비슷하다. 이에 비해 갑옷은 몸통을 덮는 갑주와 어깨 부분을 덮는 덮개로 이루어져 있다. 설명에 따르면 갑옷을 통해 그것을 착용한 사람의 지위와 권력관계를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갑옷의 형태가 이웃하고 있는 신라보다는 왜와 가깝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야는 여러 가지 면에서 왜와 교류가 많았던 것 같다. 

이곳에는 또한 지산동 45호분 발굴 결과를 설명하는 모형이 만들어져 있다. '이승의 대왕은 저승에 가도 대왕이었다'는 제목으로 가야의 순장 풍습을 설명하고 있다. 으뜸 돌방, 딸림 돌방 등으로 구분되는 무덤 속에 통치자인 왕, 호위무사, 시종들이 함께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더욱이 왕이 묻힌 방에는 왕 외에 두 명이 더 묻혔으며 이들이 장신구를 착용하고 있었다고 한다.

철을 만드는 도구인 제철로 모형
 철을 만드는 도구인 제철로 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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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관을 나온 우리는 오른쪽 언덕 위에 있는 왕릉전시관으로 향했다. 전시관 가는 길에 제철로(製鐵爐) 모형을 만들어 가야의 앞선 철기문화를 보여주고 있다. 황토 흙으로 만든 일종의 고로에 철광석을 넣고 숯(木炭)으로 이것을 녹여 철을 생산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내용이 KBS 역사스페셜 프로그램을 통해 소개된 바 있다고 한다. 

왕릉전시관 앞에서 보니 주산(311m) 정상 쪽으로 무덤들이 보인다. 이곳에 산재하고 있는 무덤 전체를 지산동 고분군이라 부르며 사적 제79호로 지정하였다. 우리는 왕릉전시관에 들어가 44호 고분을 재현한 모형들을 본다. 들어가자 왼쪽으로 무덤의 중심부로 조금 가까이 갈 수 있도록 길이 만들어져 있다. 이곳에서는 석곽 모양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 또 뒤쪽에서도 역시 중심부로 길을 만들어 주석실(主石室)에 누워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게 만들었다. 안쪽을 들여다보니 머리 쪽에 여러 종류의 토기들이 함께 묻혀있다.

순장 풍습을 설명하기 위해 만든 전시공간
 순장 풍습을 설명하기 위해 만든 전시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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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한 왕릉전시관을 나오니 한여름의 뜨거운 공기가 확 끼쳐온다. 이제 주산에 널려있는 왕릉들을 볼 차례다. 탐사를 위해 왕릉에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땡볕에 일종의 등산을 해야 하니 회원들 중 절반은 왕릉 탐사를 포기한다. 그러나 절반 정도의 회원은 30분 이상 걸리는 왕릉탐사를 시작한다. 산에 오르자 왕릉 가운데로 길이 나 있고 그 좌우에 4-6m되는 봉분들이 연이어 나타난다.

발굴을 통해 그 내용을 상세히 알 수 있는 44호 고분
 발굴을 통해 그 내용을 상세히 알 수 있는 44호 고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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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에 우리가 집중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것은 크기가 가장 클 뿐 아니라 발굴되어 그 내용을 상세히 알 수 있는 제44호분이다. 1977년 경북대학교 박물관 팀에 의해 발굴되었는데 32기의 순장 덧널(관)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부장품 중에 오키나와에서만 나오는 야광조개로 만든 국자가 있어 가야시대 대외무역이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44호분은 지산동 고분 중 크기가 가장 커 지름이 27m, 높이가 6m에 이른다.

44호분 위쪽으로도 여러 기의 고분이 있다. 이곳에 오르니 아래로 수많은 고분군과 고령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이곳에서 보니 고령은 높지 않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역임을 알 수 있다. 고분군 남쪽으로 가야대학교와 고천원고지(高天原故地) 터가 보이고, 동쪽과 남쪽의 분지 끝으로 회천이 흘러가고 있다.

가야대학교 구내에 세워진 고천원 고지 표지석
 가야대학교 구내에 세워진 고천원 고지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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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천원이란 <일본서기>에 나오는 지명이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하늘나라에서 이곳으로 내려온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나라를 세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고천원이 바로 고령땅이라는 주장이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 고천원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찾지를 못했다. 그러나 최근 가야대학교를 세운 이경희 총장이 몇 가지 연구 결과를 토대로 이곳을 고천원 고지로 설정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주장은 학술적인 면에서 논란의 여지가 많은 것 같다. 그렇지만 지방의 작은 도시 고령이 뭔가 새로운 시도를 통해 자신의 지역을 알리려고 노력한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겠다.

덧붙이는 글 | 고령의 지산동 고분군에서 발굴된 유물을 통해 가야문화를 살펴보았다. 토기류, 금동관, 감옷과 투구, 무기류를 통해 가야문화의 우수성을 알 수 있었다. 가야는 왜와 교류하는 등 국제무역에도 종사하였다.



태그:#지산동 고분군, #대가야 박물관, #왕릉 전시관, #출토 유물, #고천원 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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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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