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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벌도 신통치 않는데 튀면 다친다, '튀지 말자'

경상도 진주가 본향인 하륜은 공민왕 9년 국자감시 문과에 합격하여 중앙무대에 진출했다. 이때의 좌주(座主)가 이인복이다. 고려시대 과거 시험관을 좌주라 부르고 좌주는 급제자를 문생이라 불렀다. 이것이 오늘날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학벌의 비조다. 이들의 관계는 평생 부자와 같은 관계를 유지했다. 정몽주, 이색과 같은 당대의 거유를 좌주로 모시지 못한 하륜은 변방을 떠돌며 학벌의 설움을 톡톡히 당했다.

조정에 출사한 하륜은 감찰규정(監察糾正) 감투를 쓴 혈기로 당대의 권세가 신돈의 문객 양전부사(量田副使)의 비행을 탄핵하다 파직된 후 복직했다.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 시절 최영의 요양 출병을 반대하다 양주에 추방되었다. 두 사건을 거치며 '학맥도 신통치 않은 자가 튀면 다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하륜은 철저히 전면에 나서는 것을 피했다. 이러한 방어적인 자기 관리가 관운을 길게 했는지 모른다.

정도전이 끌고 가는 스타일이라면 하륜은 밀고 가는 스타일이었다. 정도전이 조선을 설계한 사람이라면 하륜은 도편수였다. 정도전이 무에서 유를 창조한 사람이라면 하륜은 주어진 도면에 따라 못질을 하고 흙을 발랐던 사람이다. 정도전이 동북아에 조선을 등장시킨 사람이라면 하륜은 조선이라는 테두리 내에서 태평성대를 고민한 사람이었다.

혁명가와 혁명가는 상극이고 이방원과 하륜은 궁합이 맞았다

정도전이 기획과 추진력을 겸비한 혁명가적 학자라면 하륜은 구상과 실천력을 겸비한 행정가적 학자였다. 혁명가와 혁명가는 상통하지만 상생하지 못한다. 혁명가와 행정가는 상이하지만 상생한다. 혁명가와 혁명가는 상극이다. 만나면 부딪친다. 때문에 이방원과 정도전은 극(剋)했고 이방원과 하륜은 상생(相生)했다. 한마디로 이방원과 하륜은 궁합이 맞았던 것이다.

하륜의 사망소식이 한양에 알려지자 대궐은 깊은 슬픔에 빠졌다.

"동북면은 왕업을 시초한 땅이고 조종(祖宗)의 능침이 있으므로 사신을 보내어 돌아보고자 했는데 실로 적합한 사람이 어려웠다. 경의 몸은 비록 쇠하였으나 왕실에 마음을 다하여 먼 길 수고하는 것을 꺼리지 않고 스스로 행하고자 하였다. 나도 또한 능침이 중하기 때문에 경에게 번거롭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외에 나가서 전송한 것이 평생의 영결(永訣)이 될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태종은 애석함에 눈물을 흘렸다. 좌하륜 우숙번이 주변에서 멀어져 갔다. 하륜은 세상을 떠났고 숙번은 한양을 떠났다. 아직도 해야 할 일이 산같이 많은데 누구와 상의하여 처결해 나가야 한단 말인가? 당장에 세자가 문제다.

"슬프다. 죽고 사는 것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길이다. 경이 그 이치를 잘 아니 무엇을 한(恨) 하겠는가. 다만 철인(哲人)의 죽음은 나라의 불행이다. 이제부터 대사에 임하여 대의(大疑)로 결단하고 추호의 흔들림 없이 국가를 반석의 편안함으로 이끌 사람을 내가 누구를 바라겠는가? 이것은 내가 몹시 애석하여 마지않는 것이다. 특별히 예관(禮官)을 보내어 영구(靈柩) 앞에 치제(致祭)하니 영혼이 있으면 이 휼전(恤典)을 흠향하라."

태종은 예조좌랑(禮曹佐郞) 정인지를 함흥에 보내 영전에 사제(賜祭)하라 일렀다. 슬픔에 잠긴 태종은 3일 동안 신하들의 조회를 폐하고 7일 동안 고기가 들어있는 음식을 들지 않았다. 임금으로서 신하에 대한 최고의 예우다.

객지에서 지아비를 잃은 하륜의 부인 이씨가 승정원(承政院)에 탄원하였다.

"가옹(家翁)이 왕명을 받들어 외방에서 죽었으니 원컨대 시신을 집에 들여와 빈소를 차리게 하소서."

집을 떠난 객사자(客死者)는 집에 들여오지 않는 것이 상례(喪禮)였다. 태종은 예조에 명하여 예전 제도를 살펴 보고하라 명했다.

"예기(禮記) 증자문편(曾子問篇)에 '사명을 받들다 죽은 대부(大夫)와 사(士)는 마땅히 집에 돌아와 염(殮)하고 초빈(草殯)하여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속내를 털어놓던 신하가 돌아왔건만 말이 없다

예조의 보고를 받은 태종은 하륜의 시신을 한양으로 운구하라 명했다. 파격이다. 하륜은 살아 넘었던 철령을 죽어서 넘어왔다. 눈 덮인 개골산을 보고 싶어 했던 하륜이 구의(柩衣)에 덮여 금강산 자락을 넘었다.

하륜의 시신이 한양에 도착했다. 한 달 전, 임금의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한양을 떠났던 하륜이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왔다. 남산에 횃불을 밝히고 무인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었던 하륜이 주검으로 돌아왔건만 횃불은 꺼져 있었다.

혁명전야, '다른 계책이 없습니다. 먼저 선수를 써 무리를 쳐 없애는 것뿐입니다'라고 망설이던 이방원을 설득하던 하륜이었건만 말이 없다. 광화문 앞 천막에서 '아들이 아버지의 군사를 희롱하여 죽음을 구하는 것이니 비록 상위(上位)께서 놀라더라도 필경 어찌하겠습니까?'라고 당위성을 역설하던 하륜이건만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이무(李茂)가 득죄하여 온 조정의 대신들이 그의 목을 베기를 청하였을 때. 하륜이 홀로 반대했다. 임금의 의지에 반하는 발언은 목이 떨어질 수 있다. 그러한 위험을 무릅쓰고 반대한 것이다. 태종이 대답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며 말하기를 '하륜이 죽일 수 없다고 하니 이것은 실로 그 마음에서 발한 것이다' 하였다. 이렇게 속내를 털어놓고 지내던 임금과 신하이지만 오늘은 말이 없다.

상여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 상여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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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에 빈소가 마련되자 문상객이 구름처럼 밀려들었다. 천성적인 자질이 온화하고 말수가 적어 많은 사람이 따랐다. 평생에 빠른 말과 급한 빛이 없어 실수가 적었다. 태종과 함께 한 16년 동안 많은 사람을 챙겼고 요직에 심었다.

태종은 경상좌도 병마도절제사(慶尙左道兵馬都節制使)로 있던 하륜의 사위 이승간에게 한양에 올라오도록 허락했다. 군인은 장졸을 불문하고 근무지를 이탈하는 것을 엄격히 금하는 것이 군법이다. 시신을 한양으로 운구하게 하고 군인 사위를 불러올리는 것은 모두 파격이었다.

세자 양녕대군이 하륜의 빈소에 제사하고 임금이 친히 사제(賜祭)하였다. 원로대신에 대한 최고의 예우다. 빈소를 찾은 태종이 말을 꺼냈다.

"국장(國葬)으로 하는 것이 옳을 듯하오."

"국장으로 번거롭게 하지 말고 가인(家人)을 시켜 장사하라. 고 하륜이 유언했다 합니다."
지신사 조말생이 하륜 가족의 얘기를 전했다.

시대를 앞서 살았던 선각자, 영원히 잠들다

"대신(大臣)의 예장(禮葬)은 나라의 상전(常典)인데 하륜의 공덕이 국장으로 손색이 없지를 않소?"

태종은 아쉬웠지만 하륜의 유언과 부인의 청을 받아들여 국장은 생략했다. 그 대신 국장도감(國葬都監)에 명하여 구의(柩衣), 단자(段子), 견자(絹子) 각각 1필, 상복(喪服)에 쓰는 정포(正布)17필, 혜피(鞋皮) 2장을 하륜의 집에 보냈으나 부인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하륜의 장례는 조용히 가족장으로 치러졌으며 선영이 있는 진주 미천면에 묻혔다.

하륜이 주창한 저화(楮貨) 사용과 순제 운하를 정도전과 같은 추진력으로 강행했다면 조선의 경제는 달라졌을 것이다. 6백년이 흐른 오늘날에도 운하가 경제의 효자다. 애물단지다. 갑론을박 현안으로 회자되고 있는데 아득히 먼 6백 년 전에 오늘날의 지폐에 해당하는 저화 사용을 시행했고 삼남지방과 연결하는 운하를 파자고 주장했으니 선각자임에는 틀림없다.

정도전이 조선이라는 국가 정체성과 경제육전(經濟六典) 같은 뼈대를 중시한 반면 하륜은 실질적인 경제를 부흥시키려는 실용주의자였다. 그릇의 크기는 차이가 났지만 두 사람 모두 우리나라에는 소중한 사람이었다. 이 두 사람이 깔아놓은 초석이 있었기에 조선 5백년이 가능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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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부.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을 펴냈다.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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