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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 철원행

8월 15일 오랜만에 식구들과 함께 길을 나섰다. 비록 오락가락하는 비가 발걸음을 주저케 하고, 길 따라 늘어선 태극기들이 약간은 부담스러웠지만 오랜만에 맞이하는 꿀맛 같은 공휴일을 그냥 그렇게 집안에서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비가 오더라도, 경건해야 하는 광복절이라도, 직장인에게 휴일은 휴일 아니겠는가.

그러나 여행을 나서기 전 우리는 정작 목적지를 정하지 못해 우왕좌왕해야만 했다. 어차피 하루 코스이기에 멀리는 갈 수 없었고, 그렇다고 강화도와 같이 집 가까운 지역을 가자니 식상한 것이 사실이었다. 게다가 휴가철이지 않은가. 어설픈 곳을 갔다가는 가서 노는 시간보다 차안에 갇혀 있을 시간이 길어질 터였다.

어디를 갈까? 어디를 가야만 차가 비교적 막히지 않고, 하루 동안 이곳저곳을 둘러볼 수 있을까?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던 우리 식구의 선택은 다름 아닌 철원이었다. 비록 행정구역상으로는 강원도, 그것도 명목상으로는 최전방에 속하지만 의정부와 포천을 거치지 않고 집에서부터 자유로를 통해 연천을 경유하면 철원은 그다지 멀지 않은 지역이었고, 휴전선을 안고 있는 분단의 현장인 만큼 가 볼만한 곳이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5년 전 기억의 시작.
ⓒ 이희동
개인적으로 철원은 5년 전 이미 한 번 다녀온 적이 있었다. 서울 신촌역에서 소위 꽃님이 열차를 타고 연천 신탄리역까지 와서 버스를 갈아타고 돌아다녔던 그 때. 그러나 열악한 대중교통으로 가고 싶었던 곳을 다 돌아보지 못했기에 철원은 항상 내게 아쉬움으로 남아 있었다. 특히 분단을 공부하는 내게 철원은 그 자체로 하나의 텍스트였기에 그 아쉬움은 더욱 컸다.

반면 동생은 철원을 '낙오자의 여행지'로 기억하고 있었다. 대학진학에 실패한 뒤 재수생들과 삼수생들이 모여 다시금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떠났던 공간으로서의 철원. 역시 여행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지나간 추억이었던가. 어쨌든 우리 식구는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들기 위해 그렇게 철원을 찾아 나섰다.

자유로를 타고 철원으로

행주대교를 건너 자유로로 들어섰다. 그 이름 자유로. 우리가 자유롭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도 모자라 굳이 '자유'라는 명칭을 붙여야만 했던 이곳. '자유총연맹', '자유주의연대' 등 이 사회의 자유가 들어간 모든 단체나 개체들이 오히려 자유와는 반대의 이미지를 띠듯, 그것은 오히려 자유의 결여태의 표현일 뿐이다. 자유롭지 못한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유'를 읊조리며 자위하는 형국.

도대체 자유로의 자유는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할까? 곳곳에 과속 감시카메라가 붙어 있는 이 길이 속도제한으로부터의 자유를 논할 리는 없을 터, 결국 이 도로명의 작명가는 개성으로 향하는 이 길을 따라 자유민주주의의 자유가 북한으로 스며들길 바란다고 떠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자본으로부터도 결코 자유롭지 못한 우리에게 북한을 향해 자유 운운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걸까?

정치주체들은 선거용으로, 경제주체들은 경기부양용으로만 북한을 바라보는 작금의 세태에 비추어 볼 때, 북한을 향한 우리의 자유에 관한 의지는 언어도단일 뿐이다. 그렇다고 자유로가 속도제한으로부터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지도 않은 지금, 결국 자유로를 통한 자유의 범람은 자유의 의미만을 퇴색시킬 뿐이다. 얼치기 개혁세력의 개혁타령에 많은 이들이 개혁이란 단어에 신물을 내듯 자유는 그렇게 오염되는 것이다. 아니, 오염되어 왔을 것이다.

공휴일임에도 불구하고 차량은 그리 많지 않았다. 역시 탁월한 선택이었던가. 나는 미끄러지듯이 차를 몰았고 곧이어 7년 전 지겹도록 보았던 문산 표지판을 볼 수 있었다. 제대하면 문산을 향해서는 오줌도 누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건만 어느새 그리워지는 군생활이고 보면 망각은 인간에게 주어진 축복임이 분명하다.

▲ 철원의 끝 아닌 끝.
ⓒ 이희동
연천을 지나 이윽고 철원. 그 경계에서 강원도 환영 간판을 봤을 때도 잘 모르겠더니만, 길가 곳곳에 박혀있는 군부대 간판들을 보고 있자니 내가 최전방에 와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군인들이 이 좁은 지역 내에 살고 있다는 것인지 원.

저 멀리 도로 끝에 군 초소가 보였다. 가까이 가서 보니 그곳은 민통선 초소로 일반인과 군인과의 경계가 되는 공간이었다. 어머니가 한마디 하신다. 몇 해 전 당신 아들이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그곳을 들어갈 때, 당신 역시 가슴이 너무 아팠다던 바로 그 얘기. 그것은 전방 지역을 돌아다닐 때면 어머니가 잊지 않고 꼭 하시는 말씀이었다. 군인들을 바라보는 부모들의 마음은 모두 같으려니.

철원의 상징 노동당사

▲ 철원의 상징 노동당사.
ⓒ 이희동
민통선을 따라 쭉 차를 몰다가 우회전을 하니 바로 눈앞에 그 유명한 노동당사가 나타났다. 철원의 상징 노동당사. 예전과 달리 무너짐 방지 공사를 하려는 듯 쇠파이프 구조물들이 건물 전체를 둘러싸고 있었지만 그 위엄만은 그대로 간직한 채 지나가던 이들의 발걸음을 붙잡고 있었다.

건물 앞에는 당시 북괴의 야만적인 행위들을 소상하게 기록해 놓은 안내판이 친절하게 서 있어 보는 이의 이해를 돕고 있었다. 한 번 끌려 들어가면 시체가 되어 나와야 했다는 악의에 찬 증언에서부터 노동당사를 중심으로 1개리 당 쌀 200가마씩 착취해 갔다는 이야기까지.

▲ 노동당사에 관한 설명.
ⓒ 이희동
어른들은 안내판을 보며 연신 혀를 끌끌 차시며 북괴의 잔악함을 되새김했고, 한반도 이북이 아닌 이남에 사는 자신들을 끊임없이 천하의 행운아로 규정하고 있었다. 결국 껍데기만 남은 철원의 노동당사는 하나의 이데올로거로서 생명을 담보로 이 땅에 세워진 정권들의 정체성을 보증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안내판에 적힌 서술이나 건물에 새겨진 총탄 자국에 눈길을 보내는 어른들과 달리 내 동생과 나의 시선은 노동당사 현관 위에 박혀 있었다. 그곳은 바로 근 15년 전 서태지와 아이들이 뮤직비디오 '발해를 꿈꾸며'를 불렀던 바로 그 장소였다. 셋이서 멋있는 조명 아래 다리를 교차하면서 춤을 추었던 바로 그 장소.

▲ 이데올로거로서의 노동당사.
ⓒ 이희동
우리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발해를 꿈꾸며' 멜로디를 흥얼거리고 있었고, 옆에선 우리 또래로 보이는 어떤 이가 역시 서태지 운운함을 희미하게 들을 수 있었다. 어쨌든 포연이 쓸고 간 지 50년이 훌쩍 넘은 지금, 철원의 노동당사는 서른 즈음이 된 우리 세대에게 서태지와 함께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반면 노동당사를 바라보는 요즘 어린 아이들의 시선은 또 우리와 다를 것이다. 꼬마들에게 노동당사는 다른 건물들과 달리 거의 폐허가 되어버린 흉물스러운 구조물에 불과할 뿐, 그들에게 노동당사의 역사적 의의를 설명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른들이 아무리 엄숙하고 무서운 말투로 50년 전 전쟁과 북괴를 이야기한들 그들에게 전쟁과 북한은 전 세대와 다른 의미로 지각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지금 내 눈 앞에 서 있는 철원의 상징 노동당사는 슬픈 우리 현대사의 증인이다. 그것은 분단의 상처를 온몸으로 발현하는 동시에 세대 간 소통이 끊겨버린 우리 사회의 비극을 말없이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 구 철원 시가지. 가운데 빨간 점이 노동당사로서 그 주변에는 당시 관공서들이 늘어서 있었다.
ⓒ 이희동
노동당사를 벗어나려 하는데 길가에 서 있는 커다란 지도 하나가 또다시 발길을 잡았다. 그것은 한국전쟁 전 이 지역의 주요 건물들을 표시한 지도로 노동당사만 남아 있는 이 황량한 지역이 바로 구철원의 중심지임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은 흔적도 찾아보기 힘든 철원군청부터 시작해서 세무서, 경찰서, 읍사무소 등이 모두 그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노동당사는 그 공공기관 거리에서 정중앙에 위치해 있었다. 아마도 노동당사의 설계자는 그 위치만으로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한껏 과시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얄궂은 노동당사의 운명이여. 전쟁은 건물이 상징하던 권력을 앗아갔고 노동당사는 해체되어버린 다른 건물들과 달리 흉물스럽게 남겨져 반공교육의 산실이 되어버렸다.

피안에 이르는 길

노동당사를 나와 고석정 가는 길에 도피안사에 들르고자 이정표를 살피고 있었다. 저 멀리 큼지막이 '땅'이라고 쓰인 간판이 보이더니 그 주변으로는 온통 부동산에 관한 선전뿐이었다. 이곳 강원도 전방에도 투기 바람인가. 물론 철원이 경원선, 내금강 전철이 지난 바 있는 교통 요충지이기에 통일 후 땅값이 오를 가능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벌써부터 이 지역에조차 땅 투기 붐이 인다는 것은 슬픈 일이었다.

▲ 악귀같은 현실.
ⓒ 이희동
이윽고 도착한 도피안사. 피안에 도착했다 해서 도피안사라더니 악귀 같은 현실을 지나 사찰에 도착한 것이 딱 그 이름과도 같았다. 어쩌면 '도피'라는 음절 역시 이와 같은 연상을 돕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도피안사, 다행히도 그곳은 5년 전과 마찬가지로 고즈넉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 사회에서 5년이면 꽤 많이 변할 수도 있었을 텐데 용케도 도피안사는 예전의 소박함을 잃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DMZ 내 생태계와 마찬가지로 분단의 영향 때문이리라. 화려함도 거추장스러울 수밖에 없는 철원의 냉엄한 현실이 투박한 도피안사를 지켜낸 것이다.

같은 이유에서일까. 도피안사 적멸보궁 안에 모셔진 유명한 철부처 역시 금박이 벗겨진 그 모습 그대로였다. 5년 전에는 금박이었던 것도 같은데, 이번에 본 부처는 새까만 모습에 철의 질감을 여과 않고 보여주고 있었다. 중요한 건 불상이 아니라 그 상을 바라보는 이의 마음이라 했던가.

▲ 투박한 도피안사.
ⓒ 이희동

▲ 소박한 모습의 철불.
ⓒ 이희동
도피안사를 나오기 전 전각 옆에 있는 구릉에 오르니 민간인 통제구역 너머 펼쳐진 너른 철원 평야가 눈에 들어왔다. 오래 전부터 이 지역 사람들은 이곳에 올라 부처님께 저 너른 들판의 풍요로운 수확을 빌곤 했을 것이지만, 오늘날 바라본 그곳 철원평야는 그 넓이만큼 애잔할 뿐이었다.

분단으로 인해 그 생산성이 최소 1/3은 줄어들었을 그곳. 과거 철원평야를 잃고 김일성이 3일 밤낮을 울었다는 이야기가 내려오듯이 북한 사람들은 가뜩이나 모자란 식량을 되새기며 철원평야를 하염없이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뿐인가. 최근 한미 FTA가 출범하려고 하는 이 땅에서는 농민들이 수심 가득한 시선으로 그곳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그만 도피안사를 나온다. 피안도 좋지만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는 이승이 낫다지 않는가. 다음 목적지는 철원 고석정이다.

▲ 도피안사에서 쳐다본 DMZ 내 철원평야.
ⓒ 이희동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유포터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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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지금은 비록 회사에 몸이 묶여 있지만 언제가는 꼭 공부를 하고자 하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