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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30일 캠프데이비드에서 공동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부시 미국 대통령과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
ⓒ EPA=연합뉴스

토니 블레어의 바통을 이어받은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가 미국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겉으로 대놓고 미국을 비판하지는 못하지만 미국을 향해 단계적으로, 그리고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내고 있다. 푸들이라는 비난을 들어온 블레어와는 사뭇 다른 브라운의 대외 정책이 새롭게 펼쳐지고 있다.

블레어를 중도 하차시킨 악수였던 이라크 전쟁 등 미국과 얽힌 문제에서 브라운이 어떤 카드를 들고 나올지는 국내외 언론의 관심사였다. 블레어처럼 푸들 같은 정치를 해서는 도저히 영국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브라운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미국이다. 세계 최강국을 상대로 푸들이 되지 않으면서도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기에 브라운의 카드가 더욱 궁금했다. 이제 드디어 브라운의 카드가 하나둘씩 드러나고 있다.

이라크에서 발 빼는 영국... '관타나모 수감자 석방' 공개 요구도

데이비드 밀리반드 영국 외무장관이 지난 7일 미국의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에게 서한을 보냈다. 관타나모 수용소에 있는 다섯 명의 영국인 영주권자들을 풀어줄 것을 공개적으로 요구한 것. 올 4월에 "영국 영주권자들의 인권 문제까지 책임질 필요는 없다"며 강하게 거절하던 블레어 집권기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공개 송환 요구에는 브라운의 정치적 노력이 숨겨져 있다. 일간 <인디펜던트>는 8일 브라운 총리가 지난주에 이뤄진 부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이 문제를 제기했고, 여기에서 긍정적인 신호를 읽고는 이를 공개적으로 요구했다고 보도했다. 영국 언론들은 블레어가 풀지 못한 숙제를 브라운이 단호하게 해결했다고 극찬했다.

사실 관타나모는 국제법적인 근거 없이 온갖 고초를 당하는 이들이 많은 인권의 사각지대로 미국의 치부 중 치부가 아닌가. 미국으로선 자존심 상할 만한 일이다.

영국의 변화는 이라크 전쟁에서도 뚜렷이 나타난다. 브라운이 취임한 이후 이라크 전쟁에서 발을 빼려는 영국 정부의 움직임이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다. 바스라를 중심으로 이라크 남부 지역을 맡고 있는 영국 정부는 철군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일간 <가디언>은 8일 영국군이 바스라에서 적극적으로 전투를 벌이기보다는, 감시 활동을 벌이는 등 소극적인 역할로 전환하고 있고 주둔지인 공항 주변을 보호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미 브라운은 이라크에 있는 영국 군인들의 정보에 따라 철군을 결정할 것이며 미국과는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철군을 결정할 것임을 강조했다.

2003년 5월까지만 해도 1만8000명의 영국군이 이라크에 있었지만, 현재는 5500명에 불과하다. 이 중 500명도 조만간 철수할 계획이다. 블레어는 2008년까지는 이라크에 주둔할 것이라고 밝혔지만, 현재 영국 정부는 내심 이보다 더 조속히 철군을 완료하고 싶은 눈치다.

영국으로서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명분 없는 이 전쟁에 더 개입해봤자 손해만 볼 뿐 더 이상 득이 없다는 판단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국민이 그렇게 반대하는 전쟁을 적극적으로 해 봤자 정치적 입지만 좁아질 것이라는 것을 브라운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 2003년 3월 21일(현지시간) 남부 이라크의 알포(al-Faw) 유전을 점령한 영국 특수부대 소속 해병들이 이라크 포로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다(자료사진).
ⓒ 로이터/뉴시스

썰렁했던 부시와의 회담... '푸들 벗어나기'-'미국 고려'에서 줄타기할 듯

이 같은 영국 정부의 변화된 태도는 지난 주 영미정상회담에서도 일부 감지됐다. 물론 양국 정상은 "우리는 테러와의 전쟁에서 싸우는 데 있어 하나"라는 데 절대적인 합의에 도달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는 양국의 원칙적인 자세를 보여주는 외교적인 언사일 뿐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오히려 이번 회담에서 도드라진 것은 양측의 미묘한 시각차였다.

부시가 테러와의 전쟁이 "악에 대항하는 선의 전쟁"이라는 이분법적인 시각을 고집한 반면, 브라운은 "테러리즘은 대의명분이 아니라 인류애에 대한 범죄"라며 사뭇 다른 뉘앙스를 풍겼다. 또 브라운은 "테러 대응에서 아프가니스탄이 최전선"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부시는 "이라크가 테러와의 전쟁의 중심"이라고 말해 인식 차이를 보였다. 이라크에서 발을 빼려는 영국으로서는 이라크가 더 이상 가장 중요 지역이 아닌 셈이다.

한편 이번 정상회담에 대해 언론들은 이구동성으로 블레어 때와 달리 분위기가 썰렁했고 더 딱딱했다고 전했다.

사실 이 같은 브라운의 '미국과 거리 두기'는 예정된 일이었다. 브라운이 총리로 취임하고 한 달이 지난 7월말쯤이었다. 영국 언론이 시끄러웠다. 브라운의 최측근 중 한 명인 더글러스 알렉산더 무역개발부 장관이 "이제는 파괴할 때가 아니다, 건설해야 할 시점"이라며 미국이 힘에 바탕을 두고 세계를 지배하려는 시기는 지나갔고 더 평화적이고 협력적인 방법으로 대외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밝혔다. 언론들은 대미정책이 바뀐 것이냐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에 대해 밀리반드 외무장관과 브라운 총리는 미국과의 굳건한 관계를 강조하며 대립적인 관계를 설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아마도 브라운으로서는 부시와의 회담을 앞두고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언론을 통해 미국에 상반된 신호를 보이면서 미국의 반응을 살펴보려는 전형적인 떠보기였을 수도 있다고 기자는 본다.

브라운은 이처럼 미국과 일정하게 거리를 두는 동시에 세계적인 공익 이슈를 선점하면서 이미지 메이킹을 할 것으로 보인다. 브라운은 부시와 회담 후 바로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을 만나 수단의 다푸르 사태 해결과 아프리카의 빈곤 퇴치를 위한 영국의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 같은 영국의 변화를 미국과의 관계 악화나 균열로 직결시키는 것은 성급한 판단인 것 같다. 극히 실용주의적인 영국 정부가 대미관계를 심하게 악화시키면서까지 자기 목소리를 내지는 않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결국은 영미동맹과 자기 목소리 내기 사이에서 교묘한 줄타기를 하면서 수위를 조절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런 측면에서 미국 정부에서 영국의 이라크 조기 철군 계획을 상당히 걱정하고 있고, 결국은 부시가 브라운을 어떤 형식으로든 압박할 것이라고 언론들은 내다보고 있다. 부시의 진짜 압력에 대해 브라운은 어떤 태도를 취할까. 어쩌면 브라운의 진짜 카드는 앞으로 이라크 철군 문제를 둘러싼 대미관계에서 발휘될 수도 있다.

영국 철군 불똥, 어디로 튈까?

영국이 이라크에서 발을 빼면 그 불똥이 어디로 튈까.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

우선 미국은 어떻게든 영국을 설득하려 할 것이다. 또한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국경 문제부터 정치적인 협상까지 유엔의 적극적인 개입을 요구하며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을 압박하고 있다고 일간 <가디언>이 8일 보도했다. 이에 대해 유엔 직원들은 안전 위협을 이유로 반대투표를 하는 등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하지만 유엔은 미국의 요구를 일부 수용해 이라크에서 근무하는 인력과 지원 금액을 늘릴 계획이라고 한다.

일본이 발을 뺀 지 오래고, 영국마저 떠난다고 하니 미국으로서는 다급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불똥에서 한국 정부는 과연 자유로울지, 언제까지 한국군은 이라크에서 철군도 못하고 주둔해야 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 유엔이 이라크 문제에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하도록 부시 미국 대통령이 압박하고 있다는 내용의 <가디언> 기사.
ⓒ 가디언

태그:#고든 브라운, #조지 부시, #부시의 푸들, #이라크전, #관타나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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