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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태일 평전>과 <조영래 평전>
ⓒ 강태선
사다놓고는 내내 읽을 기회가 없었던 <조영래 평전>을 이번 휴가 동안 일독했고 더불어 <전태일 평전>을 다시 읽었다.

경기고·서울대 'KS마크'에 그것도 모자라 법대를 수석 입학한 이력의 변호사와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재단사, 상이한 계층의 두 사람은 사람을 지독히 사랑하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살아서 한 번도 마주한 적이 없으나 우리들 의식 속에 분리되어 있지 않다.

<조영래 평전>을 두고 누구는 그가 그토록 거부했던 '엘리트주의'를 오히려 부각시켰다고 비판한 바 있다. 그에 동의하지만 나는 조영래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을 더 빨리 접할 수 있다는데 더 방점을 두기로 했다. 최초로 '지은이' 조영래가 아니라 '인간' 조영래를 염두에 두고 <전태일 평전>을 다시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음에 오히려 감사하기로 했다.

<조영래 평전>의 표지의 조영래는 여전히 고개를 반쯤 옆으로 기울인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의 자세에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의 표정이다. 이 책에는 캐리커쳐가 사진을 대신하고 있다. 그림은 사진보다 고뇌의 그림자가 더 역력하다. 조영래는 왜 여전히 고뇌하는 '아바타'로 우리에게 남아 있는가. 그 그림자의 정체는 무엇일까.

조영래는 '분신을 미화'했다고 자책했다. 그는 90년 12월 타계하기 직전 수십명의 분신열사 명단을 받아 천도재를 지낸다. 며칠 뒤 <전태일 평전> 개정판 출간에 비로소 '조영래'라는 이름을 넣을 것에 대한 민종덕의 질문에 미소로 답할 뿐이었다. 지은이도 묘연했던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 대신에 '<전태일 평전>-조영래 지음'이란 개정증보판이 나오기 며칠 전 그는 우리 곁을 떠났다.

조영래 그 그림자는 전태일을 역사에 낱낱이 알린 죄인(?)의 표정이 아니었을까. 나는 책을 읽으면서 조영래를 괴롭게 했던, 그 스스로 부여한 '혐의'에 주목하게 되었고 '혐의없음'의 증거를 찾고 싶어졌다. 누구보다 자유로울 자격이 있는 그를 자유롭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대학생 친구가 하나있으면 원이 없겠다'는 전태일의 말은 늘 그의 귓전에 이명처럼 울렸을 것이다. 조영래는 '70년 11월 전태일의 분신으로 그를 알게 되었지만 '70년 8월의 전태일을 살아서 만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다.

삼각산에 올라온 지 4개월 가량이 지난 1970년 8월 9일, 전태일은 마침내 하나의 결단을 내렸다. 그러고는 오랜만에 일기를 썼다.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오늘은 토요일. 8월 둘째 토요일. 내 마음의 결단을 내린 이날,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에 한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치오니 하나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1970. 8. 9 <전태일 평전> 에서

이 날 일기에 전태일은 '오늘은...8월 둘째 토요일'이라고 했다. 1970년 8월의 둘째 토요일은 8월 9일이 아니라 8월 8일이었으니 그는 밤을 새워 9일 어스름 새벽빛에야 결심을 글로 마저 옮겼으리라. '70년 8월 8일 밤, 음력으로 칠월 칠석,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날, 그는 굶주리고 병든 어린 직녀들 곁으로 다시 돌아갈 결심을 굳혔던 것이다. 견우 태일은 옥황상제, 하나님께 긍휼과 자비를 구하면서 그 밤 이미 마음은 목숨을 걸고 오작교를 건너 어린 동심 곁으로 내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글을 두고 조영래는 '여기서 전태일 사상은 완결되었다'고 선언했다. 전태일은 11월의 '분신'으로가 아니라 8월 그 밤의 '결단'으로 이미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전태일 평전>의 클라이맥스는 11월이 아니라 바로 8월이라는 것이다. 조영래는 고단한 도피생활 중에도 전태일의 행적을 낱낱이 추적해낸다. 특히 평화시장에 다시 돌아온 9월과 10월 전태일의 스스로 살고자 한 그리고 동심을 살리고자 한 처절했던 투쟁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그 생생한 기록들은 전태일의 '발버둥'에도 미동도 하지 않았던 사업주, 기자 그리고 근로감독관 등 부와 권세 있는 자들이 결국 그를 죽인 것임을 너무도 자세히 진술해주고 있는 것이다.

조영래는 분신을 미화하지도 않았다. 과잉된 의미부여를 경계하면서 전태일의 분신은 개별 인간들이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전체의 일부'임을 철저히 자각한 한 인간의 가장 생생하고 절절한 '인간 선언'이라고 했다. 그는 도그마에 빠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소신공양'이네 '고난의 십자가'네 하는 표현을 섣불리 들먹이지도 않았다.

아직 섣부른 나는, 견강부회(牽强附會)일망정 전태일은 역사적 필연의 산물이었으며 조영래는 다만 그에 성실히 복무하였음을 더 증거하고 싶어진다. 그의 그림자, 그의 짐이 조금 덜어질까 싶은 소박한 마음에서.

20세기의 문턱 1901년 칠월칠석에 무상의 대각(大覺)을 이룬 구한말 신인 강증산의 행적을 담은 '증산도 도전'에도 '전태일'이 등장한다. 물론 동명이인이다. 하지만 증산 또한 '전태일'이란 이름이 갖는 보편적 의미를 취하여 그의 '천지공사(天地公事)'에 참여케 하였으니 영 관계없다고 볼 수는 없다. 증산은 '천하가 큰 병이 들었다'고 진단하고 뭇 생명의 원과 한을 낱낱이 푸는 해원굿으로만 지상 선경세계를 열 수 있다고 하였다.

그 '전태일'은 정읍 태인 숙구지 사람이었다. 증산은 전태일에게 그의 사상의 정수인 '태을주'를 읽도록 명한다. 명을 좆아 집으로 돌아와 하루 저녁을 그 주문을 외는데 온 마을 사람들이 모두 따라 읽는 신이한 일이 벌어진다. 이에 증산은 때가 이르니 그 기운을 거둔다고 하였다. 동학 '시천주'에 이은 새로운 혁명주문 '태을주(太乙呪)'를 온 마을 사람들이 따라 읽도록 하는데 '전태일'을 채용했던 것이다.

증산은 천지공사를 행함에 그 공사에 맞는 시간과 장소와 사람을 동원하였다. 삼계의 정수인 천일(天一), 지일(地一), 태일(太一)의 기운을 취하여 해원의 운로(運路)를 짜는 것이었다. 옛사람들은 하늘을 천일, 땅을 지일 그리고 인간을 태일이라고 했는데 인간은 손발이 없는 천지를 대신하여 천지의 뜻을 완성하는 너무도 지극한 사명을 띠었기에 특히 인일이란 평범한 말 대신 태일이라 칭했다.

증산은 '완전한 인간'의 표상으로 이름 그대로인 '전태일'을 참여시켰던 것이다. 증산도에서는 천지공사 이후 20세기 인류가 겪는 역사는 이 해원프로그램의 투사(透寫)라고 한다.

전태일의 몸을 사르는 항거가 정말 이 공사의 투사였는지는 확인할 수는 없다. 어쨌든 그의 이름은 그렇게 비범했던 것이다. 장기표는 전태일을 '예수'로 조영래를 '사도 바울'에 비유하였고 <전태일 평전>을 '전태일 복음서'라고 규정하는 '평범함'을 보인다. 그러나 동북아의 사상적 전통으로 전태일은 이미 다른 비유의 이름이 필요하지 않았다. 전태일은 그의 이름에 걸맞게 살았던 것이며 정말 그러한 역사적 사명을 안고 왔었는지 모른다.

조영래가 아니었더라도 누군가는 <전태일 평전>을 완성하였을 것이다. 필시 민종덕은 장기표를 닦달하여 평전을 완성하고 말았으리라. 물론 그 기다림만큼이나 87년의 여름은 늦게 왔을 것이다. 민종덕은 누구인가? 그는 청계천 헌책방에서 한참 지나 전태일 관련기사를 본 바로 그 순간 전태일 전도사가 되기로 작정하였고 에누리 없이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다.

장기표는 '민종덕' 또한 '사도바울'의 반열에 올렸어야 했다. 나는 <전태일 평전>에 나오는 가명인 전태일의 벗의 이름 '김개남(가명)'은 민종덕의 창작물이라고 본다. 그는 전태일을 자신의 고향, 고부에서 출정한 동학 전봉준에 비견하였고 비슷한 위용을 떨쳤던 김개남을 전태일 친구의 가명으로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민종덕은 강증산의 천지공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을 소개할 때, 곧잘 강증산이 태어난 '손바래기' 출신이란 사실을 말한단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의 표정은 지옥을 바라보는 표정이라고 한다. 나는 <조영래 평전>의 개정판에서는 초판에 가해진 비판을 충분히 수용함은 물론 조영래의 표정 또한 '생각하는 사람'의 그것에서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의 미소가 있는 표정으로 바꾸어 볼 것을 제안한다.

전태일·조영래 두 죽은 이들과 '방콕'하여 함께 보낸 휴가, 그것은 실패한 것이었을까.

덧붙이는 글 | <나의 여름휴가 실패기> 응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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