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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탄자니아 국립박물관 모습.
ⓒ 김성호
잔지바르에서의 4박 5일간 휴식을 끝내고 다시 다르에스살람으로 돌아온 나는 항구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택시를 타고 시 외곽에 있는 타자라 역으로 먼저 달려갔다. 이틀 후에 출발하는 음베야 행 열차 표를 예매하기 위해서였다. 어렵지 않게 열차 표를 예매한 뒤 처음 묵었던 키보디야 호텔로 갔다.

숙소 근처의 길거리에서 2000실링(1700원)을 주고 전화카드를 샀으나 불량이었다. 전화카드를 판 젊은이에게 항의하자 환불해줄 생각은 하지 않고, 어디에 전화를 걸 거냐고 묻는다. 내가 전화번호를 알려 주자 내가 묵는 숙소의 전화기로 걸어서 연결시켜준다. 환불 대신 전화 한 통화로 대신 때우는 것이었다.

내가 전화를 건 사람은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에서 케냐 나이로비로 올 때 비행기에서 만났던 '굿네이버스'의 탄자니아 지부장이었다. 나이로비에서 헤어질 때 다르에스살람에 오게 되면 연락하라고 나에게 자신의 핸드폰 번호를 알려주었다.

아프리카에서 맛보는 구수한 우리 된장국

마침 연락이 되어 저녁 때 외곽의 밀레니엄 타워스 호텔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택시를 타고 한참을 달려 호텔 앞에 도착했다. 호텔은 새로 지은 듯 깨끗하고 높은 최고급 호텔이었다. 지부장은 나를 호텔 근처 자신의 임시 숙소로 데려갔다. 아직까지 집을 얻지 못해 다르에스살람에서 의료봉사 활동을 하다 여름휴가로 잠시 한국을 방문하고 있던 우리나라 의사의 집을 임시로 사용하고 있었다.

푸짐한 저녁 식사가 놓여 있었다. 김치와 나물 뿐 아니라 고추장, 여기에 구수한 된장국까지 곁들이니 우리 음식 그대로이다. 이곳에서 많이 나 싼 바닷게가 한 소쿠리 더해져 배낭여행객으로서는 오래 만에 맛보는 진수성찬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비싸서 먹지 못하는 바닷게를 실컷 먹을 수 있었다.

마침 굿네이버스의 에티오피아 지부장이 이곳을 방문하고 있어 참석했고, 한국국제협력단(KOICA) 소장의 부인도 참석해 아프리카에서의 봉사활동의 의미와 어려움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에티오피아 지부장은 아디스아바바에서 차를 끌고 1주일 동안 달려왔다고 한다.

아프리카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것은 생각만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말라리아 등 풍토병과 더운 날씨, 의사소통의 어려움, 불안한 치안 등 동물의 왕국이나 인도양의 아름다운 해안가를 떠올리는 것은 봉사활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사치에 불과하다.

나는 무엇보다도 비행기 안에서 그렇게 울어대던 탄자니아 지부장의 어린 딸 '하영'이가 어느새 아프리카에 잘 적응해 있는 것을 보고 반가웠다. 국제협력단 소장의 부인이 데려온 딸과 방안을 뛰어다니며 즐겁게 놀고 있었다. 아이들은 어디나 그렇게 빨리 적응한다.

서로 개인적으로 알지도 못하고, 내가 무엇을 하는지도 전혀 모르는 사이인데 우리나라 사람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프리카에서 대접을 받으니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여행에서는 이렇듯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을 만나 도움을 받기도 한다.

모르는 나그네에게도 밥 한 그릇 대접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오랜 전통이다. 우리 민족은 단순히 혈연관계만을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고, 공동체 전체를 가족처럼 위하는 사회적 가족애의 전통이 있다.

탄자니아도 우리와 비슷하다. 니에레레 대통령의 우자마(가족공동체) 운동 때문이다. 싱기다에서 아루샤로 오는 버스 안에서 보니 젊은 남자가 나이든 모르는 여자에게 '아주머니'라고 하지 않고 ‘맘마(엄마)’라고 불렀다. 자신의 부모처럼 대접하는 사회적 전통은 모르는 사람에 대한 호칭에서도 알 수 있다.

굿네이버스 지부장 가족과 헤어져 숙소로 돌아왔다. 배낭여행객인 나는 훌쩍 떠나면 언제 돌아올지 모르지만, 그들은 3년 동안 이곳에서 봉사활동을 해야 한다. 아프리카 배낭여행을 잘 하라는 그들의 인사와 아프리카 봉사활동을 잘 마치라는 나의 인사가 왠지 아쉬움을 남긴다.

아프리카 병사들을 기리는 아스카리 기념물

▲ 전통 공예품 등을 파는 니에레레 문화센터.
ⓒ 김성호
다음날은 하루 종일 다르에스살람 거리를 걸어 다녔다. 음베야로 떠나는 기차가 다음날 금요일이어서 하루를 더 머물러야 했다. 나는 아침 일찍 비자를 받기 위해 시내 말라위 대사관을 찾아갔다. 음베야까지 기차를 타고 간 뒤 말라위 국경을 넘어갈 예정인데, 말라위는 다른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와 달리 국경에서 비자를 발급하지 않기 때문에 미리 비자를 받아야한다.

숙소에서 나와 시계탑을 지나 사무실 빌딩들이 높이 들어선 사모라 거리를 따라 올라갔다. 기념품 가게에는 다양한 색상의 티셔츠를 팔고 있었다. 티셔츠에는 '음중구(백인을 비롯한 외국인)', '잠보(안녕)', '카리부(환영합니다)'. '트위가(기린)', '하쿠나 마타타(아무 문제 없어요)' 등 간단한 스와힐리어가 쓰여 있었다.

조금 더 올라가자 로터리에 군복을 입은 한 병사가 총검을 들고 찌르기 자세를 하는 구리 기념물이 있다. 제1차 세계대전(1914~18) 당시 참전했다 죽은 아프리카 병사들을 추모하기위한 아스카리 기념물(Askari Monument)이다.

아스카리는 스와힐리어로 '군인'이라는 뜻이니 무명용사 기념탑이라고 하면 될 것 같다. 당시 탄자니아는 독일령이었기 때문에 독일군으로 영국군에 대항해서 싸웠고,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도 각자 식민지 종주국을 위해 싸움터로 내몰렸다.

1차 세계대전에만 100만 명 이상의 아프리카인들이 참전해 15만 명 이상이 죽었다. 2차 세계대전(1939~45) 중에도 케냐와 탄자니아에서만 28만 명을 비롯해 아프리카 대륙 전체에서 90만 명 이상이 남들의 전쟁에 총알받이가 되어야 했다.

일본이 2차 세계대전 당시 한국인을 강제 징병과 징용하듯이 영국과 프랑스 등도 아프리카인들을 강제로 전쟁터로 몰고 갔다. 전쟁이 끝나면 토지나 자치권을 준다고 속이면서….

말라위 대사관에서의 비자발급 해프닝

▲ 국립박물관 1층 인류역사관에 전시된 고대 인류화석 모형.
ⓒ 김성호
아스카리 기념물을 지나자 바로 오른쪽에 말라위 대사관이 있었다. 1층 사무실에 들어가 비자를 문의하니 여자 직원이 "월, 화, 금요일만 비자신청을 받는다"며 내일 오란다. 내가 간 날은 목요일이었다. 설령 내일 비자를 신청해도 다음 주 월요일이나 되어야 나온단다. 내일 당장 타자라 열차를 타고 가야 하는데 정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잔지바르에서 이틀 먼저 온 것도 바로 말라위 비자를 받기위한 것이었다. 걱정을 하면서 되돌아서는데 1층 입구 사무실 팻말에 '잠비아(Zambia)'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다시 돌아서 여직원에 "여기가 잠비아 대사관이냐, 말라위 대사관이냐"를 묻자 그녀는 잠비아 대사관이라고 대답했다.

말라위 대사관은 2층에 있단다. 엉뚱하게 다른 나라 대사관에서 비자신청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잠비아 대사관과 말라위대사관이 같은 건물에 1,2층으로 나눠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해프닝이었다. 그래도 잠비아 대사관이라는 글자가 눈에 띄어 다행이었지, 그냥 되돌아갔으면 큰일 날 뻔했다.

2층으로 올라가자 말라위 대사관의 여직원이 나와서 대기실 의자에 앉게 했다. 여직원이 "왜 말라위를 가려고 하느냐"고 물어 "말라위 호수를 보러간다"고 하자 기다리라고 한다. 다시 돌아온 여직원은 "비자 요금은 70달러"라며 비자신청서를 건네주며 작성하라고 한다.

내가 "5일 동안만 머물 건데 비자요금이 너무 비싸다"고 하자 말라위 비자는 체류기간과 상관없이 무조건 70달러란다. 다른 아프리카 국가의 비자요금은 말라위와 보츠와나(100달러 상당)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30~50달러였다.

100달러짜리를 내자 대사관에 잔돈이 없다며 행정업무를 보좌하는 남자 직원을 소개시켜 주며 근처의 환전소에 가서 잔돈으로 바꿔 오라고 한다. 남자 직원을 따라 인디아 스트리트(India St.인도거리)에 있는 환전소를 갔는데 인도인이 하는 곳이었다. 말라위 대사관과 거래하는 환전소 같았다.

동남아시아에서 중국계 화교들이 상권을 장악하듯이 아프리카에서는 인도인들이 호텔과 식당, 환전소 등 현금장사가 되는 분야는 확실히 장악하고 있었다. 인도인들이 많이 살다보니 인디아 거리 뿐 아니라 인도의 여성총리였던 인디라 간디 거리 등 인도와 관련된 거리 이름도 많았다. 사모라 거리는 현대적 사무실 빌딩들이 늘어서 있고, 인디아 거리는 이름대로 인도인 상점들이 몰려 있었다.

환전을 하고 돌아와 비자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대기실에 앉아 있는데,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말라위 본국의 국회 대정부 질문 장면이 생중계되고 있었다. 우리나라처럼 국회의원이 질문하면 각 부처의 장관이 일문일답식으로 답변하는 것은 똑 같았다.

내가 "지금 생중계하는 것이냐"고 묻자 여직원은 "말라위 본국에서 열리는 국회 회의장면은 위성방송을 통해 모든 재외공관에 실시간으로 중계된다"고 말했다. 50여분 정도 지나자 1개월짜리 비자가 나왔다.

탄자니아 박물관에 있는 기린그림에 얽힌 이야기

▲ 탄자니아 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아프리카산 기린도.
ⓒ 김성호
말라위 비자를 받은 나는 국립박물관을 찾아갔다. 말라위 대사관에서 위쪽으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커다란 나무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박물관은 2층짜리 아담한 건물이었다.

박물관은 본 건물과 뒤쪽의 별관 건물로 나눠져 있었다. 본 건물의 2층은 탄자니아의 역사를 보여주는 역사전시관이었고, 1층은 인류의 진화과정을 소개하는 인류전시관이었다. 그리고 본 건물 뒤쪽에 있는 별관 건물에는 생물학관과 인종관이 있었다.

제일 먼저 간 2층 역사전시관에는 13~16세기에 가장 번창했던 킬와 문명과 11~14세기의 중세시대 당시의 동아프리카 무역상황, 유럽 탐험가들의 소개, 탄자니아 독립과정과 니에레레 초대 대통령의 우자마(가족공동체)운동 등 현대사가 소개되어 있었다. 왼쪽 끝부분에는 아랍풍의 정교한 조각이 새겨진 나무대문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15~16세기 킬와 시대의 대문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그 옆으로는 아랍풍의 모자를 쓰고 콧수염을 기른 사람이 기린의 고삐를 잡고 끌고 가는 장면의 그림이 걸려 있다. 지금 케냐에 속해 있는 동아프리카 말린디 왕국이 15세기 초 선물로 준 기린을 중국의 명나라 황제 영락제에게 바치는 장면을 비단 위에 그린 그림의 사본이다.

박물관의 설명에는 '이 기린은 1414년 동부아프리카에서 중국 황제에게 준 선물을 바치는 장면을 비단에 그린 그림'이라면서 '1417~1419년 사이에 중국 배가 최초로 동아프리카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쓰여 있었다.

'조공기린'으로 알려진 이 그림의 기린은 애초 동아프리카의 말린디 왕국의 사신이 새로 즉위한 벵골국의 술탄에게 선물로 가져온 것이었는데, 벵골국에서 다시 중국 황제에게 선물한 것이다. 1413~15년 사이에 제 4차 항해에 나섰던 정화 함대가 벵골에서부터 배에 싣고 중국으로 가져왔다. 정화 함대가 직접 동아프리카 말린디에 도착한 것은 제5회 항해 때인 1417~19년 사이이다.

당연히 조공기린 그림은 아프리카에서 그린 것이 아니라, 정화 함대가 갖고 와 1414년 황제에게 바쳐는 장면을 중국 화가가 그린 것이다. 중국국립박물관에 있는 '기린도'라고 이름 붙여진 이 그림에는 '영락12년'이라는 연호가 적혀 있어 1414년(영락제 재위 1402년)에 그린 것을 알 수 있다. 이 기린은 아프리카 산인데, 그림에는 '벵골(방글라데시)로부터 조공으로 받쳐진 기린'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1417년 동아프리카에 최초로 도착했다는 배는 바로 '중국의 콜럼버스'라 불리는 정화 제독의 함대이다. 환관 출신으로 아버지부터 이슬람교도였던 정화는 명나라 황제 영락제의 명을 받아 모두 7차례에 걸쳐 정크선을 타고 인도양과 아라비아해를 거쳐 동아프리카까지 진출했다.

중국의 정화 함대가 최초로 세계 일주를 했다는 황당한 책

나는 아프리카를 여행하면서 남아공 요하네스버그 공항에서 재미난 책을 한 권 샀다. 영국 해군장교 출신으로 아마추어 역사가인 가빈 멘지스(Gavin Menzies)라는 사람이 쓴 <1421-중국이 세계를 발견한 해>(2003.영국의 반탐출판사)라는 제목의 영문책이었다.

저자는 중국의 정화 함대가 1421년에 동아프리카 뿐 아니라 서아프리카를 거쳐 이탈리아 탐험가 콜럼버스 보다 70여년 먼저 신대륙을 발견하고, 포르투갈 탐험가 마젤란 보다는 100여년 앞서 최초로 세계 일주를 했다는 놀라운 주장을 하고 있었다.

내 눈길을 끈 것은 정화 함대의 세계일주 근거의 하나로 우리나라 지도를 내세우고 있는 것이었다. 다르에스살람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기린도 뿐 아니라 우리나라 조선시대 초기 세계지도인 <강리도>를 중요한 근거로 제시하고 있었다.

15세기 초 만들어진 일본 류코큐 대학 소장의 <강리도>에 희망봉 등 아프리카의 동서부 해안선이 정확하게 그려진 것은 정화 함대가 직접 아프리카 전역을 항해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논리이다. 저자는 한국의 지도가 일본보다 훨씬 크게 그려진 것은 '(한국의)민족적 자부심과 전통적인 일본과의 경쟁의식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었다.

<강리도>는 원래 이름은 <역대제왕혼일강리도>로써 1403년 조선 태종 때 이회가 그린 것으로 명나라 영락제 즉위 기념으로 보냈으나 원본은 사라지고 현재 남은 일본 류코큐 대학 소장본은 1420년 이후 크게 수정된 사본이다.

▲ 가빈 멘지스의 책 <1421> 표지를 찍은 사진.
ⓒ 김성호
멘지스는 <강리도> 이전에 유럽에는 아프리카 지도를 그린 것이 남아 있지 않으며, 그 이후 유럽에서 나온 초기 세계지도는 정화 함대가 탐험한 지도를 베끼거나 짜깁기 한 것으로 보고 있었다. 정화 함대가 최초로 세계 일주를 했다는 주장의 근거인 셈이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애초 이회가 그린 <강리도> 자체가 자신의 탐험의 결과가 아니라 이미 중국과 일본, 우리나라에서 제작된 여러 지도들을 종합해서 그린 것이라는 점이다. 당연히 <강리도>의 참고가 되었을 중국의 아프리카 지역이 포함된 세계지도도 정화의 탐험 결과가 아니라 이미 유럽이나 서아시아, 인도 쪽에서 나온 지도를 짜깁기 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유럽이 중국의 아프리카 지도를 베낀 것이 아니라, 거꾸로 중국이 유럽의 것을 베꼈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정화의 대항해 이전에 이미 이탈리아 탐험가 마르코 폴로는 1273년 중국을 방문해 17년간 머물렀고, 모로코의 이슬람 여행가 이븐 바투타도 1345년 중국에 도착했다.

이들 보다도 더 오래 전부터 동서간에는 많은 교류가 있어 왔기 때문에 서로의 지도도 이미 소통되었다고 봐야한다. 역사학자들도 유럽과 중국에서 세계지도를 만들 때 상대의 것을 서로 베끼거나 짜깁기해서 종합적으로 그리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고 한다.

멘지스의 주장은 역사적으로 증명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가설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이 책은 중국 명나라 때의 대항해에 대한 상상력과 모험심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탐정소설 읽듯이 여행하면서 읽기에는 재미난 책이었다.

아프리카 해안의 다우선과 중국 정크선의 만남

어떻든 중국이 아프리카까지 진출함으로써 나무로 만든 돛배(목조 범선)인 정크(Junk)선 무역과 이슬람의 낮고 큰 삼각돛을 단 다우(Dhow)선 무역이 인도양을 고리로 하여 연결되었다. 동서를 잇는 '바닷길'이 연결된 것이다. 이 바닷길은 도자기를 주로 수출했다하여 '도자기의 길(Ceramic Road)'이라 불렸다.

13~14세기 몽골제국 시대의 동로마 제국 비잔틴제국과 중앙아시아 및 몽골의 초원길을 거쳐 원나라의 베이징까지 연결되는 이른바 '초원의 길(Steppe Road, 또는 은의 길(Silver Road))'과 오래전부터 지중해를 거쳐 중앙아시아의 사막지대를 거쳐 당나라의 장안(시안)을 연결하던 '실크로드(Silk Road, 비단길)'에 이어 '바닷길'이 열림으로써 바다와 육로의 사막지대, 초원지대가 모두 동서양으로 연결되었다.

다우선과 정크선의 만남. 아프리카와 아랍의 인도양을 대표하던 다우선과 동아시아의 태평양을 대표하던 정크선의 만남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문물과 문명의 본격적인 교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삼각형의 세로돛을 단 다우선과 여러 개의 사다리꼴 세로돛을 단 정크선은 자신들이 싣고 온 '상아와 향신료' 와 '도자기와 비단'을 맞바꾸었다. 계절에 따라 규칙적으로 불어오는 인도양의 계절풍(Monsoon)이 다우선과 정크선의 운항에 도움을 주었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기린그림 속에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교류역사가 담겨 있다. 기린그림 옆에는 물병과 접시 등 중국 명나라 때의 청자 도자기가 중국과의 교역을 실증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아프리카 여행 중 중국의 도자기는 11세기부터 15세기까지 융성했던 짐바브웨 쇼나 부족의 그레이트 짐바브웨 돌 유적지에서도 볼 수 있었는데, 정화 함대의 대항해 무렵에 활발했던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교류를 보여준다. 아프리카와 중국의 교역에서는 중간에서 아랍 상인들이 중요한 중개역할을 했다.

기린그림 옆에는 '유럽인들이 도착하기 전 동아프리카 무역투르'라는 제목의 도표가 서기 1000~1300년 사이 인도양을 둘러싼 아프리카와 아랍, 아시아사이의 주요 수출품과 무역항을 설명하고 있다.

전시실에는 데이비드 리빙스턴과 리처드 버튼, 존 해닝 스피크, 스탠리 등 탐험가와 한스 마이어 등 등산가들의 탐험활동 등에 대한 설명과 탐험 기구 등도 전시해놓았다. 눈에 띄는 것은 역시 리빙스턴이 사용하던 나무상자 가방이었다.

리빙스턴은 “1873년 잠비아의 방궤울루 호수(Lake Bangweulu) 남쪽 치탐보(Chitambo)에서 사망했다”며 설명하고 그의 시신을 바가모요까지 옮긴 충성스런 아프리카인 신하였던 추마(Chuma)와 수시(Susi)의 사진도 전시해놓고 있었다.

2충 전시관을 구경하는 데, 탄자니아 초등학생 50여명이 교사의 인솔로 박물관 구경을 와서 신기한 듯 열심히 보고 있었다. 이 전시관에서는 또한 니에레레 대통령에게 주민들이 선물한 사자의 박제품도 볼 수 있다.

1층 전시관으로 내려오자 중앙에 오래된 롤스로이스 자동차가 전시되어 있었는데, 영국 식민지 시대에 총독이 타다 독립 후에는 니에레레 대통령이 사용했다고 한다.

인류역사관인 1층은 올두바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것과 같은 1959년 발견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보이세이와 호모 에렉투스의 두개골 모형 등을 전시해 놓았고, 인류의 진화과정에 대해 상세히 설명을 해놓았다. 역사관에서는 "현재 1천1백만 년~5백만 년 전 사이에 '커다란 잃어버린 고리(Big Missing Link)'가 존재하고 있다"며 인류 진화과정의 지속적인 연구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었다.

3억 5천만년 전에 지구상에 나타난 '살아있는 화석'

▲ 탄자니아 국립박물관 생물학관 수족관에 보관되어 있는 실라칸스.
ⓒ 김성호
▲ 살아있는 모습의 실라칸스를 그린 이미지 그림.
ⓒ 위키피디아
뒤쪽의 별관 건물에도 작은 전시관이 있었다. 왼쪽은 생물학관으로 다양한 동물과 새, 뱀, 바다고기, 식물 등을 전시해 놓고 있었다. 산호초도 있고, 도마뱀, 곤충 등도 전시되어 있는데, 단연 관심을 끄는 것은 수족관에 누렇게 보존되어 있는 '실라칸스(Coelacanth)'다. 3억 5천만년 전에 지구상에 처음 나타난 그 모습 그 대로 살아가고 있는 '살아 있는 화석'으로 불리는 물고기이다.

실라칸스는 2억 3천만 년 전에 출현한 공룡보다 훨씬 오래전에 탄생해 지금까지 살아 있는,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척추동물이다. 지느러미가 팔이나 발처럼 뼈를 가지고 있어 다리처럼 발달되어 수심 600m에서 걸어 다니며, 아가미 호흡과 허파 호흡도 할 수 있어 물고기인 어류에서 개구리 같은 양서류로 진화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양서류는 어릴 때는 아가미로 수중호흡을 하면서 물에서 살고, 성장하면 허파로 공기호흡을 하면서 뭍에서 사는 생물에 대해 물과 육상 두 곳에서 산다는 의미에서 양서류라고 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실라칸스는 어류보다는 육지 동물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실라칸스는 공룡이 멸망하던 6천 5백만 년 전 같은 시기에 멸종된 것으로 추정되었으나 지난 1938년 인도양의 코모로 제도에서 처음으로 살아 있는 채로 잡힌 것이 남아공에서 발견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실라칸스에 대해 '살아있는 화석'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3억 5천만년이란 긴 세월 동안 진화하거나 멸종하지 않고 애초 모습 그대로 살아 있는 고대 어류이기 때문이다. 실라칸스는 동아프리카 해안과 마다가스카르사이의 코모로 제도 근해에서 주로 서식하고 있다. 1998년에는 코모로 제도에서 1만km 이상 떨어진 인도네시아에서도 새로운 종의 실라칸스가 발견되기도 했다.

탄자니아에서는 2003년 처음으로 실라칸스가 잡힌 이후 그해 만 모두 22 마리가 잡혔다.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실라칸스는 "킬와 근처의 송고 음나라(Songo Mnara) 해변의 해저 100m에서 발견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었다. 크기가 무려 132cm이고 무게도 40kg이나 된다.

실라칸스는 보통 사람과 같은 80~100년을 산다. 누렇게 박제되어 수족관에 보존되어 있는 실라칸스를 보니 오랜 세월 아무런 진화도 거치지 않고 그대로 생존해왔다는 것이 놀랍다.
수많은 생물들이 탄생과 멸종의 과정을 거치면서 지구상에서 사라졌고, 인간의 역사도 600만 년 밖에 안 되는데, 실라칸스는 3억 5천만년이라니….

이 실라칸스를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서울 여의도 63빌딩 수족관이다. 지난 1985년 아프리카 코모로 공화국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방문할 때 우정의 선물로 준 것인데, 63빌딩 수족관에서 보관해 일반에게 전시하고 있다.

별관의 오른쪽 전시관은 인종학관으로서 다양한 부족의 생활상과 의복, 전통악기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별관 중앙 복도에는 노예역사에 대한 설명과 노예를 묶던 쇠사슬을 전시해 놓아 노예의 아픔을 상기시키고 있었다. 박물관 가운데 정원에는 1998년 8월 다르에스살람 주재 미국 대사관 폭발사고로 죽은 사람들을 추모하는 기념조각을 설치해 놓았다.

박물관을 구경하는 데 걸린 시간은 무려 4시간. 내가 어느 나라의 수도를 여행할 때 제일 먼저 가는 곳은 바로 박물관이다. 박물관에는 그 나라의 역사와 생활, 미래가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여행의 시작은 박물관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그 나라의 역사를 알게 되면 그 나라가 달리 보이게 된다.

케냐에는 바틱, 탄자니아에는 팅가팅가 그림이 있다

▲ 탄자니아의 팅가팅가 그림.
ⓒ 아프리카 현대미술관
박물관 옆의 커다란 나무 밑에 앉아 휴식을 취한 뒤 근처 음식점에서 늦은 점심을 바비큐 고기 같은 니아마 초마(Nyama Choma)로 때웠다. 박물관 주변의 도로를 걸으니 시원하다.

박물관 앞의 도로는 '샤반 로버트 거리'인데, 하늘을 가릴 정도로 커다란 가로수가 양 옆으로 빽빽이 들어차 있어 산보를 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이 거리는 스와힐리어로 작품을 쓴 탄자니아의 가장 대표적인 시인이자 작가인 샤반 로버트(Shaaban Robert.1909~62)의 이름을 딴 것.

박물관 옆의 식물원을 대충 둘러보고 니에레레 문화센터로 향했다. 식물원에는 자카란다 나무와 불타는 나무인 공작새나무(Royal Poinciana, Flamboyant Tree), 히비스커스, 부겐빌레아 꽃 등이 있었다.

니에레레 문화센터로 가는 데 골프장이 이었다. 골프장 옆에는 최고급 로얄 팜(Royal Palm) 호텔이 있고, 호텔 옆에 '니에레레 문화센터'가 자리잡고 있었다. 니움바 야 사나(Nyumba ya Sanaa)라고도 하는데 스와힐리어로 ‘예술의 집’이라는 뜻이다. 부겐빌레아 꽃이 막 피기 시작한 입구에는 '니에레레 문화센터'라는 팻말과 동물 모양의 대문 장식이 이 집의 성격을 말해주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테이블보와 바구니, 대나무 죽 공예품 등 전통 조각품과 그림 등을 파는 을 파는 가게가 늘어서 있었다. 나 이외에는 손님이 하나도 없는 등 조금 썰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목 공예품을 파는 여자직원은 "전통공예품을 직접 만드는 소규모 생산자들의 판매를 돕기 위한 것"이라며 모두 손으로 직접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내가 동물과 사람을 재미있게 그린 그림을 가리키며 "무슨 그림이냐"고 묻자 여직원은 "외국인들이 좋아하는 팅가팅가(Tingatinga) 그림"이라고 말했다. 팅가팅가는 한 가지 배경색에 동물과 사람을 동화처럼 단순화해서 그린 그림으로 아프리카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팅가팅가라는 이름은 이런 방식의 그림을 처음으로 그린 에드워드 사이디 팅가팅가(Edward Saidi Tingatinga. 1932~1972)의 이름을 딴 것.

인간에게 친숙하게 다가오는 동물 그림인데다 색상도 강렬한 팅가팅가는 잔지바르 섬에서 자주 볼 수 있었다. 잔지바르 해안가를 따라 길거리 화가들이 직접 그림을 그려서 팔고 있었다.

탄자니아에 '팅가팅가'가 있다면 케냐에는 '바틱'이 있었다. 케냐의 보마스 오브 케냐를 구경한 뒤 숙소로 돌아오다 쇼핑몰인 야야센터에 들렀는데, 마침 일요일이어서 마사이 장터가 열리고 있었다. 일요일마다 열리는 아프리카식 7일장.

마사이족들이 만든 수공예품을 주로 팔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천에다 마사이족들을 그린 액자용 그림들도 있었다. 마사이족들은 천에다 그린 그림을 바틱(Batik)이라고 했다. 바틱은 양초와 염료를 이용해 색채가 스며드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구분해 그린 그림을 말한다.

문화센터 게시판에는 금요일마다 전통음악과 무용공연을 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고, 옆에는 레스토랑도 있었다.

해안가를 걷는 항구 도시의 즐거움

▲ 마사이족을 그린 케냐의 바틱 그림.
ⓒ 고정해<아프리카클럽 바오밥>
나는 니에레레 문화센터에서 나와 오하이오 거리를 따라 항구 쪽으로 무작정 걸어갔다. 다르에스살람 항구는 내륙 깊숙이 바다가 들어와 자연적인 방파제 역할을 해주는 천혜의 만이었다. 항구로서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항구를 따라 쭉 뻗은 큰길인 키부코니 프론트 도로를 따라 위쪽으로 올라가니 왼쪽에 파란색 유리의 8층짜리 킬리만자로 켐핀스키 호텔이 최고급의 시설을 드러내고 있었다. 야자수를 비롯한 가로수가 우거진 해안가 도로를 따라 20여분 걸어가자 항구 주변으로 노천카페와 식당들이 즐비하고, 좌판이나 리어카에서 과일과 음료를 파는 노점상들도 많았다. 리어카 노점에서는 라디오와 손톱 깎기, 건전지, 전자제품 등을 팔고 있었다.

킬리만자로 호텔 옆으로는 외교부와 법무부, 교육부 등 행정부처가 대통령 집무실 주변으로 늘어선 행정부처 거리였고, 대법원 등 사법부 건물들도 보였다.

키부코니 프론트 도로와 오션 도로가 만나는 만 입구에는 골드스타 페인팅회사(Goldstar Paintings)와 갤럭시 페인팅회사(Galaxy Paintings)가 각각 마주보는 위치에 신축건물을 짓고 있었다. 두 회사가 같은 계열회사인가, 아니면 왜 이렇게 바로 옆에다 거의 똑같은 높이로 빌딩신축 경쟁을 하는지 모르겠다.

이곳에는 잔지바르 행 여객선 나루터와 달리 건너편의 키감보니 지역과 남부 해안지역으로 가는 여객선 나루터가 따로 있었다. 대형 여객선이 사람 뿐 아니라 자동차도 가득 싣고 떠나고 있었다. '글로벌 컨테이너 라인(GLOBAL CONTAINER LINES)'라는 이름의 대형 수출 화물선도 컨테이너를 가득 싣고 항구를 떠나고 있었다. 이들과 달리 항구로 들어오고 작은 배들도 보였다. 들어오고 나가는 배들을 보니 항구이다.

고기냄새가 나는 아프리카 수산시장

▲ 콘테이너를 싣고 다르에스살람 항구를 떠나는 대형 수출화물선.
ⓒ 김성호
항구를 돌아 조금 올라가자 붉은색의 1층짜리 지붕 대여섯 채가 있는데, 수산시장이었다. 입구에서부터 특유의 고기 비린내가 코를 쑤셨다. 오후 늦은 시간인데도 아직 팔지 못한 물고기를 팔기 위해 많은 상인들이 손님을 부르고 있었다.

어떤 상인은 시멘트 판매대에서 물고기의 비늘을 칼로 벗기거나 물고기의 배를 잘라 창자와 내장을 가려내고 소금을 쳐서 저장하는 모습도 보였다. 상하지 않기 위해 간고등어처럼 만드는 것이었다. 어떤 가게에는 아직도 살아서 파닥파닥하는 싱싱한 물고기도 있었고, 파란색과 노란색의 독특한 물고기도 보였다.

건물도 그렇고 수산시장이 환경은 생각보다 깨끗했다. 수산시장 뒤쪽으로는 화려한 모양의 불가사리인 스타피시(Star Fish)라는 고기와 소라껍질, 조개껍질, 거북껍질 등을 장식용으로 판매하는 가게가 별도로 있었다.

어디나 그렇지만 수산시장은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아침 일찍 방문한다면 다우선에서 갓 잡아온 물고기를 내리는 장면과 아프리카 수산시장 특유의 분주하고 북적거리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수산시장 뒤쪽으로는 대통령집무실(State House)이 있었는데, 부통령 집무실은 시내 아스카리 기념물 근처에 있었다. 수산시장을 나와 처음 왔던 길을 따라 킬리만자로 호텔을 지나 계속 아래쪽으로 걸었다.

흰 건물에 붉은 색의 세모꼴 지붕과 뾰족탑이 있는 아자니아 프론트 루터 교회가 있고, 잔지바르 여객선사무소의 맞은편에는 역시 흰 건물에 붉은 색 지붕과 회색의 뾰족탑이 있는 성 요셉 성당이 눈에 들어왔다. 이 교회는 옛날 독일 식민지배 때 세워진 것으로 독일식 건물풍이 남아 있다.

킬리만자로 호텔을 중심으로 주변 지역은 해안가가 바라보이는 최고의 장소인데, 건물이나 집들은 대부분 지붕이 붉은색이서 독일과 영국의 유럽식 건물풍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남아공의 요하네스버그 주변의 고급 주택가들도 영국의 영향으로 지붕들이 대부분 붉은 색이었다.

다르에스살람은 케냐의 나이로비나 남아공의 요하네스버그와 달리 시내를 홀로 다녀도 크게 위험하지 않은 곳이어서 걷기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오래간만에 만끽한 '걸어서 도시 속으로 여행'이었다.

다르에스살람은 그리 크지 않지만 다양한 볼거리로 지루하지 않고, 특히 바닷가는 항구를 따라 난 도로를 걸어 다니면 길을 잃을 우려도 없어 걷기에 좋은 항구도시였다.

태그:#아프리카, #탄자니아, #다르에스살람, #실라칸스, #탄자니아 국립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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