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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하나] 1979년 어느 날 봉천동 카페의 녹음실

"1979년 여름, 메아리의 골수들은 우리의 노래들을 테이프에 담아 보급해보자는 계획을 세우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김민기 선배의 '공장의 불빛'이 이른바 불법 테이프의 놀라운 가능성을 일깨워준 지 불과 몇 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당시로서는 여러모로 위험천만한 작업이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가진 것이라곤 맨 몸뚱아리와 젊은 열정, 그리고 기타 몇 대가 전부이던 우리에게 그것은 매우 무모한 시도였음에 틀림없다. 노래와 반주야 늘 하던 식으로 몸으로 때운다 하더라도 우선 녹음할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명색이 상업적(?) 보급을 위한 첫 출발인데 서클룸에서 카세트 레코더로 녹음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때 내가 봉천동의 한 카페를 추천했다. 그보다 얼마 전 우연히 '라이브 가수 구함, 대학생 우대'라는 광고가 붙은 것을 보고 아르바이트나 해 볼까 싶어 김현민(경영78)과 함께 오디션을 받은 적이 있는 곳이었다. 물론 오디션에는 합격을 했지만 노동조건이 너무 형편없어서 아르바이트는 포기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열악한 녹음실이었지만 당시 우리는 그저 릴 녹음기에다 에코 효과를 빵빵 넣어가며 녹음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감격했었다. 이 카페의 정기휴일을 빌어 녹음을 했다. 16곡의 레퍼토리를 녹음하는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꼭 한나절이 걸렸다. 우리가 가진 악기라고는 기타와 하모니카가 전부였고 모자라는 부분은 코러스로 메웠다."(메아리 78학번 김창남)

[이야기 둘] 1981년 봄 '아침이슬'을 부르고, 또 부르고...

▲ 81년 제7회 메아리 정기발표회 팜플릿 표지
ⓒ 메아리
"공연 시작 2시간 전부터 서 있던 줄은 공연 전에 이미 200-300미터를 넘어섰다. 라운지에 무대를 꾸며놓고, 당시 있던 접이식 커튼 문의 한쪽을 열어 놓고 학생들은 질서 있게 입장을 했다. 그리고 기다리면서 노래를 부르고. 합창을 위해서 무대 바로 아래 앉아 도열해 있던 신입생인 우리는 그저 잔뜩 긴장한 채 떨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사회를 보던 79학번 노승종 선배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침이슬을 함께 부르면서 메아리 발표회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리고 '아침이슬'의 전주 트레몰로.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내 맘의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알알이 맺힌 설움이 눈물이 되어 이슬처럼 흐른다. 눈과 귀와 입을 막힌 채 자유를 구속당한 학창시절을 보내던 우리가 함께 노래를 할 수 있다는 감동 하나로 눈물이 가득히 흘러내린다.

공연을 끝낸 학생들은 헤어지기가 아쉬운 듯. '아침이슬'을 부르고, 또 부르고…. 이런 학생들을 도열해 있는 사복 깡패들이 기다리고 있고. 학생처 직원들과 형사들은 메아리 회장단 옆에 서서는 무언의 협박을 가하고 있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태에 잔뜩 긴장을 한 메아리 친구들.

이런 긴장은 당시 우리의 아지트와 다름없었던 일미집에서 고무 대야에 가득 담긴 막걸리를 밥공기로 퍼마시면서 10시간가량 계속된 애프터에서야 풀어질 수 있었다. 춤추고, 노래하고, 웃고, 울고, 떠들고…."(메아리 81학번 이창학)

[이야기 셋] 1987년 봄 '선동'하지 않겠다고 각서까지 썼지만

▲ 87년 메아리 정기발표회 팜플릿 표지
ⓒ 메아리
"각서까지 썼음에도 공연 여건은 상당히 열악했다. 물론 학교 측의 협조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스피커를 싣고 온 트럭이 교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돌아가는 바람에(당시는 공연 때마다 낙원상가에서 스피커와 앰프를 빌려 공연을 했었고, 스피커와 앰프는 '시위용품'이었기에 민감한 시기에 교문통과가 쉽지 않았다), 노천강당 지붕에 달린 조그마한 스피커와 부랴부랴 택시로 싣고 온 가정용 오디오의 스피커로 공연을 했다. 게다가, 서머타임제 시행으로 어두워지기까지에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열악한 여건에도 공연은 상당히 성공적이었고 각서대로 메아리는 결코 '선동'을 하지 않았다. 다만 공연이 끝나자마자 청중들 중 누군가가 나와 '선동'을 하였고, 메아리는 항상 그랬듯이 몇 초 후 마이크 전원을 껐다. 청중들은 스크럼을 짜고 노천강당을 빠져나가,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아무런 제재 없이 교문을 통과하여 신림동 녹두거리와 하숙촌을 돌며 밤중 시위를 했다."(메아리 85학번 이래호)

[이야기 넷] 1996년 메아리 공연의 변(辯)

"이제 이런 이야기들을 해보려고 합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억압과 미시권력들, 그리고 그 안에서 불안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통해서 동시대를 살고 있는 대학인들의 고민과 모습들, 우리가 지켜나가야 할 것들에 대해 풀어볼까 합니다.

전처럼 메아리의 공연에서 어떤 굉장한 논리적 전개나 극적 흐름을 기대하진 마십시오, 그리고 과격한 구호나 투쟁가 역시 기대하시기 힘들 것입니다. 이번 공연에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예전 같지 않게 매우 다양한 삶의 형태와 모습을 가지고 있는 우리의 관객들을 어떻게 하나의 공감대로 묶어줄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집회문화의 급격한 쇠퇴와 더불어 우리가 가지고 있던 관객들과 대중문예조직으로서 책임을 져야 하는 일반학우들과의 계속되는 괴리 속에서 두부류에게 좋아할 만한 것들을 하나씩 던져주는 것이 아닌, 한 공연을 통해 같이 고민하고 거기에서 해방감을 맛볼 수 있는 그런 공연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다시 한 번 여러분들의 또렷한 눈망울을 바라봅니다." (메아리 94학번 유성구)

[이야기 다섯] 1997년 드라이아이스에 전자기타까지

미국에서 귀국해서 처음으로 맞는 메아리 후배들의 공연이었다. 캠퍼스 안에서 생업을 잠시 잇고 있던 관계로 별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시간만 적절히 맞추면 참석할 수 있는 자리였기에 별 부담 없이 시간 맞추어 가을의 도서관 앞 잔디밭인 아크로폴리스로 향했다. 나이도 적지 않은 선배가 일찍 등장하는 것도 좀 그렇고, 예전만을 생각하고 도서관 앞쪽의 뒤편 자리 먼발치에서 공연을 지켜볼 마음으로 느지막하게 장소를 찾았다.

예전 몇 천 명이 가득 차서 공연을 관람하던 광장은 몇 백의 학생들로 소박하게 채워져 있었고, 가까이 앉아서 느낀 바로는 그나마 대부분이 공연출연진이나 관계자들의 지인들인 듯이 보였다. 밴드가 등장하고, 드라이아이스로 뿜어내는 연기에 전자 기타의 울림과 경쾌하고 생동감 있는 리듬….

안치환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가 울려 퍼지고, 여행스케치의 '시종일관'이 경쾌함을 뽐내었고, 갑자기 존 레논의 '파워 투더 피플(Power to the People)'이 조금은 어설프게 객석을 향한다. 꽃다발이 전해지고, 서로 즐거워하고 서로 응원하며 어느 면에서는 연주자와 관객의 공명을 충분하게 느낄 수 있는 시간이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늙수그레한 선배는 그저 이방인이 되어 버렸거나 무언가 선입견에 잘못된 기대를 하고 왔었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후배 관객들의 변한 감수성과 거대담론의 전통이 주는 굴레 사이에서 고민하고 어정쩡한 입장을 보일 수밖에 없는 후배들의 모습이 못내 안타깝기까지 했다고 하면 과년한 선배의 편견이었을까?

[이야기 여섯] 2007년 서른의 나이를 맞은 메아리

▲ 메아리 93년 공연
ⓒ 메아리
서울대 관악캠퍼스에 노래동아리 메아리가 그 얼굴을 세상에 드러낸 지 이제 올해로 서른 해를 맞는다. 참 많은 얼굴이 스쳐갔고,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강산이 세 번은 변하는 시절이니 간단할 것이라고 기대는 물론 못하지만.

열정을 지닌 20대의 대학시절을 노래와 함께 울고 웃고, 그렇게 젊은 날을 보낸 많은 젊은이들의 고향 같은 추억이 깃든 곳이 바로 메아리이다. 통기타 몇 대로 70년대에는 김민기, 한대수의 고뇌에 가득 찬 미국 포크 음악에 취해서 진보를 이야기하면서 시작했고, 격정의 80년대에는 노래 운동의 선두에 섰던 여러 창작 연행자들의 요람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메아리는 21세기에까지 변한 시대에도 지금의 젊은 영혼들에 새 힘을 불어 넣고, 그 열정을 북돋는 역할을 포기하지 않으며 그렇게 살아남아 있다. 그렇게 보낸 젊은 열정의 시간 중 어느 부분의 가치가 더하고 혹은 덜하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변화무쌍한 것만큼 형형색색으로 무게를 더해 온 시간들 각 순간순간이 모두 개인 개인에겐 무엇보다도 소중한 의미를 지는 시간이었음엔 틀림없기 때문이다.

세월의 무게를 그렇게 10년 단위로 꺾어서 꼭 기념하고 넘어가야 하는 일이냐고 묻는다면 굳이 무어라 대답을 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공연을 해서 무엇을 남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사실 무엇을 보여줄 수 있을지 알 수 없다는 것이 답이 될 것이다. 30년의 메아리를 한마디로 요약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정체성(identity)이 어떤 것이냐고 묻는다면 대답할 말이 없다.

하지만 메아리가 30년 동안 시대에 주어진 자기 역할에 대해서 고민하고 존재해 왔으며, 지금도 존재하고 있음을 축하하고 싶다. 70년대에서는 젊음의 열정과 진보에 대한 갈망을 그리고 지식인으로서의 고뇌를 포크 기타의 선율을 빌어 노래했고, 80년대에는 시대변혁에 대한 낭만적 갈망을 노래로서 외쳐댔다. 그리고 그 무게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대의 변화한 시대의 진보를 음악으로 표현하려는 생경한 움직임들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 메아리의 존재란 이런 의미가 아닐까?

30년의 생일잔치를 하려는 것이다. 이제 중년의 나이로 접어드는 메아리를 위해서 지금까지 메아리라는 요람을 거쳐서 사회에서 자기 역할을 하고 있는 동문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우리가 일구어온, 우리의 젊은 영혼을 송두리째 헌신하면서 열정을 음악으로 불살라왔던, 그 메아리의 나이 먹음을, 그리고 그 나이만큼의 듬직해짐을 축하하려 한다. 그렇게 축하하면서 메아리의 30년을 되돌아보려고 한다.

2007년 7월 14일 토요일 저녁 6시 서울 서대문 사거리에 위치한 문화일보홀은 적지 않은 수의 나이 먹은 젊은 영혼의 꿈들로 다시 넘실거리리라. 그 열정의 시절에 목 놓아 부르고, 눈물 흘리며, 혹은 환희에 부르던 그 노래들을 그 목소리로 나누는 소중한 시간을 꾸미려고 한다.

75학번 메아리를 창립했던 최고참 선배부터 2007년 현재 메아리를 지키고 있는 06-07학번 대학생들까지 모두 함께 무대를 채울 것이다. 세월을 훌쩍 넘어 20대 초반의 열정의 시절로 잠시 타임머신을 타고 가는 듯이 허공을 나르는 느낌은 그저 허황된 느낌만은 아니리라. 잊고 살았던 소중한 보물을 다시 찾아 보듬어 안는 듯한 두근거림. 이제 같이 나누려하니 설렘은 몇 배가 된다.

'서울대 메아리 30주년 기념음악회'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덧붙이는 글 | 이창학 기자는 메아리 81학번으로 고 김세진ㆍ이재호 열사의 추모곡 <벗이여 해방이 온다>를 비롯 <부활하는 산하> <사월 그 가슴으로> <귀례이야기> 등을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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