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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프
르네상스 시대 프랑스의 한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마르탱 게르의 귀환>에서는 가부장 사회와 종교가 강요했던 이분법적 '선택'이 가져온 한 여성의 비극적인 삶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유도 없이 가정을 버리고 자기만의 삶을 찾아 떠났던 무책임한 남편에게 가부장적 구조를 고수했던 당시 프랑스 사회는 그 여인의 모든 삶을 좌우할 권한을 위임한다.

자상하고 따뜻한 가짜 남편과의 사이에 딸 하나를 두었던 그 여성은 딸을 사생아로 남기지 않으려고 자신을 버리고 떠났다가 불구가 되어 돌아온 전 남편에게 사죄하며 복종한다. 가부장제를 등에 업은 법적인 남편은 오히려 당당하게 큰소리를 치며 아내를 훈계하고 자상했던 가짜 남편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다.

당시 유럽 사회만이 아니라 현대 한국 사회 역시 남성에게 모든 여성, 특히 기혼 여성의 삶을 종속시키고 있다. 그래서 가부장적 사회에 길들여진 많은 이들은 선택이라는 단어에 늘 ‘모’ 아니면 ‘도’라는 양가적 가치만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페미니즘 저널리스트 김신명숙이 페미니즘 운동의 선봉장의 역할을 접고 후방에서 따뜻하게 상처받은 이들의 상처를 싸매주고, 여성들의 하소연에 귀 기울이는 ‘사랑하는 언니’ 역할을 자처하여 쓴 신간의 제목은 여성주의가 지향하는 다양성을 함축한 <선택>이다.

우리가 늘 익숙하게 접해왔고 당연시했던 이것 아니면 저것, 둘 중에 하나라는 사고방식은 가부장제가 강요한 억지 선택임을 저자는 분명히 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마음을 열고 상처받은 여성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아픔을 함께 공감해주고 어깨를 토닥여주기는 하지만 그 어떤 명쾌한 결론도 직접 내려주지는 않는다.

다만 그는 잔잔한 목소리로, 그러나 힘을 실어 그동안 가부장제가 강요해왔던 길 외에 무수히 많은 다양한 선택지가 가부장의 틀 밖에 남아있음을 상기시킨다. 마당 밖으로의 행군은 두려움이나 사투가 아니라 자유의 날개를 달고 새로운 세상을 향해 비상하는 탁월한 선택임을 자각하는 것과 새로운 선택지를 향해 비상하는 실천의 용기는 개인의 몫인 것이다.

사실 글의 말미마다 ‘사랑하는 언니가’로 끝을 맺는 김신씨의 신작 <선택>은 기존의 그가 지향하던 페미니즘 운동의 방향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어 보인다. 김신씨는 그 이유를 대중 속으로 파고들지 못하는 페미니즘의 현 주소를 돌아보기 위해 페미니스트가 아닌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기 시작한 데서 기인한다고 고백한다.

현재의 모든 사회, 정치적 구조는 남성적 시각으로 남성들을 위해 만들어졌으며 그 구조 속에서 여성들은 여전히 부속물처럼 끼어 상처받고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채, 일어설 힘조차 없이 아파하고 있음을 간파한 것이다. 그래서 그 자신이 큰언니 같은 마음으로 여성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위로하고 격려해 주는 언니가 될 것을 자처한다.

어쨌거나 인생이라는 넓은 바다에 항해를 나온 여성들이 남성들이 쳐 놓은 여러 덫에 걸려 아파하고 당황해 길을 잃었을 때, 옥죄이는 덫을 피하는 방법, 상처를 치유하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해주며 따뜻하게 등을 토닥이고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갈 수 있는 용기를 더해주는 따뜻한 눈길을 지닌 이가 가까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축복된 일인가?

1장 나 여자-불안하게 떠도는 이방인, 2장 사랑-그 축복 속의 함정들, 3장, 성 외모-하나이지 않은 오르가즘을 찾아서, 4장 결혼-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5장 직업-남편은 잊어라, 6장 엄마되기- 해방된 엄마 행복한 아이 등 총 여섯 개의 장으로 나눠진 <선택>을 보며, 가부장제가 강요한 거짓 선택이 아닌, 진실한 선택의 기쁨과 위로를 마음껏 맛보기 바란다.

유령처럼 드리워진 가부장제의 그늘을 벗어나 날개를 펼치고 비상하도록 힘과 용기를 주고 자신감을 회복시키는 것이 저자가 의도한 정조준 목표였다면 이미 새로운 길을 떠난 경험이 있는 용기 있는 페미니스트 선각자 32명을 소개한 것은 ‘사랑하는 언니’로 변신한 저자가 상처받은 이 땅의 보통 여성들에게 건네는 자그마한 이벤트성 위로의 선물이 될는지도 모르겠다.

노예의 사슬처럼 몸과 마음을 옥죄이는 가부장제의 안마당에서 때로 주체적 자아를 꿈꾸었지만 마당 밖으로 나올 용기가 없었던 여성들여, 이제 우주아로 원의 중심에 선 당신 앞에는 '모'나 '도'라는 양가적 선택이 아닌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선택지가 놓여 있다는 한 가지 사실을 부디 잊지 마시라.

당신의 등 뒤엔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랑하는 언니들’이 당신의 행보를 따뜻한 눈길로 늘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도.

덧붙이는 글 | 선택/김신명숙/이프/11,000원


김신명숙의 선택 - 이프 여성경험총서 2

김신명숙 지음, 이프(if)(2007)


태그:#김신명숙,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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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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