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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어 교과서.
ⓒ 데니스 하트

한국에 오면 일상생활이 금방 달라집니다. 순식간에 저는 소수집단의 일원이 되고, 말과 글이 달라지고, 걸음걸이와 자세와 표정까지 바뀝니다.

처음 며칠은 간단한 인사말을 하고,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가게에 가서 빼빼로 하나 사먹는 데도 조금 더듬거립니다. 그러다가 한 주일쯤 지나면 조금 익숙해져서 길도 잘 물어보고, 식당에서 주문하거나 사람들과 간단한 대화하기 등은 별 문제 없이 할 수 있습니다. 한 달 이상 살다 보면 숙달되어 대부분 상황에서 별 불편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닙니다.

지금 이 기사를 읽는 분들은 한국어로 자유롭게 말하고 읽고 쓸 수 있을 것인데, 아마 어렸을 때부터 모국어로 배웠을 겁니다. 불행히도 저는 아주 어려운 방법으로 한국어를 배웠습니다. 어른이 되어서 제2의 언어(외국어)로서 한국어를 공부했거든요.

영어 어렵다고요? 한국어도 만만치 않아요

아실지 모르지만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들에게 한국어는 아주 어려운 언어입니다. 저한테 영어가 엄청 어렵다고 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똑같은 이유로 한국어도 절대 만만치 않습니다.

며칠 전 국제여름학교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미국 학생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학생은 한국말을 두 주일 동안 공부하고 나니 머리가 터질 것 같다고 하소연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언어가 있을 줄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는 거였어요.

저는 그 학생의 문제를 가슴 깊이 이해합니다. 처음 한국말을 배울 때 저는 "안녕하십니까" 같은 쉬운 말부터 배웠습니다. 그러나 두 주일쯤 지나자 오리무중을 헤매듯 혼란스러워졌습니다. 문장 하나가 저를 괴롭혔습니다. 그렇게 어렵고 그렇게 이해가 안 되고 복잡한 문장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아직도 그 끔찍한 문장을 기억합니다. 어떤 문장이냐고요? "사람이 자동차 안에 있습니다"였습니다!

이 문장을 붙잡고 한 시간이나 이해하려고, 해석하려고, 분석하려고, 무슨 뜻인지 알려고 끙끙댔습니다. 이 문장을 독해하지 못하면 그 수업에서 낙제하여 더 이상 한국어 공부를 못하고 때려치워야 할 것만 같았습니다.

"'사람이 자동차 안에 있다?' 으악~ 끔찍해"

그런데 같은 어려운 외국어를 배우는 사람들이라도 개인마다 습득능력에 조금씩 차이가 있는 모양입니다. 우리 반 친구 하나는 정말 한국어에 소질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그 친구는 자기가 아는 단어들을 아무렇게나 주워모아 만든 것 같은 문장을 지어서 우리를 웃겨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목이 말라요"란 말을 하고 싶었는데 "목을 먹어요"하는 식이었습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같은 언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들은 외국어를 배우면 똑같은 문법적인 오류를 저지르거나 말실수를 한다는 것입니다. 한국 학생들이 영어를 할 때, 영어를 모국어로 배운 사람들은 하지 않는 실수를 똑같이 하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한국 학생들은 '치킨(닭)'과 '키친(부엌)'을 자주 헷갈립니다. 우리는 자주 우리 선생님을 '생선님'이라고 불렀답니다.

문법적으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아마도 조사였던 것 같습니다. 항상 "집에 간다"고 해야 할 것을 "집이 간다"고 했어요. 우리말대로라면 집과 가게와 학교들이 늘 여행을 다닌 것 같았어요. "책이 읽어요" 같은 말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날짜와 시간은 쉬울 것 같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숫자를 세는 방법이 한 가지로 통일되어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시간 단위와 분 단위에 다른 방식을 사용한다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간혹 헷갈려서 "지금 십시 열다섯 분입니다"라고 반대로 말하곤 했지요.

학교에서 배운대로 말했더니 어색하네

외국인에게 언어를 가르칠 때 그 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쓰지 않는 표현과 어색한 문장들을 가르치는 일이 흔합니다.

예를 들어, 오랜 세월 동안 한국어 선생님들이 미국인들에게 "퍽"이라는 부사를 가르쳤는데 한국 사람들이 이 말을 쓰는 것은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칠 때를 빼면 말이죠. 결과적으로 지금 이 순간 외국인 수백 명이 "머리가 퍽 길어요" "밥이 퍽 맛있어요" 같은 말을 하고 있을 거예요.

외국인들에게 자기 모국어를 가르칠 때, 일상적으로 사람들이 말하는 방식을 가르치기보다는 이상적인 조건에서 구사할 완벽하고 건전한 모국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사람들이 실제로 이렇게 말했으면 하는 바람이 그런 가르침에서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옛날 제 한국어 선생님께서 "이것은 책이라고 합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라고 말하도록 가르쳤던 것이리라 짐작합니다. 나중에 한국에 와보니 한국 사람들은 보통 "이게 책이래요" "아이 뭘요" 같은 식으로 말하더군요.

처음에 한국에 왔을 때 저는 학교에서 배운 대로 만나는 사람마다 노인이나 아이나 할 것 없이 "처음 뵙겠습니다, 앞으로 지도 많이 해 주십시오"라고 정중하게 인사했지요.

▲ 한국어 공부 중인 미국 대학생들.
ⓒ 데니스 하트
한국말 하면 칭찬받는 미국인

처음에 말했듯이 한국에 오면 제 정체성도 바뀝니다. 미국에서 음식을 주문하거나 물건을 살 때 웨이트리스나 점원이 하는 말은 "감사합니다"라는 한 마디뿐입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같은 상황에서 웨이트리스나 점원들이 조금 놀라면서 "한국말 잘 하시네요!"라고 칭찬해줍니다.

칭찬받으면 기분은 좋지만, 사실 제가 한국말을 그렇게 잘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 사람만큼 하려면 아직 한참 멀었거든요. 그런데 날이면 날마다 빼빼로를 살 때마다 이렇게 칭찬을 듣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제가 한국어를 잘해서 칭찬하는 게 아니라 외국인이 한국어를 하는 것이 인상적이어서 칭찬하는 거지요.

그렇지만 외국인이라는 게 항상 유리한 것은 아닙니다. 오래 전, 시골의 구멍가게에 물건 몇 가지를 사러 들어갔는데 주인아주머니가 제 말씀을 못 알아듣는 것이었습니다.

주인아주머니가 옆에 있던 다른 아주머니에게 "저 미국 사람이 뭐래요?"라고 물었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제가 한 말을 그대로 되풀이했고, 주인아주머니는 그 물건을 찾아주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시 이런저런 물건이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주인아주머니는 또다시 "인제 또 뭐가 필요하대요?"라고 두 번째 아주머니에게 물었습니다. 그 아주머니가 다시 제가 한 말을 되풀이했습니다.

제가 가게 문을 나설 때 주인아주머니가 두 번째 아주머니를 향해 "거참 이상도 하다, 저 사람 하는 말이 꼭 한국말 같아"라는 것이었습니다.

비슷한 일화로, 미국에서 제가 살던 동네 가까운 곳에 있는 양로원에 한국인 할머니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 할머니는 노인성 치매를 앓는 분으로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하셨는데 간호사들이 제게 가끔 전화로 한국말로 "참 잘하셨어요" "뜨거우니까 조심하세요" "추우세요?" "물 드실래요?" 같은 말을 어떻게 하는지 물어보곤 했습니다. 간호사들이 할머니와 저를 전화로 연결해주면 그 할머니는 저와 한동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우스운 것은 제가 직접 찾아가면 그 할머니는 제 말씀을 한 마디도 못 알아듣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미국 사람 얼굴을 보고 한국말을 기대하지 않으니까 옛날 그 시골 구멍가게 아주머니처럼 제 말이 할머니에겐 아예 접수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영어 어눌하면 무시당하는 한국인

외국인이 다른 나라에 가서 그 언어를 한다고 항상 칭찬만 받는 것은 아니더군요. 대학원 시절에 한국인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한국말을 아주 재미있고 똑똑하게 잘 하고 유머와 위트가 넘쳐 남들을 잘 웃기면서도 영어는 몇 년이 지나도 잘 늘지 않아 늘 어눌했습니다.

하루는 그 친구와 한국말을 하면서 재미있게 놀고 있었는데 미국인 학생 몇 명이 나타나 영어로 말을 바꿨습니다. 그러자 몇 초 전까지 그렇게 말을 잘하던 한국인 친구는 갑자기 더듬으며 쩔쩔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한 마디만 한국말을 해도 칭찬해주는 한국 사람들과 달리, 그 친구를 칭찬해주는 미국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같은 대학원생들조차 은근히 그 친구를 깔보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영어가 유창하지 못한 것이 지능의 결함이 있는 증거라도 되는 듯이 말입니다.

어떨 때는 마치 어린이에게 말하듯 그 친구에게 낮춰 말해 저를 화나게 했습니다. 외국어는 누구에게나 어려운 것인데 왜 영어를 못하는 외국인들은 그런 대접을 받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계속 절하며 전화받은 이유

한국어를 배운다는 것은 혀를 다르게 움직이는 방법을 훈련하는 것뿐 아니라, 신체 전체를 다르게 움직이는 법을 배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한국어로 대화할 때는 서있는 자세, 몸짓과 표정조차 영어로 말할 때와는 다르게 해야 합니다.

저는 한국어를 할 때면 영어를 할 때보다 태도가 훨씬 더 점잖고 정중해집니다. 윗사람을 만날 때는 자세를 똑바로 하고 양손을 앞으로 모읍니다. 옛날 한국어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절도 반듯하게 합니다.

한번은 어떤 아는 어르신과 통화하는데 옆에 있던 한국인 친구가 깔깔 웃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전화기를 잡은 채 계속 절을 했기 때문입니다(그런데 어떤 은퇴하신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은 부모님과 통화할 때 무릎을 꿇고 전화한다고 합디다).

언어는 문화라는 맥락 속에서 존재합니다. 한국어를 잘 한다는 것은 한국 문화를 잘 안다는 뜻입니다.

몇 년 전 제가 한국의 한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쳤을 때, 어떤 학생 하나는 저를 지칭할 때 절대로 "유(You)"라는 말을 쓰지 않았습니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자 그 학생은 "어떻게 아이들한테나 쓰는 '너'란 호칭을 감히 선생님을 부를 때 쓰느냐"고 했습니다.

저는 그 학생에게 한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단순히 명사와 동사를 배우고 문장을 구성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해당 언어를 쓰는 문화 속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라고, 미국 사람처럼 생각해야 영어를 잘 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얌전한 그 학생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후로도 절대로 제게 "유(You)"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올해 초 동양학 세미나를 하는 동안 저는 미국인 학생들에게 절하는 방법을 가르쳤습니다. 인사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학생들은 시키는 대로 잘 따라주었지만, 그 중 한 명은 어색해 하며 따라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미국 우월주의에 대한 강한 신념이 있던 그 학생은 마지막 3분의 1에 해당했던 한국학 부분 강의를 받아들이지 못해 불편해하더니 결국 수강취소를 하고 말았습니다.

"제가 서울에 가시겠습니다"

▲ 미국인 학생의 한국어 시험 문제. 초급 제2과.
ⓒ 데니스 하트
한국어를 할 때는 자세만 바꿔야 하는 게 아니라 사회적인 위계서열과 그 안에서 자신의 상대적인 위치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아주 높임말을 사용해야 할지, 보통 높임말을 할지, 아니면 예사 낮춤말을 할지 순간적으로 결정해야 하고, 얼마나 공식적인 어투로 얼마나 정중하게 얘기해야 할지 알아야 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이런 결정을 무의식중에 아무 어려움 없이 하겠지만 외국인에게는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저도 "신문이 언제 오시겠습니까?" "제가 서울에 가시겠습니다"처럼 존칭을 엉뚱한 데 갖다 붙이는 실수도 허다하게 했습니다.

아마 저는 아무리 해도 한국어를 모국어처럼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한국어를 배움으로써 저의 생각과 세계가 넓어지고 다른 문화를 이해하려는 태도를 배웠기에, 이만큼이라도 배운 것을 다행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며 제게 한국어를 가르쳐주신 선생님들과 친구들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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