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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업계 학교에서 국사와 세계사를 맡아 가르쳤던 일이 있다. 그때 내가 가르쳤던 제자들을 요즈음 길에서 만나 인사라도 받으면 미안하고 부끄럽다.

1980년도였으니까 당시 고등학교 교사들의 주당 수업은 33시간이나 35시간까지 맡았던 것 같다. 제대로 수업이 됐을 리 없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 사회과 선생님 하면 사회 과목을 전공해 자격증을 받은 교사다. 그런데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게 아니다.

예를 들면 경제학을 전공해도 일반사회 교사 자격증을 받고 법학을 전공해도 일반사회 교사 자격증을 받는다. 지금은 재교육을 받아 '공통사회'라는 이름으로 바뀌고 있지만 아직도 가르치는 과목은 크게 달라진 게 없다.

사회과라 하면 사회, 윤리, 국사, 정치, 경제, 지리, 세계사, 세계지리, 사회문화… 등 총 11과목을 말한다. 말이 사회과이지 지리를 전공한 선생님이 정치를 가르치거나 윤리를 전공한 선생님이 경제를 가르칠라면 자기 전공과는 거리가 멀다.

필자의 경우도 경제학을 전공하고 사회과 교사 자격증을 받았으니 학교 형편상 역사나 세계사를 맡기는 했지만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고등학교 때 배운 실력이 있겠지만 그 정도로 고등학교 수업, 특히 입시 과목이라도 가르칠라면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인문계의 경우 문제풀이까지 해야 할 경우 더더욱 그렇다.

'출근해서 교재연구나 하면 될 거 아닌가?'라고 쉽게 말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교사는 지식만 전달하는 게 아니다. 역사를 가르친다면 사건이 일어난 이유나 전개과정이나 그 사건이 미친 영향을 정리해 암기시키는 것으로 올바른 역사교육을 했다고 할 수 없다.

정작 중요한 것은 사관이나 역사의식을 갖도록 가르쳐 주는 게 지식을 암기시키는 일보다 훨씬 중요하다. 그런데 사회과 교사니까, 사회과목을 가르치라는데 '난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지 못한다. 또 교사가 모자라는 현실에서 내가 전공한 과목만 가르치겠다고 고집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런 경우도 있다. 만약 인문계 학교에서 어떤 사회선생님이 일주일에 18시간을 맡는다고 치자. 어떤 학교는 윤리 선생님이 어떤 학교는 역사 선생님이 더 많은 경우도 있다. 인사이동이나 교원수급 때문에 역사는 몇 시간이기 때문에 몇 분의 선생님이, 사회문화는 몇 시간을 해야 하기 때문에 몇 분의 선생님이 있는 게 아니다.

학년 초 사회과 선생님들이 모여 자신이 일년간 담당할 교과목과 시간을 조정한다. 같은 사회과 선생님이라도 어떤 선생님은 주당 15시간을 맡는가 하면, 어떤 선생님은 20시간을 맡는 경우도 생긴다. 정치 한 과목만 18시간을 맡는 경우만 있는 게 아니라, 정치는 17시간을 맡고 윤리를 한 시간 맡는 황당한 경우도 있다. 한 반 수업을 위해 교재연구를 따로 해야 하는 경우는 정말 힘들고 어렵다.

학교 현실을 이해 못 하는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일주일에 44시간을 근무하는데 18시간이나 20시간만 수업을 하면 그냥 반은 노는 게 아니냐고…' 실정을 모르는 사람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교사들의 근무 시간을 한 번 들여다보자.

교사들이 아침에 출근을 하면 학생출결부터 확인해야 한다. 결석을 한 학생이 없는지, 또 등교는 했지만 몸이 아파 수업을 하지 못하는 학생이 있는지…. 학생부에라도 소속된 선생님은 아침 출근하기 바쁘게 교문을 지키고 서서 두발이나 복장규정을 위반한 학생이 없는지, 또 지각을 하는 학생이나 무단 외출하는 학생이 없는지 지도해야 한다.

월요일은 아침부터 전체회의에 참가하야 하고(교사들의 회의는 전체회의 외에도 학년모임, 교과모임, 직원연수, 교원단체 모임, 운영위원의 경우 운영위원회 참석… 등) 수업시간이 마치면 쉬는 시간은 공문을 처리하는 시간이다. 업무분장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떤 선생님의 경우 하루 한 건 이상의 공문을 처리할 때도 있다.

지금은 인터넷으로 공문을 처리하기도 하지만 공문을 발송하기 위해 찍히는 도장만 해도 건당 4~5개나 된다. 협조부서에 협조 책임자의 도장을 받아야 하고, 부장, 행정실장, 교감, 교장까지 도장이 찍혀 행정실로 넘겨야 완결처리 되는데 내 공문 도장을 찍어주기 위해 기다리고 앉아 있는 부장이나 교장 교감은 없다.

쉬는 시간마다 4, 5층에서 1, 2층으로 뛰어다니다 시간에 쫓겨 정작 자신의 수업시간에 뒤늦게 들어가는 경우도 허다하다.

공문처리 뿐만 아니다. 혹시 전학을 가거나 전입하는 학생이 있을 경우 서류 처리를 해야 하고 수업시간에 태도가 불량하다며 교과 담당교사로부터 지도를 요청 받거나 학생부에 불려 다니는 학생을 챙기랴, 윗분들의 호출이며 수업준비를 하려면 엉덩이 붙이고 앉아 있을 시간이 없다.

정규수업시간이 끝나면 보충수업준비며 야간자율학습지도며 혹 학부모들 면담까지 겹치는 날은 만신창이 된다. 일년에 1학기 1, 2차 학력평가, 2학기 1, 2차평가를 위한 출제를 해야 하고 평가결과가 나오면 성적분포와 분석, 그리고 학생 개개인의 성적을 분석해 상담하기도 한다. 왜 선생님들이 가르치는 일보다 승진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가를 알 만하지 않은가?

교감이나 교장이 놀고 있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일단 교감이나 교장으로 승진만 하면 사회적 예우는 둘째 치고 수업부담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특혜(?)며 이렇게 시간에 쫓기며 공문처리며 학생생활지도며 정신없이 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교사들은 아이들을 잘 가르치는 양질의 수업이 그 첫 번째 임무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원의 법정정원이라도 확보해 주고 법정 수업시수라도 정해 수업시수를 줄여줘야 한다. 교재 연구도 제대로 할 수 없도록 쫓기면서 생활한다는 것은 그만큼 아이들에게 피해가 돌아갈 수밖에 없다.

법정 수업시수를 말하면 밥그릇 챙기기라며 욕하는 언론이 있지만 정말 교육현장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소리다. 이런 현실을 두고 교원평가를 하겠다고 칼을 빼들면 양질의 교육이 가능하기나 할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유 포터와 제 개인 홈페이지  김용택과 함께하는 참교육이야기(http://chamstory.net/}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태그:#교원평가, #교육실정,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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