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런을 치고 들어오면서 거수 경례를 하는 데이비스.
ⓒ 한화 이글스

'용병'의 사전적 의미는 보수를 받고 근무하는 군인이라는 뜻이다. 1998년 처음으로 프로야구에 '외국인선수제도'가 시행되었을 때, 외국인선수들은 보수를 받은 만큼 성적을 올려주지 못할 경우, 가차없이 내보내면 그만인 '용병'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용병은 급료나 기타의 계약조건에 따라 아군이나 적군을 가리지 않고 수시로 소속을 바꾸는 등 충성도가 떨어진다.'

백과사전에서 정의한 '용병'은 좀 더 냉혹하다. 초창기 일본 프로야구의 영향을 받아 외국인선수를 용병이라고 자연스럽게 부르면서 이들이 조금이라도 실망스러우면 가차없이 내보내는 것을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다.

야구에 대한 열정이나 팀을 위한 희생은 판단 기준이 될 수가 없었다. 이들은 무조건 잘 쳐야하고 잘 던져야 했으며 행여 아프기라도 한다면 바로 퇴출을 각오해야 했다. 초창기 국내 팬들은 외국인선수를 그렇게 규정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 가운데 몸을 사리지 않는 투지 넘치는 플레이로 인정을 받는 선수들이 생겨났고 때로는 몸싸움의 선봉에서서 팀을 보호하려 하는 모습으로 홈팬들의 열화와 같은 지지를 받는 선수들도 생겨났다.

단지 보수를 받고 뛰던 소모품으로 취급받던 '용병(傭兵)'에서 팀을 위해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용감한 '용병(勇兵)'으로 진화한 선수들이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진화한 대표적인 선수가 바로 제이 데이비스다.

5박자 두루 갖춘 데이비스

제이 데이비스(Gerrod Jay Davis)는 1989년 아마추어 드래프트에서 메이저리그 뉴욕 메츠의 12라운드(전체 320순위)지명을 받고 프로에 입문을 했다. 같은 해 메츠에 입단을 한 선수 중에는 17라운드(전체 450순위)지명을 받았던 마크 그루질라넥(캔자스시티 로얄스)이 있었다.

지명 당시 데이비스의 포지션은 투수였으나 입단 후에 외야수로 전향을 했다. 메츠 산하 마이너리그인 킹 스포츠에서 뛰었던 데이비스는 이후 멕시칸리그 등에서 활약을 했지만 결국 메이저리그에 올라가는 데 실패를 했다. 그리고 1999년, 한국 프로야구 한화 이글스의 지명을 받고 처음으로 한국 무대에 발을 내딛었다.

사실 데이비스는 한화가 아니라 삼성 유니폼을 입을 뻔 했다. 1999년 당시 삼성의 감독이었던 서정환 감독은 1순위로 데이비스를 염두에 두고 있었으나 결국 내야 수비를 볼 수 있는 빌리 홀로 마음을 바꿨다. 데이비스와 이글스와의 인연은 그렇게 극적으로(?) 시작되었다.

데이비스는 투수 출신답게 강한 어깨를 가지고 있었으며 장타력을 겸비한 타자였다. 게다가 빠른 발을 가지고 있었으니 이른바 '5 TOOL플레이어 (파워·주루·정확성·수비·송구력을 모두 갖춘 선수)'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선수였다.

시즌이 시작되고 데이비스는 같은 해 한화에서 뛰었던 또 다른 외국인선수 다니엘 로마이어와 함께 폭발적인 타격을 선보이며 한화의 타선을 이끌었다. 특히 데이비스는 올스타전에 매직리그 외야수로 뽑혀 출장을 했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한국야구 무시하는 오만방자한 선수"

그러나 데이비스는 통제하기 힘든 이른바 '악동'으로 소문이 난 선수였다. 경기 중 데이비스는 불같이 화를 자주 냈다. 스스로에게 화를 낸 것이라고 하지만 팀 조직력에 악영향을 끼치는 행동이었다.

게다가 불성실한 태도로 늘 언론의 도마 위에 올랐으며 당시 한화의 두 외국인선수들이 코치나 감독에게 충고를 한다는 언론의 보도가 나가면서 한국 야구를 무시하는 선수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당시 미국에 있었던 박노준 해설위원은 이 소식를 듣고 "한국야구를 무시하는 오만방자한 행동에 화가 치밀어 견딜 수 없다"고 말했다.

통제하기 힘든 선수였지만 1999년 데이비스는 172개의 안타와 .328의 타율, 30개의 홈런, 106타점, 35도루를 기록하는 눈부신 성적을 거두며 한화가 92년 이후 7년만에 다시 한국시리즈에 올라와 창단 첫 우승을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1999년 데이비스는 외국인선수 최초로 30홈런-30도루를 기록하기도 했다. 비록 '악동'이었지만 실력만큼은 최고였다.

이전 시즌까지 2년 연속 7위에 그쳤던 한화의 우승을 이끈 데이비스는 외국인선수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깨닫게 해준 선수였다. 데이비스는 귀하신 몸이 되어 한화와의 재계약에 성공을 했다. 이후 2002년까지 4년 동안 데이비스는 평균 3할에 20홈런 80타점 이상을 해주는 변함없는 활약을 펼쳤지만 악동, 게으름뱅이 등 '불성실'의 대명사라는 꼬리표가 항상 따라 다녔다.

결국 2002년 시즌이 끝난 후 한화는 당초 재계약 대상자였던 데이비스와의 계약을 포기했다. 한화의 전력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선수였지만 한화는 데이비스의 재계약 요구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게 데이비스는 한국을 떠났다.

복귀한 데이비스, '이글스를 위한 경례'

2003년 시즌이 끝난 후 한화는 고심 끝에 비록 악동일망정 실력만큼은 검증이 된 데이비스를 다시 불러들이기로 결정 한다. 그러나 35살의 나이에 다시 한국으로 복귀한 데이비스는 이전의 악동 데이비스가 아니었다.

한때 불성실의 대명사였던 데이비스는 팀 훈련에 일찍부터 나와 누구보다도 열심히 훈련을 소화하는 등 이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2005년 '덕장' 김인식 감독이 새롭게 한화의 사령탑으로 부임하면서 데이비스는 큰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다.

수비실책을 범하거나 하면 주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불같이 화를 내던 데이비스는 "그동안 공격적인 수비를 하다 보니 실수가 나왔다. 팀에 보탬이 되는 선수가 되고 싶다"라는 인터뷰를 할 정도로 순둥이로 변했다. 데이비스는 "한국에서 뛰는 동안 김 감독과 함께 하고 싶다"라며 김인식 감독을 향한 각별한 애정을 표시하기도 했다.

통제하기 힘든 선수였던 데이비스가 한국에서 6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팀에 융화되기 시작했다. 데이비스는 더 이상 자신만을 위해 그라운드에서 뛰지 않았다. 데이비스가 자신을 죽이고 팀과 하나 되어 싸우는 동안 이글스 팬들에게 데이비스는 보석과도 같은 존재로 거듭났다. 매운 한국 라면을 좋아할 정도로 식성까지 변한 데이비스를 더 이상 외국인선수라는 시선으로 대하는 이글스팬들은 없었다.

용병(傭兵)에서 용병(勇兵)으로 진화한 데이비스는 한국에서 뛰었던 7년 동안 979개의 안타(역대 외국인선수 1위)와 167개의 홈런, 591타점(역대 외국인선수 1위)이라는 기록을 남기고 2006년 시즌을 마친 후 가족과의 시간을 갖기 위해 한화 유니폼을 벗고 고국으로 돌아갔다.

김인식 감독을 "내 아빠"로 불러

역대 가장 훌륭한 성적을 기록한 용병으로 꼽히는 데이비스지만 정작 데이비스를 가치있게 만들어 준 것은 그가 한국 야구와 동화되면서 보여준 진한 우정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데이비스는 김인식 감독을 "내 아빠"란 또렷한 한국말로 불렀으며 홈런을 치고 들어오면 관중석을 향해 거수경례를 하기 시작했다.

마치 이글스를 위해 충성을 맹세하는 것처럼 보이는 참으로 특별한 의식이었다. 그것은 데이비스가 이글스 팬들에게 주고 간 가장 소중한 선물이었다.

멕시칸리그로 간 데이비스는 현재 베라크루스에 있는 로호스 델 아길라(Rojos del Aguila de Veracruz)에서 뛰고 있다. 한국 나이로 38살이 된 데이비스는 올 시즌 20게임에 출장을 해서 .271의 타율과 5개의 홈런 12타점을 기록하고 있다.

3루를 돌아 홈으로 들어오면서 그가 붙인 거수경례를 우리가 잊지 못하는 것처럼, 데이비스 역시 자신의 야구 인생 최고의 순간을 보낸 한국에서의 7년을 잊지 못할 것이다. 한국 프로야구에 멋진 추억을 남겨준 제이 데이비스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은 박수를 보낸다.

제이 데이비스 한화 이글스 용병 외국인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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