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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면 알수록 더욱 흥미진진한 고흥의 임진왜란史와 해안선과 맞닿은 수많은 아름다운 섬에 흠뻑 빠져 일요일마다 카메라 가방을 메고 역사를 거스르는 시간여행을 떠났다.

유자, 석류, 마늘, 꼬막, 미역, 참장어, 낙지 등의 먹거리가 풍부한 이곳에 사는 주민들은 온화하고 순박하다. 그러나 국가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을 때는 목숨을 바치기도 했다.

고흥 10경 중 첫째로 꼽는 팔영산의 8봉을 바라보며,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영 관하에서 여도, 발포, 녹도의 여러 진을 관할하던 사도진성을 찾아갔다.

▲ 사도진설치 당시 심은 것으로 추정되는 수령 500년에 둘레 9.4m , 높이가 30m에 달하는 은행나무와 사도진이 있었던 금사리
ⓒ 오문수
사도진은 현재 전라남도 고흥군 영남면 금사리에 설치되었다. 사두(蛇頭) 즉, 뱀머리 모양을 하고는 바로 앞에 있는 개구리 형상을 한 섬 와도(蛙島)를 넘보는 형상으로 인해 사도(蛇島)라고 부른다.

이 진성은 성종 16년(1485)에 성곽이 축조되기 시작하여 6년 후인 성종 22년(1491) 10월에 완성됐으며 성의 둘레가 1440척(尺), 높이가 15척, 샘이 2개가 있었다.

고흥은 고려말과 조선 전기부터 왜구의 침략이 잦아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수군 요새지로서 사도진관은 회령포, 달량, 마도, 여도, 녹도, 발포, 돌산포의 7개 만호(萬戶)를 거느리면서 유사시에 대비하였다.

포두면 어귀를 지키는 이 성은 조선시대 초기 전라도 최대의 수영(水營)이었다. 흔히 여수의 좌수영을 전라좌도 최고의 수영으로 알지만 성종(成宗) 이후의 일이고 조선조 초기 수군중심은 고흥이었다.

역사적 유물을 상상하며 찾아간 금사리에는 건물이나 역사적 유물이 눈에 띄지 않는다. 일을 하고 있던 정영남(66)씨에게 신분을 밝히고 찾아온 목적을 말하고 성에 대해 물었다

▲ 좌우측 나무와 나무사이에 동헌의 건물들이 있었으나 헐리고 주민들의 집이 들어섰다
ⓒ 오문수
"옛 건물이나 성벽을 찾을 수 없습니까?"
"70년대 초반까지도 있었는데 다 뜯어서 충무사 건립에 사용됐어요."
"유물들이 그 자리에 있어야 역사적으로 더욱 가치가 있지, 강제로 뜯어가서야 되겠습니까?"
"예, 맞아요, 우리 동네에 힘 있는 사람들이 없어서 다 빼앗겼어요."

동네사람들은 지금도 산자락에 보이는 은행나무 뒤 넓은 공터를 활터, 언덕배기에 보이는 나무와 나무 사이를 성터, 산위의 말을 맨 흔적을 말터로 부른다고 한다.

이곳은 남·서 두 군데에 성문이 있었다는 데 성문의 흔적이 없어진 것은 물론이고, 고종 32년(1895)에 폐진이 되자 남문 일대의 성을 헐어 앞바다를 매립 축항하였다. 따라서 지금은 성터의 흔적이 북쪽 뒷산 기슭에 약간 남아 있을 뿐이다.

주민들의 말과 자료를 통해 확인해본 결과, 동헌의 청사 및 객사가 다 헐리고 주민들의 주택이 되었다. 70년대 초반까지 건물들이 남아있었으나, 발포만호성의 충무사를 짓기 위해 목재의 일부를 뜯어갔다는 주민들의 얘기다.

사도진성만이 아니라 사도만리성도 일부 뜯겨나갔단다. 사도만리성을 확인하고 싶어 찾아 나섰다가 길을 잘못 들어 몇 번이나 허탕을 친 후에 밭에서 일하는 한 노인(82)에게 물었다.

▲ 무너진 사도만리성에서 바라본 바다 모습
ⓒ 오문수
"사도만리성이 왜 허물어 졌어요?"
"해창만 간척지 사업 때 성을 허물어 여러 척의 배에 싣고나가 간척지 공사에 사용됐어요". "성을 허물지 못하게 하지 않고 왜 가만 두셨어요?"
"그때는 그걸 당연한 걸로 생각했는데 후회돼요."
"성함을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늘그막에 관청에서 이리 오라 저리 가라 그런 꼴 당하기 싫으니 그냥 있었던 얘기만 써주세요."

성을 헐어 간척지에 썼다는 사도만리성을 찾아 금사리에서 출발해 양화리 방향으로 한 시간 쯤 가니, 섬과 섬을 끼고 도는 그림 같은 장면 속에서 드디어 사도만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너진 성의 잔해에 올라 아름다운 섬과 바다를 바라보는 데 새들의 지저귐과 꿩, 파도소리가 아름답기 그지없다. 높이는 무너져서 정확히 가늠할 수 없지만 너비는 3~4m 쯤 될 성싶다.

지금으로부터 약 오백년 전에 저 성을 쌓기 위해 그토록 애썼을 우리 선조들이 간척지 공사를 위해 성을 허무는 모습을 봤을 때 얼마나 분개했을까? 당시 성을 쌓던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성을 쌓았을 텐데.

▲ 사도진에서 발포진으로 가는 도중에 본 발포해수욕장의 모습
ⓒ 오문수
뜯어간 목재들은 어떻게 사용됐을까 궁금해 하며 승용차로 30분쯤 걸리는 도화면에 소재한 발포만호성을 찾아가 충무사(건립시기: 1976~1980) 경내를 들여다보았다. 충무사는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사당이다.

이 사당은 선조 13년(1580) 7월 이순신 장군이 36세에 이곳 발포만호로 부임하여, 오동나무를 탐내는 상관의 청을 거절하자 모함을 받아 파면되기까지 18개월간 재임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었다.

▲ 발포만호성벽 뒤로 충무사의 모습이 보인다.
ⓒ 오문수
열쇠가 굳게 잠겨 실내를 보지 못하고 문틈으로만 들여다보는데, 시멘트 건물들로 둘러싸여 있어 과연 얼마나 유용하게 사용됐을까를 생각하니 실소만 나온다.

역사적 유물이란 현장에 있을 때에 더욱 빛을 발하지 않는가? 발포와 사도진은 성을 둘러싼 포구의 생김새부터가 다르다. 발포는 만안으로 깊이 들어와 자리 잡은 천혜의 요새요, 사도진은 섬과 섬이 사도진을 둘러싸 파도를 막아주며 양항의 조건을 갖추고 포두의 곡창을 수비하는 군사요새지다.

사회 일반적 상황 뿐 만아니라 전쟁도 관계와 관계의 연속이다. 사도진성 앞 바닷물과 발포성 앞 바닷물이 서로 다른가? 이순신 장군이 지하에서 들으면 통분하지 않을까? 사도첨사 김완이 이끄는 사도함대는 전라좌수영의 우척후장이 되어 첫 전투인 옥포해전에서 공을 세우고, 유명한 한산도 해전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충무공의 좌 우 양팔이 되어 나라를 구한 사도진의 수군들 없이 승전이 있을 수 있는가? 사도진이 없으면 발포진도 없고, 발포진이 없으면 사도진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사도진성의 훼손은 자랑스러운 역사와 교훈을 주는 소중한 문화유산이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 발포만호성 밑에 있는 굴강 - 조선시대 군수물자의 하역이나 선박의 정박용으로 사용된 군사시설로 방파제와 선착장 역할을 했다. 조선조 후기에 그려진 발포지도에 거북선을 비롯한 3척의 선박이 정박해 있었다. 길이 40m, 폭 23m
ⓒ 오문수
다행이 발포진성을 복원하고 손질하며, 수군기지였던 선소와 거북선을 숨겨뒀던 굴강이 옛날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존되고 있다. 굴강 바로 옆 해발 70m에는 느티나무를 비롯해 팽나무와 잡목이 우거져 있다.

▲ 굴강의 바로 뒤에 보이는 느티나무 숲에 수백마리의 백로와 왜가리가 산다. - 하얀 것은 백로, 검은 것은 왜가리
ⓒ 오문수
이 숲에는 수 백 년 전부터 왜가리가 3~4월에 날아와 10월까지 살고 있으며, 최근 수년 전부터는 백로 떼가 찾아와 함께 살고 있다. 배설물이 독해 숲이 많이 죽어간다는 얘기도 있지만 희귀한 새를 오래동안 바라보다 갑자기 주라기 공원의 수많은 새떼들 속에 갇혀 있다는 착각에 빠져들었다.

우리는 해방 직후 미군정 기간과 자유당 정권 초기에 일제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역사의식부재가 우리 사회 곳곳에서 현재까지 얼마나 암초와 같은 역할을 했는지 똑똑히 보았다. 후손들에게 살기 좋은 나라를 물려주기 위해서는 눈을 부릅뜨고 역사바로세우기에 노력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SBS U포터와 남해안신문에도 송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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