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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기자는 홍콩 아시아인권위원회의 인턴 자격으로 인도의 빈민 지역(달리트 공동체가 있는 도시 외곽이나 시골 지역, 도시 내 달리트 슬럼가) 현장조사를 위해 5월 12일부터 7월 20일까지 바라나시에 머뭅니다. 기아, 빈곤, 아동노동 현황을 살피고 가장 차별이 극심하게 이뤄지고 있는 곳을 다닐 계획입니다. <편집자주>
▲ 찬드리카.
ⓒ 진주

'배고픔'이나 '기아'라는 개념은 시간과 공간의 척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하루 이틀, 혹은 한두 달의 배고픔은 엄밀하게 배고픔이나 기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곳, 달리트 공동체 사람들에게 배고픔은 세대에 걸쳐 물려받아 쌓인 채무 같고 태어날 때부터 부여받은 유전자 같은, 그래서 그 자체가 살아가야 할 이유가 되고 삶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모세혈관 같은 것입니다.

무사하르란?

무사하르(Musahar)란 '쥐를 먹는 사람(rat eater)'이란 뜻이다. 달리트 공동체도 수많은 자티로 나뉘어 형성되어 있으며, 그 자티 중의 하나가 무사하르다.

이들은 과거에 먹을 것이 없어서 쥐를 잡아먹었으며, 오늘날에는 특히 몬순(우기)이 시작되면 아예 일할 수 없어 쥐구멍을 뒤져 쥐가 모아둔 쌀이나 먹을 것을 찾아 배고픔을 달래기도 한다.

달리트 공동체 내의 자티 사이에도 차이가 형성되어 있으며, 이들 무사하르는 달리트 가운데서도 가장 낮은 자티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무사하르라는 달리트 공동체에서 살고 있는 찬드리카는 스물네 살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녀는 자신이 몇 살인지 모릅니다. 언제 결혼을 했는지, 아이들의 나이가 정확히 몇 살인지 모릅니다. 그녀에게 시간이나 숫자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열 살이 되기 전에, 그녀는 남동생과 함께 벽돌 만드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녀나 다른 무사하르 달리트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나뭇잎을 모아 접시를 만들어 팔거나 벽돌을 만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처음 일 년 동안 견습공이라는 명목 아래 한 푼도 받지 못하고 일했습니다. 1년 뒤 처음으로 100루피를 남동생과 함께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일한 만큼 받은 적이 없습니다. 상층 카스트 출신인 벽돌 가마 주인은 언제나 급여의 일부를 주지 않았습니다.

찬드리카는 학교에 다니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학교에 다니질 않았습니다. 부모님도 그녀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일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학교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이 한 아이를 때리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학교에 다니는 것도 무서워졌습니다. 달리트 출신의 아이들에게 학교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 찬드리카.
ⓒ 진주

뭔지도 모른 채 해야 한 결혼, 삶의 무게와 슬픔 더하다

찬드리카는 다른 여자들처럼 열네다섯 살 때, 할머니가 정해준 남자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결혼이 그녀의 삶에서 무엇인지, 남편이 어떤 의미인지도 몰랐습니다. 많은 다른 또래 여자들처럼, 생리도 시작되기 전에 첫날밤을 보내야 했습니다. 잠자리를 함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녀는 낯선 남편과 함께 지내는 밤이 무서웠습니다. 시댁 식구들은 그녀를 계속 타일렀습니다. "애야, 그게 결혼생활이란다."

그녀에게 삶은, 그저 누군가에게서 주어지는 것의 연속이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녀가 스스로 해야 할 일은 단 한 가지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배고픔을 모면하는 것.

결혼은 그녀에게 삶의 무게감과 허기에 대한 책임감을 더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잃게 되는, 그녀의 삶에서 평생 짊어지게 될 가장 커다란 슬픔을 남겨주었습니다. 결혼하고 난 뒤 일주일 동안 그녀가 먹은 것은 소금과 밥뿐이었습니다. 그녀의 엄마가 찾아와 그녀를 데려갔습니다. 이러다간 딸을 잃어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남편이 다시 그녀를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처음으로 아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처음 아이를 가진 날 그녀는 너무 행복했지만, 언제나 허기 속에서 일해야 했고 결국 그녀는 뱃속에서 아이를 잃고 말았습니다. 오자(Oja, 샤먼)가 와서 그녀가 사산을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녀는 남편에게 다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굶주림과 허기 속의 노동은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이의 죽음은 이후 그녀를 불행과 고통이 지속되는 삶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슬픔이 그녀의 삶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녀는 다시 새로운 남편을 맞이했습니다. 그녀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 곳의 삶은 원래 그렇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녀에게 두 번째 남편은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녀의 삶에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상층카스트에서 잡일을 했던 두 번째 남편은, 마치 자신이 상층카스트인 것처럼 그녀를 구타와 욕설로 대했습니다. 차별과 폭행의 지배방식을 그는 고스란히 상층카스트에게 배운 것입니다. 두 번째 남편과 사이에 두 아이를 낳았지만, 남편은 가족을 잘 먹여 살리지도 못한 채 어느 날 떠났습니다.

억압의 이양, 차별의 재생산... 고통 속에 떠나보낸 아이들

다시 새로운 남자와 살게 되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가족들이 정해준 남자입니다. 남편은 좋았습니다. 그녀에게 먹을 것도 주었고, 옷도 주었습니다. 아들을 낳았고, 아들이 두 살 되던 해에 딸을 낳았습니다.

▲ 흙집의 방 안에 있는 찬드리카와 아들(오른쪽).
ⓒ 진주
아이들을 낳았지만 여전히 배가 고팠고, 낳은 지 며칠 뒤에 다시 일하러 가야 했습니다. 딸이 태어난 지 20일이 되던 날, 두 아이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배고픔 때문이었습니다. 아들의 사망 당시 기아지수는 4등급으로(인도 행정당국이 설정한 영양부족등급으로 연령대비 체중에 따라 등급을 나누는데, 1~4등급으로 분류되어 있고 4등급이 가장 위험한 상태임) 가장 심각한 상태였습니다.

그녀에겐 배급카드(ration card)가 없었습니다. 배급카드는 여성들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또한 각자가 속한 공동체에서 살지 않으면 배급카드가 발급되지 않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속한 공동체에서 살지 않고, 그녀가 속한 공동체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녀에게도, 그녀의 남편에게도 배급카드가 발급되지 않았습니다.

배급카드는 빈곤층을 위해 인도 정부가 만든 것이지만, 실제로는 여성에 대한 차별이 되는데다가 달리트 공동체 구성원이 원래 속한 공간에서 살아야 혜택이 받을 수 있는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그녀가 남편이 속한 공동체에서 살아가지 못하는 건, 공동체 내부에서도 끊임없는 불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첫 아이를 사산하고 난 뒤, 사람들은 그녀에게 귀신이 씌었다고 믿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이 속한 공동체 사람들은 그녀와 함께 살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속했던 공동체 사람들도, 그녀는 이미 출가한 사람이니 남편의 공동체로 가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어느 곳에서도 버림받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녀가 세 번이나 남편을 얻게 된 것도, 그녀의 아이들이 죽어간 것도 모두 그녀의 탓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아이들이 죽고 나서, 그녀는 다시 한 번 배급카드를 발급받기 위해 시도했습니다. 마을 대표자는 너무 부패해서 모든 사람이 그를 싫어하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녀는 다른 담당자에게 가서 요청했지만, 규정에 어긋난다고 거부당했습니다. 그녀가 달리트 공동체를 위한 인권단체 사람들을 만나고 인도의 인권단체가 국제단체에 압력을 넣고 그 국제단체가 인도 정부에 압력을 넣자, 그녀의 상황을 판단한 행정당국이 비로소 그녀에게 배급카드를 발급했습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살아갈만한 토지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예전엔 배급카드를 가지고 할당된 양의 곡물을 구입하곤 했지만, 요즘엔 그 횟수도 줄었습니다. 현재 다시 함께 살고 있는 남편은 그녀의 첫 번째 남편입니다. 남편은 일을 열심히 하지 않을 뿐더러,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허기로 기운이 약해져 있는 데다가 배고픔과 불행한 삶은 남편을 술과 담배로 하루를 살아가게 만들었습니다. 한편으로 그녀는 남편을 이해했지만, 매일매일 너무나 원망스러웠습니다.

▲ 찬드리카와 남편.
ⓒ 진주

음식에 매운 고추를 넣어야 하는 까닭

그녀는 여전히 벽돌 가마에 가서 벽돌을 만들고 있습니다. 원래대로 한다면 일주일에 400~600루피 정도 받아야 하지만, 상층카스트인 람스라이 싱(Ramsry singh)은 그녀에게 200루피만 주었습니다. 나머지는 탈취해가는 셈입니다.

현재 하루 8시간을 기준으로 58루피를 받는 게 보통이지만, 그녀는 하루에 12시간을 일하면서도 그 절반도 못 받고 있는 겁니다. 대부분의 벽돌 가마 주인들은 상층카스트 출신으로 달리트들을 강제로 노동시키고 대가는 적게 지불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노동의 대가도 시간당 셈하는 게 아니라, 만들어낸 벽돌 수만큼 지불하고 있습니다.

▲ 찬드리카의 딸.
ⓒ 진주
그녀는 벽돌 가마 주인에게 체불된 임금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주인은 당장 꺼지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사야할 것도 있고 돈이 필요하다고 재차 요구했습니다. 인권단체에 도움을 호소하겠다고 하면, 주인은 죽여버리겠다고 협박도 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이 곳에서 일하지 않겠다고 하면, 집으로 찾아가 때리겠다고 했습니다.

아직도 그녀의 임금은 체불되어 있습니다. 그녀는 다시 요구할 거라고 했습니다. 인권단체 사람들이 그녀에게 힘이 되어주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영양부족으로 말라있었습니다. 영양부족으로 눈은 점점 붉게 변하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특별한 질병은 없지만, 영양부족이 지속되면 쉽게 감염되고 다른 질병들이 쉽게 발생합니다.

하루 두 끼 먹는 식사는 늘 그렇듯 밀가루 전병(짜파티라고 부름)에 고추가 잔뜩 들어가 매운 야채볶음 같은 겁니다. 음식이 매워야 아이들이 물을 자주 먹게 되고, 허기를 그나마 메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희망은 정말 소박합니다. 정부가 약속한 대로, 살아갈 공간을 위한 최소한의 땅과 뭔가 생산할 수 있는 토지를 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태어나고 엄마와 함께 살아가는 이 공동체에서 아이들과 하루 세 끼를 먹고 살 수만 있었으면 합니다. 그러면 힘들게 벽돌을 만들지 않아도 되고, 항상 아이들과 함께 있으면서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정부가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강하게 이야기합니다. 공허한 약속이 되기 전에.

▲ 구걸해서 얻은 사리(saree)를 입고 있는 찬드리카.
ⓒ 진주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찬드리카라는, 무사하르 달리트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스물네 살의 여성을 두 차례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됐습니다.


태그:#달리트, #카스트, #여성 차별, #배급카드, #빈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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