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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8년 제3회 단재상을 수상하는 이오덕 선생.
ⓒ 한길사
한길사는 일선 교육자들의 편지모음인 <우리 언제쯤 참선생 노릇 한 번 해볼까>를 1986년 10월에 펴냈다. 이어 1988년 6월에 다시 <아이들을 하늘처럼 섬기는 교실>을 펴냈다. 나는 이 두 책을 참으로 소중하게 기억하고 있다. 교육현장에서 참교육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선생님들의 아름다운 삶과 정신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믿고 정성을 다해 가르치고 있는 훌륭한 교사들의 살아있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이다. 감동적인 내용이다. 이런 참교육자들이야말로 우리의 희망이다. 지금 읽어도 여전히 가슴에 다가오는 사연들이다.

이 두 책을 나는 이오덕 선생과 같이 기획하고 만들었다. 나는 80년대 말부터 선생을 만나면서 우리 교육현실과 어린이문학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특히 선생님은 편지와 일기에 대해 말씀하셨고, 나도 선생님의 생각에 동의했다. 함께 편지와 일기의 중요성을 토론하면서 편지와 일기를 중심으로 하는 무크지 같은 것을 기획해보자는 이야기를 주고받은 적도 있다.

1977년 봄이었다. <동아일보>에서 나온 우리들을 '담당'하는 정보부의 한 요원이 나를 만나자 했다. 농민들에 관한 책이 준비되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걸 중단해달라는 것이었다. 황당한 일이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도대체 할 일이 그렇게도 없느냐고. 책은 내가 알아서 만든다고. 사실 그 무렵 나는 '농민일기'를 기획해보고 있는 중이었다. 가톨릭농민회의 사람들과 연락도 하고 농민 몇 명과도 만나보았지만 책으로 엮을 만한 원고를 만들어내는 일이 그렇게 용이하지는 않았다.

당초에 나는 문학적인 '농민일기'나 '농민애사' 같은 걸 기대했지만, 여의치 않아 결국 기획을 중단하고 있었다. 농민들이 그 고된 농사일을 하면서 일기나 편지를 쓴다는 것이 사실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나도 시골 고향에서 중학교까지 다니면서 온갖 험한 농사일을 해보았지만, 농사일이란 참으로 고단해서 일이 끝나면 밥 먹고 그대로 쓰러져 자야 하는 것이기에, 일기 따위를 생각해보는 것이 약간은 사치스런 일이었을 것이다.

<삶과 믿음의 교육> 등 20여 권 출판

▲ <무너미 마을 느티나무 아래서> 표지
ⓒ 한길사
이오덕 선생은 일찍부터 삶에서 우러난 생각과 정신을 높이 평가하면서 그것에 토대하는 자신의 아동문학론을 시도하고 있었다. 선생은 일선 교육자들이 보내는 편지들을 문학적·교육적 자산으로 소중하게 보관했는데, <우리 언제쯤 참 선생 노릇 한 번 해볼까>의 머리말에서 적고 있다. "어린이의 올바른 마음을 올바르게 키워가려고 하는 선생님들이 그 바쁜 나날의 시간을 틈내어 써 보낸 이 편지들"은 "다른 어떤 교육 보고서나 이론서보다도 우리 교육의 상황을 잘 살필 수 있을 것"이라고.

"오늘은 아이들을 데리고 뒷산에 올라갔습니다. 싱싱하게 커가는 초목을 아이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냇가의 차돌멩이를 주워보면서, 정말 차돌멩이 같이 깨도 깨도 깨지지 않는 바른 뜻을 가슴에 품어보라고 했습니다."

"학교란 지식만 가르치는 것일까요. 담을 쌓고, 집을 짓고, 채소를 가꾸고, 애들과 함께 놀고 작업하는 그 가운데 정도 들고 인격도 쌓아야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지나고 나면, 잘한 것도 없고 잘못된 것만이 크게 남습니다. 아이들한테 고함을 얼마나 질렀던지, 아이들이 조금 잘못한 것을 못 참고 전체 아이들의 엉덩이에 매질을 했던 것이 부끄럽고 후회됩니다."

"소유욕과 생명경시로 치닫고 있는 현대 문명 속에서 교육이 해야 할 일은 먼저 교육자가 참교육자 되어야 한다는 생각뿐입니다. 먼저 내가 소유욕을 버리고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참사람이 되지 못하고 어찌 교육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오덕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1977년 봄이었다. 나는 창작과비평사에서 펴낸 선생의 아동문학 평론집 <시정신과 유희정신>을 읽고 놀라운 감동을 받았다. 아동교육과 아동문학에 대한 '신천지'를 발견하는 것 같았다.

나는 선생을 직접 만나 말씀을 듣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선생님과의 만남 또는 책만들기가 시작되었다. 1978년 12월에 '이오덕 교육수상집' <삶과 믿음의 교실>을 오늘의 사상신서 제7권으로 내기 시작하면서 총 20여 권에 이르는 책을 한길사는 내게 되었다.

그 이후 우리 교육과 문학 또는 우리 현실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선생은 겉으로는 부드러운 분이었지만 자신의 이론과 정신에 참으로 단호했다. 나는 1977년부터 수많은 책들을 기획해오고 있지만, 선생의 그 많은 책들의 제목은 대부분 선생이 직접 지었다.

교육과 아동문학에 대해 확실한 이론과 자세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제목 하나 정하는데도 단호했다. 그러나 선생을 알면 알수록 선생이 지은 책 제목들에 나는 동의하게 되었다. <우리 언제쯤 참 선생 노릇 한 번 해볼까> <아이들을 하늘처럼 섬기는 교실>은 기가 막힌 제목이 아닌가. 울림이 있고 가슴에 다가오다.

아이들과 들로 산으로

▲ 한길사에서 펴낸 이오덕 선생 책 중 <우리글 바로쓰기 1~3> <우리 문장 쓰기> <이오덕 교육일기 1~2> 표지
ⓒ 한길사
교육자 또는 아동문학가 이오덕의 진면목은 <이오덕 교육일기>(1·2)에서 다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은 내가 하자해서 정해졌지만, 선생의 그 많은 책들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선생에게 몇 년에 걸쳐 일기를 정리해보자고 했다. 1962년 9월부터 1972년 7월까지의 '교사일기장'을 정리한 것인데, 어느 날 일기에는 아이들과 자연 속에서 뛰어노는 모습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산에 가는 것은 비록 겨울이 다 된 날이라도 즐겁다. 아이들도 즐겁고 나도 그렇다. '와아!' 하고 아이들은 산으로 달려간다. '선생님 이거 무슨 풀이라요?' 하고 묻는다. 내가 풀 이름을 알리 없다. '선생님 이거 원수 갚은 거라요' 한다. 옷에 닿으면 씨가 달라 붙는 것인데, 그것조차 이름을 모르겠다.

'선생님 숟가락 만들어줄까요?'

댓잎을 따서 무엇을 만들고 있는 아이가 말한다. 숲이 꽉 우거져 있는 산에 들어가서, 아이들과 나는 턱도 없이 좋아서 노래를 부르고 지껄여댔다.

'선생님 윤원이가 코피나와요. 마구 줄줄 나와요.'

놀라서 달려가 보니 소나무에 머리를 부딪쳤다고 한다. 바위틈 샘물에 씻으니 피는 곧 멎었다. 나는 향기가 나는 무슨 풀씨를 주머니에 가득 따왔다."


어느 날 그는 학생들과 줄자로 나무의 둘레를 재고 있다. 그는 말했다. "내년에도 재어보고, 내후년에도 재어보아라. 10년 후에 와서도 재어보면 좋겠다." 가난한 시절, 저 산골학교의 풍경을 <이오덕 교육일기>는 이렇게 그려놓았다.

베스트셀러가 된 <현복이의 일기>

이오덕은 '삶'을 무엇보다 중시하고 '삶을 사는' 아이들을 '하늘처럼' 믿었다. 이오덕은 어린이를 발견했다. 자신의 삶을 담아내는 수많은 글을 써냈을 뿐 아니라 아이들을 믿고 아이들의 글을 발견해냈다.

한길사는 1987년 2월 <현복이의 일기>를 펴냈다. 서울개화국민학교 신현복 군이 5학년이었던 1985년 11월 18일부터 6학년인 1986년 6월 27일까지 쓴 220일치 가운데 103일치를 가려 뽑은 것인데, 담임 주순중 선생의 추천으로 이오덕 선생이 '발견'하여 책을 내게 되었다. <현복이의 일기>는 책이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연극을 만들자 영화를 만들자는 제의가 여기저기서 들어오기도 했다.

이오덕 선생은 어린이들의 글을 하나의 독립 장르로 인식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일찍이 어린이들의 글모음 <일하는 아이들>을 통해 어린이들의 글들이 감동적일 수 있고 당당한 글쓰기임을 우리는 알게 되었다. <현복이의 일기> 책머리에 부친 글에서 이오덕 선생은 아주 중요한 '발견'을 했다고 적고 있다.

"나는 그때 현복이한테 물어보았다. 지금까지 어떤 책을 읽었느냐고. 그런데 현복이는 내가 읽었을 것이라고 믿었던 책, 내가 읽기를 바랐던 책들은 한 권도 읽지 못했던 것이다. 대체 이 아이가 일기에 적어놓은 이 착한 마음, 구체적으로 모든 사물을 보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태도, 지극히 소박하면서도 결코 비뚤어지지 않은 그 생각, 풍부한 감정과 섬세한 느낌을 적은 말들, 이런 것들을 어디서 어떻게 배웠을까, 모든 아이들이 흉내만을 내도록 강요받고, 획일적인 느낌과 생각을 갖게 되어 있는 오늘날의 교육환경에서 현복이 같은 아이가 남아 있었다는 것은 기적 같기도 하고, 다만 고마울 뿐이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아이들의 그 무한히 뻗어나갈 수 있는 재능이 현복이의 경우 천만다행히도 짓밟히지도 않고 꺾이지도 않고 그대로 살아 있다. 아마 담임 선생님의 도움이 컸으리라."

글쓰기야말로 가장 좋은 교육이라는 신념과 이론을 가지고 있었던 선생은 글쓰기 교육의 방법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을 집필했다. 한길사는 1984년에 이 책을 펴내는데, 판화가 이철수씨에게 표지그림을 부탁했다.

엄마의 등에 업힌 아이가 잠들어 있고, 엄마는 책을 읽고 있다. 참으로 한국적인 어머니의 모습이다. 이 책을 계기로 1980년대에 이철수 화백은 한길사와 작업을 잇달아 하는데,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의 표지그림은 1980년대 이 화백의 작업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화백은 특히 80년대 후반에 우리가 펴내는 월간 <사회와 사상>에 '이철수의 판화마당'이라는 고정칼럼을 맡기도 했다. 이 화백은 1990년 4월 오늘의 사상신서 제140권으로 한길사가 펴낸 이오덕 선생의 <참교육으로 가는 길>의 표지화도 작업했다.

우리글 우리말 운동

▲ <농사꾼 아이들의 노래> 표지
ⓒ 한길사
아동문학과 교육에 대한 이오덕 선생의 인식·발견·실천과 더불어 우리말과 우리글에 대한 헌신적 작업은 선생의 생애 후기 빛나는 성과일 것이다. 저 80년대에 선생은 안암동 우리 회사를 으레 방문하곤 했는데, 나는 만나면 늘 우리말 우리글에 관한 토론하는 편이었다. 이 선생은 우리말 우리글을 잘 구사한 분이 함석헌 선생이라는 말씀도 했다.

선생은 이제 우리말 우리글을 연구하고 쓰는 일이 당신에게 가장 중요하고도 큰일이라는 말씀도 했다. 나는 선생을 뵐 때마다 계속 우리말 우리글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책을 써야 한다고 '독려'하곤 했다. 그렇게 하여 1989년에 <우리글 바로쓰기>가 출간되었다. 부모한테서 배운 말을 부끄럽게 여기고, 조국이 가르쳐준 말을 잊어버리며 왜곡시키는 현실을 구체적으로 고쳐나가고 바로 쓰게 하는 '운동'을 위해 이오덕 선생이 나선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그 어떤 일보다도 먼저 해야 할 일은 외국말과 외국말법에서 벗어나 우리말을 살리는 일이다. 한번 병들어 굳어진 말은 정치로도 바로잡지 못하고 혁명으로도 할 수 없다. 이 땅의 민주주의는 남의 말, 남의 글로써 창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말로써 창조하고 우리말로써 살아가는 것이다."

이오덕 선생은 1992년 3월에 <우리말 바로쓰기>를 고쳐 <우리말 바로쓰기> 제1권으로 내고, 같은 시기에 제2권을, 그리고 제3권을 95년 9월에 냈다. 제2권을 내면서 선생은 말했다.

"우리 지식인들은 분단 반세기 동안 '입장'이란 일본말 하나도 바로잡아 쓰지 못했고, 아직도 바로잡을 생각조차 안 하면서 끊임없이 병든 말을 퍼뜨리고 우리말을 죽이고 있다. 그러나 나는 절망하지 않는다. 나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방방곡곡에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병든 글에서 벗어나 말로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우리들 편임을 산같이 믿고 있기 때문이다."

'입장'과 나란히 '달인'이라는 일본말을 마치 우리말인 것처럼 버젓이 쓰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오덕 선생에게 우리말 우리글 바로쓰기 운동은 곧 올바른 교육운동이자 이 국제화 시대에 더욱 요구되는 민족운동·문화운동이었던 것이다. <우리글 바로쓰기> 제3권에서 선생은 다시 우리말 우리글의 정신과 사상을 강조해서 말했다.

"나는 우리 사회의 국가의 모든 실상과 거기 얽힌 문제를 푸는 열쇠를 '말'에서 찾아내었다. 내 책을 읽어주는 분들도 부디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위대한 우리 조국의 말, 배달말은 위대한 글자 한글을 낳았고, 이 말과 글은 내게 모든 것을 환히 비춰 보여주는 햇빛이었다."

나는 <우리글 바로쓰기>와 더불어 <우리문장 쓰기>를 말씀드렸다. 우리문장다운 문장, 우리글다운 글쓰기가 더욱 중요하다 할 것이다. 선생은 '어른들의 잘못된 글쓰기'에 주목하고, 자신의 교육관·문학관으로 쓰는 문장론이 바로 <우리글 바로쓰기>(전3권)와 나란히 놓여지는 <우리문장 쓰기>였다.

"이 책은 내가 지금까지 겪으면서 깨달은 바를 바탕으로 하였고, 더구나 교단에서 글쓰기를 가르치면서 발견한 것, 얻게 된 신념을 바탕으로 해서 썼다. 학생들에게 가르쳤던 삶을 가꾸는 글쓰기 방법을 이번에는 어른들의 글쓰기 방법으로 발전시켰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지금까지 나온 어떤 문장작법 종류의 책과도 다르다고 해야 하겠다. 글을 본 관점이 다르고, 쓰는 태도와 쓰는 방법을 말해놓은 것이 다르고, 더구나 문학의 자리를 매겨놓은 것이 다르다. 지금까지 나왔던 문장작법이나 글쓰기 방법을 이야기한 책들은 문학작품을 창작하는 방법을 말해놓거나, 생활글 쓰는 법을 말하더라도 문학작품과는 따로 나누어 놓았는데, 나는 여기서 이 두 가지를 같은 자리에 두었다.

좀더 분명하게 말하면, 모든 글쓰기는 자기를 나타내는 것이고, 따라서 모든 글은 삶이 바탕으로 되어 있어야 한다고 보았고, 그래서 지금까지 우리가 문학이라고 말해온 글은 생활글과는 수준이 다른 한 단계 높은 자리에 있는 글이 아니라, 삶을 나타내는 모든 글이 자리 잡고 있는 넓은 자리의 한쪽, 그 어느 특수한 자리에 있다고 보고 그렇게 다룬 것이다.

어른들의 글쓰기도 자기의 삶을 정직하게 쓰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 까닭은 무엇보다도 지금까지의 우리 문학이 크게 잘못된 글쓰기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우리 문학은 겨레의 삶과 말에서 멀리 떠나 있었다. 그것은 글을 쓰는 사람들이 방안에 앉아 글만 쓰는 데서 오는 필연의 결과였다.

삶과 말에서 떨어져 나간 문학은 일부 사람들의 오락물 구실밖에 할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 문장은 갈수록 사실과 사물을 떠난 병든 말의 희롱으로 떨어진 것이다. 우리 문학작품이 일본말과 일본말법을 퍼뜨려 우리 글 전체를 오염하고 우리말을 병들게 한 사실도 바로 보아야 한다."


이오덕 선생의 언어관·문장관에 대해 논란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비판적인 견해도 없지 않다. 그러나 우리말 우리글의 정신과 사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 또는 의식을 대중화시키는데 중요한 문제제기를 한 것이다. <우리글 바로쓰기>나 <우리문장 쓰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우리말과 글을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에 대해 각성하게 된다.

1988년 제3회 단재상이 이오덕 선생에게 주어졌다. 서울 종로구 사간동 대한출판문화협회 강당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선생은 수상연설을 통해 자신의 교육철학과 문학사상 그리고 글쓰기의 방법과 정신을 밝혔다. 문익환 목사 등 200여 명의 하객들은 선생의 신념에 찬 연설을 숙연하게 경청했다. 이날의 수상연설은 녹음되어 전국의 참교육자들도 들었다.

권정생 선생과 주고받은 우정의 편지

▲ <문학의 길 교육의 길> 표지
ⓒ 한길사
이오덕 선생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한동안 건강이 회복되는 듯할 때 선생은 여러 가지 구상을 나에게 말씀하기도 했다. 나는 선생에게 회고록 또는 자서전 집필을 권유했고 선생도 '삶의 문학'으로서 자신의 이야기를 써보겠다고 했다.

나는 특히 70년대 80년대의 일기를 정리하시라고 했고, 선생도 그러자고 했다. 이번에 돌아가신 안동의 아동문학가 권정생 선생과 주고받은 편지를 넘겨주어 우리는 그것을 진행하기도 했다. 권정생 선생이 동의하지 않아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한 시대 어린이 문학운동과 교육운동의 두 기둥이었던 두 분의 우정이 묻어있는 편지글들을 우리는 갖고 있다. 두 분이 주고받는 편지란 참으로 소박하고 감동적이다.

이오덕 선생은 건강이 좋지 않은 속에서도 중요한 작업을 해냄으로써 젊은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2001년 5월에는 <농사꾼 아이들의 노래 : 권태응 동요이야기>를 소년한길에서 펴냈다.

1918년 충주에서 태어나 1951년에 33세로 요절한 권태응, 1945년부터 1950년까지의 여섯해 동안 "마치 자신이 동요를 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처럼 온 마음과 힘을 다해", "목숨을 앗아가려는 병마와 싸우면서" 동요만을 써낸 권태응의 문학세계를 428쪽이나 되는 분량으로 논구해내는 작업을 선생은 해냈다.

2002년 7월에는 <문학의 길 교육의 길>과 <어린이책 이야기>를 동시에 소년한길에서 펴냈다. 선생의 강건한 '정신'을 우리는 읽을 수 있다. 나는 우리 출판사가 선생의 마지막 '걸작'들을 펴내게 된 것을 긍지로 삼고 있다. 그러나 선생님과 의논한 여러 기획들이 이뤄지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선생의 여러 구상들을 생각하면 안타까움과 슬픔을 억누를 수가 없다.

산 속의 한 마리 새가 되어

1925년 경북 청송에서 농사짓는 집안에서 태어난 선생은 2003년 8월 25일 새벽, 향년 78세로 충청북도 충주시 신내면 무너미마을 고든박골에서 돌아가셨다. 선생은 돌아가시기 전에 마을 뒷산에 오르곤 했다. 뒷산 양지바른 곳에서 설핏 잠이 들었는데, 그때 선생은 손수건에 토끼똥 몇 알을 소담스럽게 싸서 손에 쥐고 계셨다. 선생은 "토끼똥이 요렇게 아름답지" 했다고 아들 이정우씨가 나에게 말했다. 선생은 바로 그 뒷산에 누워계신다.

이오덕 선생은 풀·꽃·나무·흙·바람, 그리고 무엇보다 어린이를 사랑했다. 그런 문학과 교육을 위해, 그런 문학과 교육을 하는 참문학인·참교육자들과 함께 생각하고 연구하고 글을 쓰고 실천했다.

선생은 형식을 꾸미고, 일부러 하는 것을 한사코 마다했다. 장례를 조촐하게 치르라는 유언을 남기고, 번다하고 화려하게 칭송할까봐 비명까지 미리 정해준 선생이야말로 자연스러움과 소박함의 철학을 몸으로 구현한 우리시대의 참스승이었다.

돌아가시기 직전에 아들 이정우씨에게 유언처럼 한 말씀을 남겼다고 한다. 젊은 시절 한 권의 책을 빌렸는데, 나중에 그 책을 사기로 하고 책값의 절반을 치렀지만, 나머지는 주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는 것이었다.

한길사는 2005년 선생의 서거 2주년을 맞아 선생의 시집 <무너미마을 느티나무 아래서>를 펴냈다.

나는 올해가 일흔이 꽉 찬 나이인데도
아직도 어린애 같은 꿈을 꾸며 살아간다
산속에 가서 한 포기 풀같이 살아가는 꿈
산속에 가서 한 마리 새같이 살아가는 꿈

간밤에도 자리에 누워
가슴 두근거리며 잠을 못 잤다
아침 햇빛을 받아 온몸을 떠는 풀이 되어
저녁노을 바라보며 나뭇가지에 눈감고 앉아 있는
한 마리 새가 되어

내가 바라는 것은 그저 하늘과 구름
해와 달
별과 바람
이른봄 담 밑에 돋아나는 조그만 풀싹
초가을 도랑가에 핀 하늘빛 달개비꽃
풀숲에 울어대는 벌레 소리

지금도 나를 기다리고 있을 그 많은 형제들을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는다
나는 뜬눈으로
이 밤에도 꿈을 꾼다


선생이 1995년 4월 30일 밤에 쓴 '나의 꿈' 전문이다. 시다 아니다를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선생의 사상과 정서를 헤아리게 한다. 슬픔 또는 해방 같은 것이다. 선생이 돌아가시기 전에 나는 KBS의 유동종 PD와 의논했다. 선생의 모습을 담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이오덕 선생을 존경하는 유 PD가 그 작업을 시작했는데, 결국 선생을 추모하는 특별프로그램으로 방송되었다.

돌이켜보면 한 출판인으로서 나는 이오덕 선생과의 25년여를 만났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고 수많은 책을 기획했다. 아니 지금도 만나 이야기하고 있다. 한 권의 책을 만들어 세상에 존재시키는 일이란 아름답고도 존엄하다는 체험을 늘 하게 되지만, 선생과 더불어 교육과 어린이, 그리고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날은 늘 밤이 깊었다. 때로는 긴 시간 전화로 이런저런 생각을 주고받았다. 지금도 불현듯 이오덕 선생에게 전화를 걸어야지 하는 생각이 나곤 한다. 이오덕은 나와 우리 모두의 가슴에 여전히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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