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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자이 마을 전경. 멀리 정자 모양 위령소와 위령탑이 보인다.
ⓒ 김효성

1966년 2월 26일 아침. 평화로운 베트남의 한 마을에 포탄이 날아들었다. 이내, 수많은 헬기가 마을의 하늘을 가득 메웠고, 녹색 전투복을 입은 한국군이 마을로 밀려들어왔다. 그들은 마을 사람들을 모두 불러모아 잔인하게 살해했다. 380여명을 죽이는 데는 1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베트남에서 '고자이 학살'로 불리는 이 사건은 단지 베트남전 당시 일어난 수많은 민간인 학살 사건 중 한 건에 불과하다.

안타까운 진실은 오랜 시간 외면당하고 있었다. 1990년대 후반에서야 언론에서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다루기 시작했다. '침략받는 민족'이라고 스스로 여겨오던 한국 사람들에게 민간인 학살의 진실은 충격 그 자체였다.

지금까지 많은 한국 사람들이 학살지역을 방문하여 유족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병원 진료 등 봉사활동을 통해 과거를 반성하려는 노력을 해왔다. 그러나 베트남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침략받는 민족'이 벌인 민간인 학살

▲ 베트남 민간인 학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KBS < HD TV 문학관> '랍스터를 먹는 시간'의 한 장면.
ⓒ KBS 제공
지난 3월 4일 KBS에서 방영된 HDTV 문학관 '랍스터를 먹는 시간'은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다뤄 화제가 되었던 작품으로, 민간인 학살 이후 현지인의 애환과 한국인과의 갈등을 작품 전체에 잘 담아내고 있다.

주인공 건석은 베트남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고 그들의 문화를 잘 이해하고 있지만, 한국 사람이라는 이유로 베트남 사람들과 갈등을 빚는다. 그러다가 한국군 학살지를 방문해 베트남 사람들의 애환을 듣는 것을 계기로 반성과 함께 다시는 이러한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내 상황 또한 이 드라마 주인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현재 과거 민간인 학살이 많이 발생했던 베트남 중부 지역에서 살고 있으며, 수많은 베트남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

따라서 민간인 학살이 피부에 닿는 느낌은 한국에서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또한 베트남 사람들의 내면에는 한국군에 대한 혐오와 학살에 대한 애환이 담겨 있음을 항상 느낀다. 때문에 우리가 민간인 학살 문제를 진정으로 반성하고 노력해야 함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나는 앞으로 베트남 중부 지방의 수많은 민간인 학살 사건을 다루고, 이와 함께 베트남 사람들의 시각도 함께 실을 것이다. 또한 매년 학살 지역을 찾아오는 수많은 한국 사람들의 다양한 노력도 소개할 생각이다.

그날 악마처럼 들이닥친 '남조선' 군인들

▲ 고자이 마을 위령탑.
ⓒ 김효성
2007년 5월 12일 토요일 아침. 나는 민간인 학살 현장을 취재하고 당시 생존자를 만나려고 고자이 마을을 방문했다. 이 마을은 행정구역상으로 빈딩성 떠이선현 떠이빈싸에 있다. 빈딩성 성도이자 과거 한국군 맹호부대의 주둔지였던 뀌년시에서 1시간 정도 차를 타고 논두렁 사이로 난 길을 가로질러 고자이 마을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40여 년 전 학살이 일어났던 고자이 마을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떠이선현에서도 시골에 속하는 고자이는 물소가 수레를 끌고 진흙길을 힘겹게 오가는 전형적인 베트남 농촌마을이었다.

그러나 이 곳이 무거운 장소임은 마을 중앙에 세워진 큰 규모의 위령탑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위령탑에는 수많은 희생자의 명단이 새겨져 있었다. 중앙에는 '1966년 2월 26일 남조선군이 미국의 명령 아래 380명의 무고한 인민을 살해했다'는 글귀가 선명했다.

위령탑 맞은편에는 정자 모양의 위령소가 새로이 만들어져 있었는데, 뒤편 회랑에 그려진 그림이 참으로 끔찍하다. 맹호부대 마크가 선명하게 그려진 한국군이 악마같은 표정을 지으며 마을 사람들을 노려보고 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총에 맞고 칼로 난자당하는 지옥같은 광경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피해자의 끔찍한 기억을 바탕으로 묘사된 그림에서 악마 같은 모습의 한국군 병사가 40년 전에 일으킨 무시무시한 사건을 이 곳 사람들이 얼마나 끔찍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생존자 증언①] "모조리 죽고 3명만 살아남았어"

▲ 위령탑 뒤편 회랑에 그려진 한국군의 무서운 모습.
ⓒ 김효성
마을 사람에게 물었더니, 고자이 학살 사건의 생존자가 아직도 마을에 살고 있다고 했다. 수소문한 끝에 위령탑에서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사는 호지에우(86)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호지에우 할아버지는 당시 45세 중년이었고, 사건 당일 10살 난 아들과 함께 방공호에 숨어서 겨우 살아남았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부인과 자식 넷을 모두 잃었다고 했다.

"그날 아침, 먼저 헬리콥터가 잠자리 떼처럼 날아왔어. 곧 포탄도 날아왔고. 포탄이 공중에서 폭발해서 많은 사람이 죽었지. 곧 있으니 남조선 군인들이 들이닥치더군. 사람들을 모두 불러 모으더니, 총으로 쏘아죽이기도 하고 칼로 찌르기도 했어. 독약을 먹이기도 했지.

그 때는 전쟁 중이라 마을마다 집 아래 땅굴을 파놓았어. 나는 그때 10살 난 아들놈이랑 숨어있었지. 다른 마을 사람들도 땅굴에 숨었지만, 남조선 군대가 탐지견을 써서 숨은 사람들을 찾아내는 바람에 모조리 죽었지. 우리 마을에서는 단 3명밖에 살아남지 못했어."


워낙 오래 전 일이어서인지, 할아버지의 말투에서는 고통이나 슬픔은 배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할아버지와 함께 살아남은 아들은 굳은 표정으로 당시 어머니가 살해당했다며 하소연했다.

"어머니가 당시 돌아가셨지만, 위령탑에는 이름조차 올리지 못했어. 난 아직도 왜 그런지 모르겠어. 아마도 시체가 심하게 손상돼서 그런 것 같기도 해."

[생존자 증언②] 짐승들이 시체 뜯어먹는 생지옥

▲ 고자이 마을 위령탑에 빼곡하게 새겨진 희생자 명단.
ⓒ 김효성
호지에우 할아버지는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또 다른 학살지가 있으며 거기서도 단 2명이 살아남았다며, 원한다면 같이 가겠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차를 타고 2㎞ 떨어진 다른 마을에 도착해 두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베트남 정부 공식 기록에는 사건 당일이 1966년 2월 23일로 기재돼 있으며, '쯩진 할아버지의 마당'이 학살 장소로 기록된 지역이었다. 고자이 마을과는 행정구역상으로는 같은 떠이빈싸의 '빈안'에 속하지만 멀리 떨어져 있어, 엄연히 다른 마을이었다. 이 곳에서는 모두 90명의 민간인이 살해되었다고 한다.

쩐남(82) 할아버지는 방공호에 숨어있던 20명 중 유일하게 살아남았다고 한다. 한국군이 탐지견으로 수색해 방공호를 쉽게 발견했고 사람들을 모두 끌어냈지만, 할아버지는 방공호 안에 홀로 숨어 있었다고 한다. 천만다행으로 한국군은 방공호 안을 다시 확인하지 않았고 끌려간 나머지 19명은 살해당했다고 한다.

"우리 빈안 지역에서 학살은 전부 3군데에서 일어났어요. 첫번째는 호지에우 할아버지가 사는 고자이 마을이고, 두번째는 내가 사는 이 마을, 그리고 세번째는 우리 마을 외곽 변두리에서 일어났지.

남조선 군대는 그날(할아버지는 음력 3월 11일로 기억하고 있었으나 정부 공식 자료에는 양력 2월 23일로 기록됨, 양력과 음력을 병용하는 데서 오는 오류인 듯함)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 여기로 와서 사람들을 죽였어. 여기서만 90명이 죽었지. 그런데 이상한 건 그해 음력 1월 22일과 2월 5일에도 남조선 군대가 마을에 들어왔어. 하지만 사람들을 죽이지는 않고 포탄으로만 공격했지."


한국군은 시체들을 태우고 유유히 사라졌고 사람들은 시신을 수습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고 했다. 마을 사람이 대부분 죽었으니 유가족이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때문에 썩은 시체를 짐승들이 뜯어먹는 지옥같은 광경이 펼쳐졌다고 한다. 또한 당시 생존자도 심각한 상처를 입고 있었기에 오래 살아남지 못했다고 했다.

"슬픈 과거일 뿐... 한국사람 원망하지 않아"

두 할아버지에게 조심스레 한국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혹여나 아직까지 원망하진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였다. 그러나 두 할아버지의 말씀은 의외였다.

"슬픈 과거가 다시 돌아오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지. 슬픈 과거는 더 좋은 미래를 위해서 희생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네. 나는 요즘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네. 한국에서 우리 마을에 학교나 병원을 세우고 지원하는 모습을 보니, 큰 원망도 조금씩 사그라지더군. 한국 사람을 더 이상 원망하고 있지 않다네."

실제로 한국 정부는 빈딩성 떠이선현에 중형 규모의 병원을 건설하고 있고, 고자이 마을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떠이안 초등학교'를 지원하고 있다. 또한 대 베트남 개발원조를 대부분 전쟁 피해가 크고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이 벌어진 베트남 중부 지역에 집중하고 있다.

두 생존 할아버지들과 인사하고 나오는 길에, 지금까지 묵묵히 계셨던 또 다른 생존 할아버지가 나무가 우겨진 모퉁이를 가리키며, 가족들이 저기 숨어있다가 방공호를 덮었던 볏짚에 불이 붙는 바람에 모조리 타 죽었다고 말했다. 그 슬픈 장소를 곁에 두고 40여년을 살아오셨던 분들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차를 타고 다시 고자이 마을로 돌아오는 길에 호지에우 할아버지가 내 손을 말없이 잡았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 푸석한 손끝에서 화해와 용서 그리고 이해가 담긴 할아버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또한 한국인이기 때문에 느끼는 죄책감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한국정부, 민간인 학살 공식 사과해야

▲ 고자이 학살 생존자, 호지에우 할아버지(오른쪽)와 쩐남 할아버지(왼쪽).
ⓒ 김효성
보통 베트남 사람들은 한국군 민간인 학살에 대해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면 "과거일 뿐이고 전쟁 상황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면서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다. 또 내가 이번에 만난 유족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사랑하는 자기 가족이 무고하게 살해당했는데, 그 누가 쉽사리 용서할 수 있겠는가? 결국 그들의 마음을 풀어나간 것은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기억하고 잘못을 반성하는 수많은 한국인이었다. 또 한국 정부의 지속적인 노력 또한 큰 도움이 되었다.

물론 아직 턱없이 부족하다. 지금보다 더 많은 한국 사람들이 베트남에서 일어난 만행의 진상을 알아야 할 것이다. 또 정부의 노력 역시 공식적인 사과로 이어져야 하고, 베트남전 참전이 한국군의 용맹을 알리며 경제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내용을 교과서에 삭제해야 할 것이다.

참전으로 베트남 사람들을 고통 받게 하고 한국의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피로 얼룩진 돈으로 이룩한 경제성장을 자랑하는 어이없는 광경을 더는 지켜볼 수 없다.

이번 취재에 동행했던 당응우웬푹(34) 뀌년직업기술대학 영어교사는 뀌년시로 돌아오는 길에 넌지시 말했다. 그는 큰아버지를 한국군에게 잃었다.

"민간인 학살은 과거일 뿐이다. 당시 한국 군인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 다음 세대를 위해서 짚고 나가야 할 문제임에는 틀림없다."

▲ 쩐남 할아버지 마을 위령탑.
ⓒ 김효성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 기획취재기자단 기사입니다.


태그:#고자이 마을, #베트남 민간인 학살, #미라이 학살, #주월한국군, #맹호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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