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5년 10월 1일 청계천 '새물맞이' 행사 전 동대문운동장 풍물벼룩시장에서 만난 상인들.
ⓒ 오마이뉴스 강이종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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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11월에 동대문 운동장이 철거된다고 한다.

서울시는 그 자리에 '자연친화적인 공원과 디자인 콤플렉스가 결합된 디자인 타운'을 건립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리고 고척동에 2만명 수용 규모의 대체용 야구장과 구의동, 난지지구, 공릉동 등에 어린이를 위한 간이 야구장을 짓는 것에 대해 대한야구협회와 협약을 했다고 밝혔다.

야구인과 야구를 사랑하는 시민들이 반대를 했지만 서울시는 뉴타운 개발의 연장선에서 완강하게 밀고 나가는 것 같다.

축구장에 테니스장, 수영장, 야구장, 마술장...

동대문운동장은 말 그대로 종합운동장이었다. 축구장이 일제 때인 1926년 경성운동장이란 이름으로 처음 만들어졌고, 1934과 1936년에는 뒤쪽에 테니스장과 수영장이 만들어졌으며, 야구장은 1959년에 건립되었다.

이 곳은 우리나라 스포츠의 메카이며 스포츠 타운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 격동의 시간 속에서 스포츠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이 부족할 때에 이런 복합 스포츠 타운이 만들어진 것은 시대를 앞선 대단한 구상이 아닐 수 없었다. 내 기억으론 수영장 옆에 마장마술장도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급속한 산업화의 물결 속에 동대문운동장은 운신의 폭이 좁아졌다. 대형 건물들이 거침없이 밀고 들어왔고, 대체할 운동장들이 도심 언저리 곳곳에 만들어졌으며, 교통문제와 주변의 협소함 등으로 차츰 제 기능을 유지하기 힘들어져 갔다.

수영장, 테니스장은 이미 없어졌고, 축구장은 제 구실을 하지 못하게 돼버렸다. 남은 공간은 주차장과 야시장으로 바뀌는 수모(?)를 당하는 가운데, 그나마 야구장만이 학원 야구대회를 여는 정도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도심 한가운데 있는 이 건물들이 이제 거추장스런 존재가 된 것이다. 예전의 영광은 먼 추억이 되어버렸다.

서울 토박이들은 물론이고 서울에서 30~40년 정도 산 시민들이라면 동대문운동장에 대한 기억 한두 가지는 가지고 있을 것이다. 5월 5일 어린이날이면 동대문 축구장에서 매년 행사가 벌어졌다. 국제 시합이나 그 당시 국가대표 1군, 2군이었던 청룡팀과 백호팀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성동원두(동대문운동장이 있는 지역의 옛 별칭)는 들썩거렸다.

정치적인 냄새가 짙게 배었던 행사로 지금은 없어진 박스컵이란 축구대회가 열리면 이회택·박이천·이세연·김호·김정남, 정강지 등 기라성 같은 축구 스타들을 보려고 시민들은 동대문으로 삼삼오오 몰려들었으며 그들의 화려한 움직임에 관중들은 한마음으로 열광을 했다.

'동대문운동장 키드', 아직도 그날의 흥분이...

 올 11월에 동대문 운동장이 철거된다. 동대문운동장 한쪽에 만들어진 풍물시장도 철거와 함께 사라질 예정이다.
ⓒ 오마이뉴스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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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야구장은 국제경기보다 국내 경기의 메카였다.

왕십리에 살던 나는 '동대문야구장 키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직 야구를 보고 싶은 마음에 초등학생 시절 할아버지께 용돈을 반강제로 타내어 동대문야구장까지 걸어간 뒤, 야구 경기를 보았으니 말이다. 그늘 없는 태양볕 아래에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것도 모른 채 콘크리트 좌석에 앉아 경기에 몰입했다.

김우열 선수가 150m짜리 엄청난 장외 홈런을 날리는 것도 보았고, 제일은행팀 이종도 김차열 김우열 김태석 4타자 연속 홈런이라는 역사적 기록의 현장을 함께 했다.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는 건국대의 조종규가 한양대를 상대로 9회말 역전 굿바이 홈런을 날리는 것도 생생히 보았다. 그 때의 그 흥분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교야구를 빼놓을 수 없다. 고교야구의 황금기는 동대문야구장과 함께 했다. 남우식·이선희·임신근·황규봉·우용득 정현발 배대웅 등 기라성같은 스타를 배출한 경북고의 전성시대가 있었고, 군산상고의 김봉연·김일권·김준환·송상복 등이 연출한 대역전극의 드라마도 동대문야구장이었으며, 경남고의 최동원, 경북고의 김시진, 군상상고의 김용남 등 당대의 '강속구 3총사'도 그 곳에서 자웅을 겨루었다.

사실 70년대는 고교야구가 우리나라 야구계를 평정했었다. 대학야구와 실업야구는 고교야구를 위해 근근이 존재할 뿐이었다. 기현상이 아닐 수 없지만 엄연한 사실이었다. 심지어 실업야구는 하도 관객이 오지 않으니까 공짜로 입장시킨 적도 있었다.

그 당시 고교야구의 인기는 지금의 프로야구보다 더욱 열광적이었다. 운동장을 입추의 여지가 없이 가득 매운 관중들의 함성은 물론이고, 동네 골목마다 집집마다 텔레비전과 라디오에 시선과 귀를 기울이며 딱 소리가 나면 와하고 소리를 질러대곤 했었다.

마니아부터 동네 아저씨, 백수까지 모여앉았지

동대문야구장은 서울 시민들의 애환이 묻어 있는 뜻깊은 장소이다. 야구에 미친 마니아들도 있었고, 일상에 지친 군상들이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목이 터져라 동문을 응원하고, 왕년에 운동 좀 했던 노인네들이 전문가 뺨치는 해설을 늘어놓은 곳이다.

소주 한 잔 걸치고 걸쭉한 입담으로 스트레스 해소하는 아저씨들도 있었고, 하릴없이 소일거리로 그러한 풍경을 넌지시 구경하는 백수들도 있었다. 그렇게 서민들의 진한 삶이 묻어 있는 곳이었다. 그 곳엔 승리의 환희와 패배의 낙담이 동시에 공존했었다.

미국 뉴욕에는 양키스타디움이 있다. 1923년에 지은 구닥다리 경기장이다. 그리고 1914년에 지은 시카코 컵스의 구장인 리글리 필드가 있고, 디트로이트엔 1912년에 지은 타이거스 스타디움이 아직도 건재하게 그 자리에 있다.

모두 다 보강도 하고 증축도 하여 모양은 많이 바뀌었지만 그 자리만은 굳게 지키고 있다. 또한 일본 오사카엔 우리에게도 유명한 고시엔 구장이 있다. 그 운동장 역시 1924년에 완공한 유서 깊은 구장이다.

이들 구장은 이제 그들의 역사가 되었다. 시민들의 일상의 애환과 같이 살아온 추억이다. 할아버지가 손자를 데리고 양키스타디움을 찾아 자신이 어릴 때 미키 맨틀이 160m짜리 홈런을 치는 걸 보았다며 그 때의 흥분을 되살리며 자랑을 한다.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서울 송파구 올림픽주경기장과 잠실실내체육관, 잠실야구장. 예전에는 동대문운동장이 스포츠의 메카였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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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동대문야구장은 지금 개발의 논리에 따라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다. 이 거대한 서울은 언제까지 개발의 목적물이 되어야 할지 그 끝이 안 보인다. 그곳에 친환경적인 공원이 들어선다고 서울의 환경이 좋아질지 의문스럽다.

사실 서울에는 녹지 공간이 많이 있다. 서울 중심에 우뚝 솟은 남산은 세계 어느 나라의 도시에도 없는 넓은 녹지이다. 그리고 한강이 흐르고 북한산, 도봉산, 관악산, 등을 위시한 크고 작은 산들이 서울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더 이상의 녹지 공원 운운하는 것은 개발론자들의 변명에 불과할 뿐이다.

우린 양키스타디움 같은 꿈의 구장 못 만드나

동대문야구장은 대대손손 보존되어야 한다. 운동장 건물이 흉하다면 디자인을 고풍스럽게 꾸며 단장하면 되고, 객석 아래 공간에 야구 박물관을 만드는 방법도 강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서울도 양키스타디움 같은 꿈의 구장을 만들 수 있는 넉넉함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어느 누가 하는 게 아니다. 바로 사람이 만들어 가는 것이다.

스포츠도 엄연한 문화이다. 그 문화를 유지하기 위해선 무대가 필요하다. 무대는 곧 경기장이다. 역사와 같이 한 경기장이라면 그 문화는 값진 우리의 보물이 될 것이다.

먼 훗날, 내가 할아버지가 되었을 때 손자의 손을 잡고 지하철을 타고 동대문야구장을 찾아간다고 생각해보자. 나는 아마 이렇게 손자에게 말할 것이다.

"할아버지가 너만 할 때 김우열이란 선수가 있었단다. 덩치는 작았지만 아주 대단한 선수였지. 어느 날 그 선수가 저기 왼쪽 담장 너머 장외로 홈런을 때렸단다. 대단했었지. 공은 아주 멀리 날아 보이지도 않았으니까. 허허허…."

야구 동대문운동장 추억 풍물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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