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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학기 인문학 강좌에서 수업을 듣고 있는 노숙인들
ⓒ 노숙인다시서기지원센터

"11년 전 빈곤에 대한 책을 쓰기 위해 취재 중이던 초로의 미국 작가는 뉴욕의 한 교도소에서 살인 사건에 연루돼 8년째 복역 중인 여죄수와 마주 앉았다.

'사람들이 왜 가난하다고 생각하느냐'는 작가의 질문에 20대 초반의 이 여죄수는 '정신적 삶이 없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여죄수의 말이 종교를 뜻하겠거니 생각한 작가가 심드렁하게 '정신적 삶이 뭐냐'고 묻자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극장과 연주회, 박물관, 강연 같은 거죠.'
'아, 그러니까 인문학을 말하는 거군요!'

깜짝 놀라는 작가를 여죄수는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며 대꾸했다.

'그래요. 인문학.'"- <동아일보> (2006년 1월 18일)


1995년 얼 쇼리스가 빈민을 위한 인문학 과정인 '클레멘트 코스'를 만들게 된 계기다. 빈민에게 필요한 것이 '빵'이라고만 생각한 사람들에게 '빈민의 인문학 과정' 개설은 큰 충격이었다.

노숙인다시서기지원센터 임영인 소장이 2005년 노숙인을 위한 인문학 과정인 '성 프란시스 대학'을 만들었을 때도 마찬가지. 사람들은 배부른 행동이라며 손 사레를 쳤다. 임 소장은 "한두 번의 이벤트 사업으로 보는 분도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그 해 20여명의 노숙인이 '성 프란시스 대학'의 문을 두드렸다. 최종 수료자는 13명. 예상 밖의 높은 졸업률이었다.

이듬해엔 17명이 뽑혀 그 중 11명이 수료했다. 그리고 올해 3월 21일 제3기 입학식이 열린다. 최종 합격자는 21명. 30명이 응시해 아홉 명이 떨어졌다. 1년이란 긴 과정을 함께 할 수 있는 의지, 무리 없는 공동체 활동, 정신 장애 부분, 음주 등에 대한 꼼꼼한 면접을 통해 뽑았다. 대학 다닌 경험이 탈락 사유가 되기도 한다. 이들은 자신이 무엇을 안다고 생각해서 강의 분위기를 해치는 경우가 자주 있다고.

응시 동기는 다양하다. '심심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만들고 싶어서', '체계적인 글을 쓰고 싶어서' 등의 이유들이 나왔다. 성 프란시스 대학 담당자 김자옥씨는 "'심심해서'라고 응답한 노숙인이 모범적으로 학기를 마쳤다"고 귀뜸했다.

빈민·노숙인에게 인문학을...

이번 입학생 중 눈에 띄는 사람은 1기때 탈락했다 응시한 A씨. 철학을 통해 자신을 응시하게 되면서 너무 괴로워했던 A씨는 결국 다시 인문학 과정의 문을 두드렸다.

오랫동안 노숙생활을 했기 때문에 수업시간에 일어나는 갈등도 많다. 가장 대표적인 일은 '토론' 수업에서 '틀림'과 '다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학생들 간에 이견이 생기면 '다르다'가 아니라 '나쁘다'고 받아들이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이 때문에 학생들 간에 치고받고 싸운 적도 있다. 또한 누군가 질문을 하면 "유치한 질문을 한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수업하는 도중에도 "수업 듣기 싫다, 내용 바꿔 달라"고 직설적으로 요구하는 일도 벌어진다. 하지만 그런 학생들을 통해 교수들도 많이 배운다고 한다. 강단에서 듣기 힘든 생생한 삶의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수업은 모두 여섯 과목. 현재 김문환(서울대 미학과 교수), 박남희(철학아카데미 대표), 박한용(민족문화연구소 교수), 최준영(도시평론가) 등 네 명의 교수진이 꾸려진 상태고 두 명은 찾고 있는 중이다. 지난 학기와 크게 달라진 점은 철학 비중이 커진 점. 한 과목에서 두 과목으로 늘었다.

인문학 과정 이수를 통해 생긴 긍정적인 변화는 노숙인들이 삶에 적극적인 태도를 갖게 됐다는 것. 1·2기 수료생들은 대부분 일자리를 찾았다. 경비원이나 운전사를 비롯, 트럭운전면허를 따서 자동차를 몰고 다니는 이도 있다. 택배나 퀵서비스, 또는 북한자전거보내기사업단 직원 등 분야도 다양하다.

대학 담당자 김자옥씨는 "신청서를 쓰러 일부러 센터까지 온다는 것 자체가 노숙인들에게는 대단한 일"이라면서 "수업을 꼬박꼬박 참석한다는 것은 무척 고무적인 일"이라고 평가했다.

임영인 소장은 "이전에 노숙인이 없는 사회를 바랬지만 그것이 요원한 일이라는 생각도 있다"면서 "그래서 노숙인들이 조금 더 당당하게, 조금 더 행복하게 사는 일을 고민하는 도중 인문학 강좌를 개설하게 됐다"고 의미를 설명했다.

성 프란시스 대학 입학식은 21일 오후 4시 성공회대학교 성 미카엘 성당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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