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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한낮의 열기가 덜 식기는 했지만 달리는 오토바이 뒤에 앉아 맞는 하노이 바람이 시원하다. 낡은 오토바이가 요란한 굉음을 낸다. 도대체 이걸 얼마를 주고 샀을까? 그래도 이걸 사려고 끼니까지 걸러가며 무진 애를 썼으리라 생각하니 아이의 뒷모습이 너무 안쓰럽다.

오랜만에 만났다고 호텔 앞에서 나를 보고 반가워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을 일행이 있어 어정쩡한 모습을 보였는데 마음에 상처를 받지는 않았을까 못내 미안하다.

아이가 길 옆에 오토바이를 세우고는 나보고 잠깐 기다리라고 한다. 어디를 가느냐고 물으니 집에 가서 무엇 좀 가져 온다고 해서 왜 집앞까지 오토바이를 타고 가지 않느냐고 물었다.

아이는 머리를 긁적이며 어물어물하는데 아마 내게 집을 보여주기가 부끄러워 그러는 모양이라고 짐작했다. 혼자 사느냐고 물었더니 그렇다며 집이 더럽단다. 나는 괜찮으니 집에 가서 차가 있으면 한잔 달라고 했다. 의기양양하게 차는 있다며 웃는다.

다시 오토바이를 타고 길옆 둑방을 넘어가는데, 세상에 그 길을 저 혼자 걸어서 갔다 왔으면 나는 삼십 분은 족히 기다릴 뻔했다. 사람 하나 겨우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좁은 골목길을 오토바이를 타다 끌다 들어가는데, 옆으로 악취가 나는 하수가 맨땅 위로 흐르고 집집이 대문이 아닌 거적때기 같은 것이 걸쳐져 있다. 빈민촌이리라.

그의 집은 하늘만 겨우 가린 창고 같은 곳이었다. 두 평이 될까. 한쪽 구석에 나무로 짜서 만든 침대(?) 같은 것이 하나 있고, 벽에 걸어놓은 선반에 그릇 몇 개와 수저들이 있고 수도도 부엌도 따로 없었다.

세상 어디에나 가난한 사람들은 있고 우리나라 역시 빈민들은 있겠지만 생각보다 참혹한 모습이었다. 그 아이의 밝은 얼굴이 이곳에서 밤을 보내고 나온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그가 만들어 준 정체불명의(?) 차를 마셨다.

이 년 전 처음 만났을 때 이름이 '빡(발음이 박과 빡 사이인 것 같았다)'이라는 그 아이는 릴렉스 바 앞에서 구두를 닦고 있었다. 당시에는 하노이에 가면 주로 멜리아 호텔에 묵었는데 술도 여흥도 즐기지 않을 뿐더러 일요일도 없이 일하는 딩이 저녁식사 후 집에 가면 참 무료한 시간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호텔 주위를 어슬렁거리다가 가게 된 곳이 릴렉스 바였다. 걸어서 가기 편하기도 했지만 2000원짜리 맥주 한 병을 시켜놓고 사람구경 하기가 좋았다.

▲ 초창기에 자주 묵었던 멜리아 호텔의 응접실.
시설에 비해 가격이 싸긴 하지만 가격변동이 심해 확인해야 한다.
ⓒ 유원진
어느 날 한 아이가 구두를 닦으라고 하는데 커다란 눈을 가진 사내아이는 구두닦기에는 좀 나이가 많은 듯 보였다. 하노이 시내에서 구두를 닦는 아이들은 대부분 나이가 어린 아이들이고 구두를 닦는 솜씨가 나만도 못하여 그냥 먼지나 털고 구두약을 바르는 정도지 우리나라 솜씨에는 비교도 안 되어서 반짝이는 광내기는 못하나 보다 하였는데 정성들여 구두를 빤짝거리게 닦는 것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그렇게 몇 번인가 구두를 닦았는데 어느 날인가 외국인과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고 영어를 할 줄 아느냐고 물었더니 '조금'이라고 하는데 서툴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의사소통은 가능했다.

생판 처음 만나는 서양 아이들과의 시답잖은 수다 떨기가 지루해질 때쯤이면 그 아이를 불러놓고 이것저것 이야기를 했다. 결정적인 물음에 못 알아들었으면서도 무조건 알아들은 척을 해서 가끔 황당하기는 했지만 먹고사는 이야기는 나눌 만했다.

어느 날 맥줏값을 계산하려고 지갑을 보니 베트남 '동'은 한 푼도 없고 설상가상 달러도 100달러짜리밖에 없었다. 베트남에 있을 때면 같이 다니면서 항상 딩이 모든 계산을 하여 돈 쓸 일이 거의 없다 보니 신경을 느슨하게 한 탓이었다.

바도 달러를 받지만 고액권을 내면 엄청난 환전손실을 보게 마련이어서 잠깐 생각하다가 밖으로 나가 그 아이에게 돈을 바꾸어 오라고 시켰다. 빡은 커다란 눈으로 잠깐 나와 돈을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는데 바가 끝날 시간이 되도록 거의 한 시간이나 흘렀는데 돌아오지 않았다.

지배인을 불러 지금 돈이 없으니 내일 와서 주겠다고 하자 선선히 그러라고 하더니 아까 빡에게 뭘 주었느냐고 묻는다. 별거 아니라고 하고는 그 아이를 잘 아느냐고 물었더니 구두 닦는 아이들은 워낙 위치변동이 심해서 이름만 안다고 하는데 눈빛은 '내가 그래도 명색이 지배인인데 그런 아이들과 통성명하며 지내겠느냐'는 말투다. 공산주의가 무색하다. 그러면서도 단골이 된 내게 호감을 표시하는 것은 잊지 않은 듯 오늘 마신 것은 자기가 계산할 테니 신경 쓰지 말란다. 고맙다고 하고는 호텔로 돌아왔다.

샤워를 하고 자리에 누웠는데 프런트에서 어떤 베트남 아이가 찾아왔는데 어떻게 할거냐고 인터폰이 왔다. 잠깐이나마 그를 의심했던 것을 떨쳐버리기라도 하듯 나는 올려 보내라고 하고는 서둘러 옷을 입었다.

돈을 바꾸러 다니면서 생전 처음 만져보는 백 달러 때문에 그 아이는 예상치 못한 곤경에 처했고 아는 형들의 도움을 받아 보석가게에서 겨우 바꾸어 올 수 있었다고 더듬거리며 돈을 내밀었다. 나는 늦은 시간과 아이의 현실을 무시한 나의 경솔함을 뉘우쳤다.

그러면서 혹시 내 마음 속에 그를 시험해보고 싶은 얄팍한 생각이 없지는 않았는지에 생각이 미치자 한없이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돈은 은행보다 훨씬 높은 환율로 바꾸어 왔다. 심부름값이라며 내밀자 받지 않는다.

우리는 그날 밤 새벽까지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 아이가 사는 이야기, 듣고 싶어하는 한국이야기, 특히 그중에서도 같은 나이 또래 한국 아이들이 사는 모습을 알고 싶어했고 눈을 반짝이며 신기한 듯 이것저것 묻는 아이는 아주 영리했다.

내가 잠자리에 들려고 하자 일어서며 아이가 머뭇거리기에 말해보라니까 '빠빠'라고 불러도 되느냐고 했다. 아빠라는 뜻이리라고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때부터 빡은 나를 빠빠라고 부른다.

작년에 만났을 때 아이에게 구두 닦는 일보다 나은 일을 해야 한다고 했더니 오토바이를 사면 일을 많이 할 수 있다고 하며 돈을 모으는 중이라고 했는데 이 나라에서 오토바이는 우리나라 가격의 두 배가 넘는다. 아무리 중고라 해도 칠십만원은 줘야 산다는데 그게 아이에게 가능하겠는가 했는데 다 썩은 것일망정 오토바이를 산 것이다.

▲ 하노이에는 마티즈가 많다. 가격도 천칠백만원이나 한다고 한다.
ⓒ 유원진
차를 마시고 일어서며 시계를 보니 아홉 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호텔로 찾아온 아이를 따라 시원한 바람을 쐬기는 했지만 호텔로 돌아가기는 좀 이르다. 그의 눈이 나보고 어디로 갈 거냐고 묻는다. 딱히 갈 곳이 없어서 머뭇거리니까 빠빠가 좋아할 만한 바가 있다면서 타라는 눈짓을 한다.

'오늘 저녁은 바는 싫다. 바 말고 딴 데 가자'고 했더니 그럼 친구들 만나기로 했는데 같이 가겠느냐고 묻는다. 나를 바에 내려다 주고 친구들을 만나기로 했다는 거다. 너희와 어울릴 나이가 아닌데 친구들이 재미없어 하면 어쩌느냐고 물었더니 괜찮단다. 갑자기 여기 아이들은 만나면 뭐하며 시간을 보내는지가 궁금해졌다.

큰길로 나와 달리기 시작하자 빡이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데 얼마 전에 우리나라에서도 어렵지 않게 들었던 것을 기억하되 중간에 이러한 구절이 있었다.

고 고 고 알레알 레알레∼ 고 고 고 알레알 레 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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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싶었으나 꿈으로만 가지고 세월을 보냈다. 스스로 늘 치열하게 살았다고 생각해왔으나 그역시 요즘은 '글쎄'가 되었다. 그리 많이 남지 않은 것 같기는 해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많이 고민한다. 오마이에 글쓰기는 그 고민중의 하나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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