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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에서 예고한 바 있듯이, 흥선대원군은 비록 형식적인 군주는 아니었지만 고종 즉위(1863년) 시기부터 최익현의 탄핵상소(1873년) 시기까지 조선의 대권을 장악한 실질적 군주였으므로, 그도 동아시아의 군주에 포함시켜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간과된 측면들을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한다.<기자 주>

▲ 서울 종로구 소재 운현궁의 유물전시관에 소장된 이하응 영정.
ⓒ 김종성
국난의 위기에 맞서 저항하다가 장렬한 최후를 마친 인물들은 한국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영웅 대우를 받고 있다. 성웅 이순신도 그러하고 계백도 그러하며 삼별초 집단도 그러하다. 이들은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그 삶의 자세 때문에 후세 한국인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런데 이 점과 관련하여 많은 한국인들은 한 가지 논리적 모순을 범하고 있다. 똑같이 국난의 위기에 맞서 저항한 인물인데도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년)에 대해서만큼은 '쇄국주의자'라는 부정적 평가가 여전히 상당한 힘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모순이 생기는 이유는 본질적으로 한국이 아직도 19세기 역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한국인들이 이순신·계백·삼별초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은 그 시대와 현대 한국이 이해관계를 달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한말이나 일제시대의 이해관계가 아직도 이어지고 있기에 한국 사회는 지난 100여년간의 역사에 대해서 여전히 '감정'을 갖고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미국·일본과 정치적·경제적 이해관계를 갖고 있거나 그런 사람들과 직간접적 관계를 갖고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미국 등에 맞서 '말도 안 되는 자주'를 외친 대원군이 그리 곱게 보일 리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 이해관계를 떠나 대원군 시대를 객관적으로 관찰하면 그에 대한 종래의 평가가 상당히 편파적일 뿐만 아니라 몰역사적이라는 사실을 짐작하게 될 것이다. 대원군에 대한 선입견 몇 가지를 언급한 뒤에 논의를 계속하기로 한다.

첫째, 대원군은 서양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 인물이었을까? 역사적 사실에 따르면 대원군은 오히려 서양에 대해 상당히 '인간적인 태도'를 취한 인물이었다.

1866년 미국 선박 서프라이즈호가 조선 연해에서 조난을 당하자, 대원군 정부는 조난 선박을 구조하고 인도적으로 대우함으로써 서양에 대해 유화적 태도를 과시하였다. 또 신미양요(1871년) 시기에도 대원군 정부는 조난당한 프러시아(독일) 선박을 구조하고 인도적 조치를 베푼 적이 있다.

미국 등이 조난 선박 구호의 제도적 정착을 위해 조약 체결을 요구했을 때에 대원군은 "조약을 체결하지 않더라도 조선의 국내법에 의해 조난선박을 얼마든지 구휼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하였다. 이처럼 대원군은 기본적으로 서양에 대해 아무런 반감을 갖고 있지 않았다. 병인양요·신미양요 시기의 강경 대처는 프랑스·미국이 조선의 주권을 침해한 데에 따른 합법적 대응이었을 뿐이다.

둘째,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과연 어리석은 것이었을까? 대원군에 대한 비판자들은 마치 대원군 혼자만 쇄국정책을 단행한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19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조선·청나라·일본 3국은 기본적으로 쇄국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대원군은 동아시아 전통시대의 일반적인 국제정책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서양세력이 조선 진출을 시도한 1860년대의 관점에서 볼 때, 서양에 대한 문호개방은 단순한 문화교류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1840년에서 1860년에 걸친 두 차례의 아편전쟁에서 잘 드러난 것처럼 서양에 대한 문호개방은 국가주권을 일정 정도 훼손당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당시 상황에서는 문호개방을 통해 조선이 근대화될 것이라는 보장을 기약할 수 없었다.

문호개방은 기본적으로 개방하는 쪽과 들어오는 쪽이 상호 공존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을 때에 가능한 것이다. 들어오는 쪽의 국력이 압도적으로 우세하다면, 그때는 문호개방이 아니라 '주권개방'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척화비를 세울 당시의 대원군으로서는 밀려오는 서양세력으로부터 조선의 국권을 지키는 것이 일차적인 과제였다. 서양세력이 동아시아 최강 중국까지 굴복시키고 중국에 대해 치욕을 강요하는 것을 지켜본 그로서는 '서양세력이 조선에 들어오면 조선이 근대화될 것'이라는 전망을 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중국이 서양에게 당하는 것을 보고도 '저 서양세력을 조선에 끌어들여 조선을 근대화시켜야 하겠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 사람이 오히려 이상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서양과 좀 더 일찍 손을 잡았더라면 한국이 일본보다 더 빨리 근대화되었을 것이라는 '원망'은 다분히 현대적 관점을 전제로 한 것이다. 아편전쟁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당시 조선인들의 입장에서는 서양은 근대화를 '가져오는' 존재가 아니라 국권을 '가져가는' 존재로 비쳐질 수밖에 없었다.

대원군이 서양에 맞선 것은 서양에 대한 문화적 거부감 때문이 아니라 당장에 나라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감 때문이었던 것이다.

병인양요·신미양요가 문호개방 자신감의 원동력

셋째, 1882년 이후의 문호개방은 전적으로 고종과 명성황후에 의한 것이었을까? 조선이 1882년부터 미국·영국·독일 등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것은 기본적으로 '서양과 수교해도 국권을 잃지는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럼, 그런 자신감의 출발점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대원군 시기의 병인양요·신미양요를 통해 '서양의 군사력이 생각보다 그리 강하지 않은 것 같다'는 판단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런 판단을 배경으로 조선이 문호개방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개화파 박규수(朴珪壽, 1807~1877)가 처음에는 대원군과 함께 척화정책을 주도한 적이 있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평양감사로서 제너럴셔먼호 격침(1866년)을 주도하고 신미양요를 지켜본 박규수가 1871년 이후로 개화노선을 걸은 것은 기본적으로 '서양의 군사력이 생각보다 위협적이지 않다'는 판단을 전제로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볼 때, 대원군의 군사적 대응은 서양의 군사력을 파악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조선이 1880년대에 서양과 수교를 하는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1866년(병인양요)과 1871년(신미양요)의 경험이 없었다면 고종과 명성황후도 문호개방을 쉽게 결정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위와 같이 편견과 선입견을 제거하고 대원군을 올바로 바라보면 대원군은 중국이 서양에 의해 주권침탈을 받는 상황 속에서 중국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서양에 대해 주권적이고 원칙적 대응을 취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의 군사적 대응이 밑거름이 되어 조선은 서양의 군사력이 생각보다 위협적이지 않다는 점을 깨닫게 되고, 이러한 자신감이 바탕이 되어 1882년 이후로 문호를 개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원군이 서양을 잘 이용했으면 한국이 보다 일찍 근대화될 수 있지 않았겠느냐'고 비판하는 것은 마치 시청자가 드라마 주인공을 나무라는 것과 같은 일이다.

시청자는 드라마 속의 모든 상황을 내려다보는 관찰자라고 할 수 있다. 드라마 속 주인공이 모르는 사실도 시청자는 다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드라마 속 인물을 두고 '저것도 모르냐'느니 혹은 '다른 인물들의 속셈을 저토록 모르냐'며 분개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구한말 역사의 전후관계를 모두 알고 있는 현대인들이 대원군의 '단견'을 욕하는 것은 바로 그처럼 '어리석은 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대원군이 많은 한국인들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는 보다 본질적인 이유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바로 대원군이 미국·영국·프랑스·일본 라인의 조선 진출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미국이 영국·일본의 지원을 받아 세계정책을 수행하고 있으며 그 미국이 한국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상황 하에서, 지난 19세기말에 그 라인을 대상으로 저항정책을 수행하고 심지어 군함까지 격침시킨 대원군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어쩌면 과도한 욕심일 것이다.

만약 프랑스·미국보다 러시아가 먼저 조선을 불법 침략하고 그에 맞서 대원군이 러시아를 물리쳤다면 오늘날 대원군에 대한 평가가 확연히 달라져 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동아시아에서는 러시아의 남진에 맞서 영국·미국·프랑스·독일·청나라·일본이 공동 전선을 펴고 있었다. 영국 등의 입장에서 보면, 러시아에 대한 저항은 선이고 영국 등에 대한 저항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으로 간주되던 세상이었다.

그러므로 러시아를 물리친 다음에 서양의 군사력 실상을 파악하고 그런 뒤에 미국·프랑스·영국 등을 평화적으로 맞이하였다면, 대원군의 이미지는 아마도 180도 달라졌을 것이다.

그런데 대원군은 동아시아에 진출한 서양세력 중 주류라 할 수 있는 영국·미국 라인을 건드렸고 그 라인이 지금까지도 동아시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에 객관적 평가를 받기가 힘든 것이다. 또 대원군 정부 때에 서양세력과 함께 패배를 경험한 바 있는 기독교 세력이 현대 한국 사회에서 주류적 위치에 있다는 점도 이 문제와 관련하여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 사회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당시 상황에 대한 역사적 지식이 부족한 탓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팍스 아메리카나가 동아시아를 지배하는 시대적 한계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똑같이 외세에 맞서 싸운 쪽인데도 이순신·삼별초 등에 대해서는 극찬을 하면서 대원군에 대해서만큼은 폄하를 주저하지 않는 것은 한국 주류사회 내의 사대(事大) 그룹이 여전히 서양에 대해 의존적 태도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무역협정(FTA)·전시작전통제권 등의 측면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온존시키고 그것을 통해 기득권을 연장하려는 사회세력이 있기에, 외세에 맞서 정당한 투쟁을 벌인 흥선대원군을 '쇄국주의자'로 폄하하는 목소리가 여전히 힘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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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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