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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수레를 밀고 하노이 공항 입국장 문을 나오는데 딩이 두 팔을 벌리고 활짝 웃고 있다. 컴퓨터와 전화로 자주 업무와 안부를 교환해도 사람은 역시 이렇게 만나서 가슴을 맞대야 반갑다.

그는 나를 형이라고 부른다. 그가 할 줄 아는 한국말 중에 제일 좋아하는 말이라는데 하노이 시내를 운전하고 다니다가 위험하게 끼어드는 오토바이를 보면 '미쳤네'라는 말도 곧잘 한다. 가끔 이쁜 짓을 할 때 내가 베트남말로 '깜언'(고맙다는 뜻)하면 천연덕스럽게 한국말로 '천만에요'하며 능청을 떤다.

@BRI@2002년 하노이 박람회장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월남전 당시의 월맹군이 전투복 대신 양복으로 갈아입은 모습이 저럴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넥타이를 맨 양복차림은 어색했고 영어는 어눌했으며 상담을 하는 태도 역시 초보임이 분명한, 어딘가 좀 엉성한 비즈니스맨이었다. 하기야 필자 역시 얼치기 장사꾼이었으니 그리 보였는지도 모를 일이긴 하다. 그러나 눈빛만은 살아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박람회장 한쪽에 부스를 얻어 상품을 진열하고 영업을 시작한 날인가 그 다음날인가 부스 앞을 몇 번 오가며 망설이던 그가 물건 하나를 짚더니 이거 진짜 한국산 맞느냐고 물어보는 걸로 상담을 시작했다. 저녁에 그는 호텔로 나를 찾아왔다. 그 처음 만남이 의형제를 맺게 되는 인연의 시작이었다. 단돈 100달러를 밑천 삼아 벌인 사업을 시작하는 해이기도 했다고 그가 나중에 말해주었다.

2007년 현재 그는 1800cc급 도요타 자동차(베트남에서는 수입차에 대한 높은 관세 때문에 한화로 4천만원이나 한다)를 타고 고급양복을 입고 다닌다. 최신형 핸드폰을 두 개나 들고 하루 종일 국내외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느라 정신이 없는 멋쟁이 비즈니스맨이 되었다.

▲ 하노이에서의 운전은 예술이다.
ⓒ 유원진
저녁을 먹는 중에도, 이야기를 하다가도 하루 종일 울려대는 그의 전화에 내가 눈살을 찌푸리면 코맹맹이 소리가 조금 섞인, 그러나 분명한 한국말로 "형"하면서 애교를 부린다.

사업규모가 커지기도 했지만 돈을 벌게 되면 필연적으로 인간을 따라오는 거만함이 그에게도 깃들기 시작했으나 그의 나이를 감안한다면 아직까지는 봐줄 만하다. 한번 경고를 했으나 그것 역시 나의 월권일 뿐, 형으로서의 걱정임을(겸손함에 대한 어설픈 잔소리) 그가 느끼게 만들지 못한다면 그것 역시 내 덕이 부족함이다.

그가 나와 사업을 하여 돈을 번 것은 아니다. 그는 노트북을 옆구리에 끼고 일본과 중국을 오가며 중장비사업을 하여 돈을 벌었다. 단지 내가 베트남과 한국을 오가며 일을 벌이는데 이것저것 도와주다가 자연스럽게 동업의 형태를 취하게 되었을 뿐이다.

그는 지금도 베트남이 기회의 땅이라고 말한다. 기회는 한국같이 부자나라(?)에만 있는 게 아니라 가파른 경제발전을 하고 있는 베트남에 더 많이 있다면서 나를 가르치려 들 때는 잠깐씩 어이가 없다. 아무려면 나이로 보나 그동안의 사업경험으로 보나 저만 못하랴. 하지만 그의 사업이 번창일로에 있으니 가끔씩 고까워도 들어준다.

▲ 사실 이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뒤에 서있는 사람들이다.
ⓒ 유원진
같은 한국인끼리도 동업이 어려운데 베트남 사람과 어떻게 동업을 하느냐고 걱정해 주는 사람도 많지만 사업이라는 게 굴러가기 시작하면 돌다리 백번 두들겨봐야 소용 없다는 게 내 지론이고 '진인사대천명'이 어쭙잖은 내 원칙이다. 조금 있으면 우주인이 보따리 들고 올 판에 같은 지구인인 베트남 사람하고 왜 동업을 못하랴. 단지 치명적인 금전적 위험은 피하고 싶고 만약 실패했을 때라도 서로 건사해주며 우정만은 남겨지기를 바랄 뿐이다.

딸 하나 가진 그가 이번에 딸 쌍둥이를 낳았다. 축하를 해줘야 할지 위로를 해줘야 할지 몰라 그냥 한국에서는 딸이 아들보다 훨씬 낫다고 얼버무리니까 그런 위로는 안해도 된다며 웃는다. 베트남 역시 아들 선호사상이 높아서 부모님께 죄송하기는 하지만 자기 자신은 공주가 셋이라 행복하다나. 하지만 그 웃음 뒤에 비치는 서운함을 읽을 수 있는 것이 나이 오십이 가지는 번득이는 눈치가 아닌가.

▲ 딩의 딸 링지, 아내 르엉, 민 오른쪽이 매장 매니저인 찌아
하롱베이에 놀러 갔을 때 유람선을 기다리며 한 컷..
ⓒ 유원진
지금 베트남에서는 신흥부자들이 첩을 두는 것이 유행이라고 한다. 얼마 전 한국 신문이 중국 부자들의 축첩을 중국정부가 단속한다고 소개했는데 아마도 같은 맥락인 듯싶었다. 아직 삼십대 후반인 그에게 아들문제와 연관지어 농담 삼아 거기까지 물어보고 싶었으나 아무리 가까워도 그런 류의 속 이야기를 해줄 리도 없고 지나치다 싶어 그만두었다. 그러면서 한 세대 앞서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던 소위 부자들의 첩살림에 대한 옛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수컷들의 인류 보편성인가?

저녁에 그의 친구들을 만나 식사를 같이 하는데 그들이 딩을 가리키며 하노이의 떠오르는 별이라고 엄지를 들어보인다. 하노이에 갈 때마다 열흘 이상을 머무르는데 둘만의 식사는 거의 없고 거의 매일 저녁마다 그의 거래처나 친구들과 식사를 하여 이제는 누가 누군지도 훤하다.

친구도 많지만 만나는 사람들도 연령대와 직업의 폭이 넓다. 늘 그들은 딩을 향해 웃는다. 그것은 아마 맨손으로 시작해서 자본주의의 대로를 달리고 있는 딩을 향한 격려의 웃음, 더 나아가 거기에 동참하고 싶은 베트남 보통사람들의 웃음인지도 모른다.

저녁을 먹다 말고 딩이 내일 자기하고 고향에 같이 가자며 동의를 구한다. 내가 설날이 지난 지 언제인데 아직도 안 갔다 왔느냐며 의아해 하자 내가 오면 같이 가려고 안 갔다고 웃는다. 베트남 최대의 명절인 음력 새해와 우리의 설날이 같은데 베트남 사람들은 일부 공공기관 종사자들을 제외하고는 보통 열흘 안팎의 설 연휴를 즐긴다.

▲ 고향집에서 마당에 멍석을 깔았다. 별빛 아래에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 유원진
작년 처음 만났을 때 나를 그렇게 반겨하던 그의 부모님과 나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로 수줍음을 많이 타던 그의 누나들, 처음 만나면서 바로 내 무릎을 파고들던 '탕'이라는 그의 조카가 보고 싶어 나는 흔쾌히 동의를 했다. 이제는 도로포장이 되어 가기가 한결 수월해졌다고 어깨를 으쓱거린다. 금의환향은커녕 도시에서 태어나 선향을 고향삼아 다니는, 출세와는 거리가 먼 내게 그의 금의환향을 보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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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싶었으나 꿈으로만 가지고 세월을 보냈다. 스스로 늘 치열하게 살았다고 생각해왔으나 그역시 요즘은 '글쎄'가 되었다. 그리 많이 남지 않은 것 같기는 해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많이 고민한다. 오마이에 글쓰기는 그 고민중의 하나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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