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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절을 하루 앞두고 오랜만에 탑골 공원을 찾았다. 대형 건물로 둘러싸인 도심 속에서 작지만 공원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는 곳. 삼일절 행사에 대비해 동상이나 기념물 등 공원 내부를 청소하느라 다소 부산하지만 조용하다.

종로의 대로를 향해 나 있는 탑골공원의 정문은 '삼일문'이란 현판을 달고 있다. 도로변에는 바삐 지나가는 사람들로 동적인 느낌이 들지만, 삼일문을 통과하는 순간 그 느낌은 정적인 것으로 바뀐다. 천천히 산보하거나 의자에 앉아 사색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문과 담장을 사이에 두고 서로 대비되고 있다. 마치 다른 세상처럼.

▲ 탑골공원의 정문인 삼일문
ⓒ 백유선
삼일문을 통과하며 고개를 들어 살펴보니 지붕 안쪽으로 홍살문의 장식이 보인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이곳은 신성한 곳이니 사악한 것을 물리치고자 하는 의미로 만들었다고 하면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러나 홍살문은 왕릉이나 사당 등 주검이나 위패를 모신 곳에 세우는 것이 보통이어서 다소 의아한 생각이 든다.

한글로 쓴 상량문이 눈에 들어온다. 흔히 '용'과 '귀'라고 한자로 쓰는 것이 보통이나, 이곳에는 '미리'와 '거북'이라고 한글로 써 있는 것이 이채롭다. 흔히 용은 '미르'라고 하는데, 용의 방언인 '미리'라고 쓰인 것도 그렇다. 아마도 이 건물을 지은 책임자가 자신에게 익숙한 단어를 그대로 써 놓은 것일 게다.

겨우 40여 년 전의 일이지만 오늘날에는 이 단어가 생소하게 생각되니 많은 변화가 있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요즈음의 젊은이들은 '미르'나 '미리'라는 단어를 알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 삼일문 내부. 홍살문과 한글로 쓴 상량문이 보인다. '미리'는 용의 우리말인 '미르'의 방언이다.
ⓒ 백유선
3·1운동의 현장

삼일문을 지나면 바로 오른편에는 '3·1독립선언기념탑'이 있다. 독립선언서가 새겨져 있는 이 기념탑 앞에서는 삼일절에 있을 추념식단을 마련하느라 분주한 모습이다. 기념탑을 가리면서 식단을 만들어야 하는지 다소 아쉬운 마음이 든다.

그 곁의 손병희 선생 동상은 한창 세척 중이다. 손병희는 동학의 3대교주로서 이름을 천도교로 바꾸고 발전의 기반을 닦았다. 교주를 그만둔 후 그는 수도에 전념하였으나 사실상 천도교의 정신적인 지도자로서 보성중학교(나중에 보성고보)를 인수하여 교육 사업에 힘썼다.

▲ 세척 중인 손병희 선생 동상
ⓒ 백유선
그래서인지 보성 출신들이 3·1운동의 계획 과정에서 많은 역할을 하게 된다. 도쿄 2·8독립선언의 소식을 국내에 처음 전한 송계백이 보성 출신이었다. 그는 선배인 현상윤과 함께 당시의 보성 교장이던 최린을 만나 의논하고, 결국은 손병희의 천도교가 다른 종교계를 움직여 3·1운동의 계획하게 된다.

3·1독립선언서도 보성고보 안에 있던 천도교의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인쇄하였다. 이처럼 보성학교와 천도교계가 3·1운동의 계획 과정에서 한 역할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현재 보성중고등학교 교정에는 '3·1운동 기념의 보성종'과 3·1운동 부조 등을 만들어 이를 기념하고 있다.

이렇게 손병희 선생의 천도교계가 중심이 되어 여러 종교계 인사들로 민족 대표 33인을 구성했다. 이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독립선언 날짜를 정하는 준비 작업을 추진했다. 즉 3·1운동의 계획은 이들 민족 대표 33인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막상 3월 1일이 되자 이들은 사태가 커질 것을 우려했다. 결국 음식점인 태화관에 모여 자신들끼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일제 경찰에 자수하고 말았다. 이들의 선구적인 역할은 아쉽게도 여기에서 막을 내리고 만 것이다.

예전과는 달리 33인의 역할에 대해 일정하게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이런 점 때문이다. 이런 나약함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으니 이들 중 일부는 친일파로 전락하는 안타까움을 보여주었다.

▲ 3.1운동 시작된 탑골공원의 팔각정
ⓒ 백유선
1919년 3월 1일, 수많은 학생 시민들은 이곳 팔각정 앞에서 33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이들이 잡혀갔다는 소식만이 전해졌다. 결국 청년 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것으로 시위를 시작하였다. 비로소 3·1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시위는 약 3개월여에 걸쳐 들불처럼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심지어는 만주, 연해주, 하와이에서까지 시위가 전개되었다. 혹시 3·1운동이 3월 1일만의 운동이었다는 생각과 그 선두에 33인이 있었다는 잘못된 이해를 하고 있다면 바로잡을 필요가 있겠다.

즉, 3·1운동의 초기 조직 단계와 시위운동 단계에서의 주체가 명백히 다르며, 이곳에서 시작된 시위가 비로소 3·1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33인이 학생 시민들과 함께 시위에 참여하는 상상을 해본다. 그들에 대한 평가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 역사적인 장소인 팔각정은 이제는 더 깔끔하게 단장된 채 공원의 한 요소로서 쉼터로서의 역할을 계속하고 있다. 지금도 팔각정의 계단에는 노인들을 비롯해 휴식을 즐기는 사람들이 앉아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그날의 함성을 듣고 있을까?

▲ 만해 한용운선사비
ⓒ 백유선
공원 안에는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을 적어 추모하는 등불이 걸려 있어서 삼일절을 앞두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공원의 한편에는 33인 중 한 사람이었던 한용운 스님의 작은 비가 눈에 띈다. 그의 저항 시 '님의 침묵'은 언제나 우리의 가슴에 남아있다.

그 곁으로는 '3·1정신찬양비'와 각 지역별 3·1운동의 모습을 동판에 조각한 부조들이 전시되어 3·1운동의 모습을 전하고 있다. 서울에서의 시위 장면은 물론 북쪽의 함흥, 심지어는 남쪽의 제주도에서의 모습도 보인다.

그 중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아우내 장터에서 시위를 주도하는 유관순의 모습이다.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니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인형이다. 콧날도 오뚝해서 흔히 우리나라에서 보아온 얼굴형이라기보다는 서구형 얼굴이다. 무언가 다소 어색한 느낌이다. 이 부조를 보고 잔다르크를 떠올렸다면 좀 심하다고 할 수 있나?

▲ 3.1운동 부조. 위는 화성 제암리 교회의 학살 사건을 묘사하고 있다. 아래는 유관순의 시위 장면을 묘사한 부조의 일부로 서구형 얼굴로 묘사되었다.
ⓒ 백유선
절에서 공원으로

당시의 함성소리를 떠올리며 바로 곁에 있는 비각으로 발길을 옮긴다. 팔각정 뒤의 원각사지10층석탑과 함께 비각 안의 원각사비는 이곳이 본래 절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고려시대 이곳에는 흥복사라는 절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 초 억불정책으로 절은 없어지고 빈 터만 있던 곳에 세조때 다시 절을 세워 원각사라 하였다. 기본적으로 억불정책이 진행되던 시기였지만 왕에 따라 불교를 신봉하기도 하였으니, 일시적으로 탄압이 약화된 결과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성종 이후 억불정책은 다시 강화되었고 결국 연산군 때에 이르러 폐사되고 말았다. 특히 연산군은 이곳에 전국에서 뽑아 올린 기생과 악사들을 관리하는 관청을 두기까지 하였으니 절의 운명이 완전히 달라진 셈이다. 이후 폐사가 된 이곳을 종과 탑, 그리고 비석만이 지켰다.

그중 원각사 종은 광해군 이후 종각 즉 지금의 보신각에 매달리게 되었다. 범종으로서가 아니라 한양 사람들에게 시간을 알려주는 역할로 자신의 임무를 바꾼 것이다. 그나마 1985년 새 종이 만들어지면서 지금은 박물관으로 옮겨져 쉬고 있다.

탑과 비만이 쓸쓸하게 남아 있던 이곳이 다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897년이었다. 당시 탁지부 고문으로 일하던 영국인 브라운의 건의로 공원으로 조성되게 된 것이다. 탑이 있다고 하여 '파고다 공원'이란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탑동공원이라고 불리기도 하였으며, 1992년 탑골공원으로 바뀌었다. 이 공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공원으로 알려져 있다. 외래어 이름을 가진 첫 시설이 아닐까?

이때 만들어져 3·1운동의 현장이 된 팔각정은, 안내문을 살펴보니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건축가라고 하는 심의석이 건축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아울러 대한제국 황실의 음악연구소 시설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 유리 보호각이 씌워진 원각사지10층석탑. 1층 몸돌의 조각이 아직도 선명하다.
ⓒ 백유선
국보인 원각사지10층석탑은 지금은 유리 보호각으로 씌워져 있다. 비둘기들의 놀이터가 되는 바람에 그 배설물이 대리석 탑을 훼손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 세운 고육지책의 결과이다. 결국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유리집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있는 탑인 셈이다. 그 많던 비둘기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이 탑은 고려 말에 세워진 경천사10층석탑과 모양이나 재료, 심지어는 조각까지 비슷하다. 지금은 국립박물관에 복원된 경천사10층석탑은 고려 말에 세워진 것으로 원나라의 영향을 받은 탑이다. 종래의 우리 탑과는 전혀 다른 외형도 그렇고 10층이라는 짝수 층의 탑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원각사지10층석탑은 이 탑을 거의 그대로 모방한 것이다. 즉 예술적인 측면에서는 많은 점수를 받기 어렵다. 그럼에도 유리 너머로 보이는 섬세한 조각은 사람들의 발길을 오랫동안 붙드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 원각사비. 생각보다 그 규모가 크다.
ⓒ 백유선
원각사비는 원각사의 중건 내력을 적은 것으로 탑과 함께 이곳이 절이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흔적이다. 거북받침의 머리는 콧구멍이 뻥 뚫린 것이 돼지의 외모여서 다소 바보스럽게 보이기는 하나 그 우직함 때문에 몇 백 년 동안 이곳을 지키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공원의 한편에는 정비하면서 발견된 석물들을 모아두고 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사천왕상으로 보이는 조각의 일부이다. 탑과 비를 비롯해 이들 유물들은 원각사가 국왕의 후원아래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규모로 조성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 공원 한편에 놓여있는 사천왕상으로 생각되는 조각의 일부
ⓒ 백유선
또 하나, 이곳에서 우연히 발견한 것이 앙부일구 대석이다. 해시계인 앙부일구는 세종 때 발명되어 물시계인 자격루와 함께 조선시대의 표준시계의 역할을 했다. 앙부일구는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던 당시의 운종가 즉 종로에 설치되어 일종의 공중시계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곳에 남아 있는 대석은 앙부일구를 설치한 받침대이다. 안내문에는 19세기 초까지 종로를 지키고 있다가 사라진 후 대한제국시대 전차 공사 중 발견되어 이곳에 옮겨졌다고 한다.

뜻밖에 이곳에서 세종시대의 과학의 흔적을 발견하니 반갑다. 자세히 살펴보니 2층 계단에는 성혈 자국이 선명하다. 성혈은 사람들이 복을 빌기 위해 기원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구멍이다. 어느 때부터인가는 이 대석이 백성들의 기원의 장소로서의 역할까지 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추측된다.

▲ 앙부일구 받침돌. 일구대라고도 한다.
ⓒ 백유선
3·1운동의 함성소리가 메아리치는 듯한 탑골공원. 규모도 작고 지금은 노인들의 한가한 휴식처가 되고 있지만, 조선불교의 흔적, 나아가 세종시대의 과학, 최초의 공원의 모습 등 많은 볼거리, 생각거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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