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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독재시기 국가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대표적인 사법살인으로 규정되어 왔던 이른바 '인혁당재건위' 사건에 대해 법원이 마침내 무죄판결을 내렸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의 확정판결 18시간 뒤인 이튿날 새벽 사형이 집행된 지 실로 32년만의 일이다.

인고의 세월을 견뎌온 사건 관련자들과 유족들의 회한이야 말할 나위도 없지만, 당시의 참사를 기억하는 이들에게도 이번 재심판결이 던지는 의미가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연루자 8명이 재심청구의 기회도 박탈당한 채 한꺼번에 학살된 만행으로, 한국사회 특히 종교계와 지식인 사회는 충격과 비탄 속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사건의 파장이 컸던 만큼,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이번 무죄판결에 대한 언론의 보도도 치열하였다. 엄청난 분량의 기사가 쏟아져 나왔으며, 과거사 관련보도에서는 드물게 모든 언론매체들이 사설과 논평으로 공개적인 입장을 밝히고 후속보도도 계속 내보내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무죄선고를 환영하고 사법부 신뢰회복의 계기가 되길 바라는 내용이 주를 이루며 유족들의 소회와 배상문제에도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같은 사안에 대해 뚜렷한 시각차이가 드러난다. 우선 <한겨레신문>과 <경향신문> 등 진보적 일간지와 방송매체, 그리고 다수의 인터넷언론들은 상당한 비중으로 이번 판결을 보도하고 있다. 머리기사로 다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양적인 측면에서도 압도적인 지면을 배정하였다. 반면 <조선> <동아> <중앙> 등 메이저 일간지들은 사실관계를 전달하긴 하였으나 마지못해 보도하는 태도가 역력하였다. 사안의 중요성에 비해 기사의 배치나 분량 모두 그러하였다.

사설은 각 언론사의 시각과 색채를 더욱 분명히 보여주었다. <한겨레>는 사법부의 전면적인 반성을 촉구하면서 재심요건의 문제점, 국가범죄의 시효배제 등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였다. <경향>도 재심확대와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였으며 <서울신문>도 명예회복과 배상 사형제 폐지를 <매일경제>는 철저한 진상규명과 사형제 폐지를 촉구하였다.

이에 비해 소위 보수언론들은 이번 판결을 평가하면서도 파장을 최소화시키려는 의도를 분명히 하였다. <조선일보>는 "정권의 과거사 파헤치기 바람에 올라탄 또 다른 재심요구들이 무분별하게 잇따르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진실의 발견'은 중요하다. 그러나 판결뒤집기가 남발되면 법적 안정성이 위협받게 마련이다"고 주장하면서 법원의 옥석을 가려내는 현명한 대처를 주문하였다.

<동아일보>는 한 술 더 떠 인혁당재건위의 실체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면서 "오늘의 사법부도 과거의 사법부와는 역방향에서 '정치에 물들지 않았는가' 자문(自問)해 볼 일"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중앙일보>는 "권력의 요구가 아닌 정의의 요구에 부응하는 사법부의 올바른 판단을 기대한다"고 의미심장한 자락을 깔고 있다.

<문화일보>도 재심청구 및 손해배상 소송이 줄 이을 것이라 전망하면서 "개별적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가리려는 노력이 사법의 또 다른 이념축인 '법적 안정성'을 그르쳐 '시류를 좇는 잘못'으로 빗나가선 안 될 것"이라고 충고하고 있다. 보수언론의 어정쩡하고 곤혹스런 처지가 궁색한 사족달기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 지난 2월21일에 있었던 인혁당 사건 사형수 이수병 선생 명예졸업식에서 졸업장을 받고 있는 이수병 선생 부인 이정숙 여사
ⓒ 조세열
보수언론의 의식적인 축소에도 불구하고 일련의 언론보도에서 건진 소득도 적지 않아 보인다. 첫째, 사형제 폐지에 관한 여론을 다시 점화시켰다는 점이다. 거의 모든 언론들이 사형제 폐지에 관해 주목하였다. 사형제의 야만성과 비가역성, 정치적 악용 가능성이 설득력 있게 제시되었으며 국회에 계류 중인 폐지 법안이 다시 주목받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둘째, 유신헌법과 긴급조치의 위헌 여부를 쟁점화시켰다. 비록 이번 재판부가 "위헌 심사는 법원의 권한이 아니다"라며 판단을 유보했지만 '막걸리 반공법'이나 긴급조치 1호와 4호에 의한 황당한 피해자가 다수 존재하고 있고, 국가의 잘못에 대해서는 소멸시효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판례도 있어 전망이 부정적이지만은 않아 보인다.

셋째 재심제도의 불합리성을 부각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국가기관의 잘못 등에 대한 입증 책임을 전적으로 청구인 쪽이 부담해야 하는 점이나 재심 개시 사유가 '수사기관의 잘못이 확정판결로 증명된 때' 등으로 한정된 점은 피해자들의 권리 회복을 현저히 제약하고 있다.

특히 <한겨레> <프레시안> 등은 현재까지만 해도 100여 건이 넘는 사건들이 소명을 기다리고 있는 바, 재심 확대 가능성에 주목하고 재심요건 완화, 국가범죄의 시효 배제, 재심특별재판부 설치 등 구체적인 주장을 내놓았다. 그밖에 철저한 진상규명, 국가의 대국민 사과, 국가보안법 개폐, 피해자에 대한 위로사업 등 다양한 후속조치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문제점도 쉽게 발견된다. 대다수의 언론이 사실관계보도에 치중하였으며 분석보도 등 심층취재에 소홀하였다. 따라서 인혁당 관련자의 민주화투쟁이나 통일운동에 대한 재평가에는 어느 언론도 접근하지 못하였으며, 혁신계운동이나 1차 인혁당 사건 등 인혁당재건위사건의 전사(前史)를 제대로 조명하지 못하는 한계를 노출하였다.

또 30년이 넘는 기간 종교계나 시민사회의 진상규명노력도 충분히 보도되지 않았으며 사건조작의 당사자인 박정희 정권의 본질에 대해서도 피상적인 수준의 보도에 그치고 말았다. 한편 대선후보군중 한사람인 박근혜 의원에 대한 역사인식 검증은 당사자의 회피가 주원인이긴 하지만 소수 언론에 의해서만 시도되었으며 이마저도 가십성의 보도에 머무르고 말았다.

방송매체를 포함한 대부분의 언론들은 자체적인 판단이나 시각은 유보한 채 유족들의 항변, 시민단체나 정당의 논평, 정치인들의 인터뷰 등을 인용하여 간접 보도하면서 변죽만 울리는데 그쳐버렸다.

무엇보다도 지난 30여 년간 진실을 외면하고 침묵해 온 대다수 언론들의 자기반성이 희소하였다는 점은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언론만이 과거사 반성의 성역일 수도 없거니와 오히려 권력을 견제하는 감시견으로서 본연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였다면 비판에 앞서 보다 철저한 자기반성이 전제되어야 마땅하다 할 것이다. <경향신문>과 <서울신문> 등 일부 언론에서 자성의 소리를 내었을 뿐 사건 당시 독재정권의 나팔수 노릇에 앞장섰던 보수언론의 반성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긴급조치 판사 실명 공개를 계기로 전면적인 반격에 나서면서 물타기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조선> <동아> <중앙>은 인혁당 판결에 대해 소극적 보도로 일관했던 직전의 상황과는 대조적으로, 판사 실명 공개를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총반격에 나서고 있다. <조선일보>가 과거사위의 '인민재판'이라는 사설에서 "결국엔 유신헌법 국민투표에서 90% 넘게 찬성해 대통령에게 긴급조치권을 줬던 국민의 책임까지 물어야 될 판"이라며 물귀신 작전을 펴는가 하면, <동아일보>는 과거사위의 활동을 "반대세력을 욕보이기 위한 사실상의 인민재판"이라고 비하하면서 이를 합리화하기 위해 후안무치하게도 유신정권에 저항하다 백지광고 사태까지 겪었다며 자신들이 내쫓은 해직기자들의 대의까지 가로챘다.

<중앙일보>는 박정희 정권 옹호에 총대를 메었다. 개발독재를 미화하면서 유신헌법과 긴급조치까지 불가피했던 조치로 주장했다. 못된 버릇인 색깔론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왜 남쪽의 과거 인권유린에는 거품을 물면서 북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재의 인권유린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못하는가"라며 번지가 맞지 않은 은근짜를 부리기도 한다.

<문화일보>는 "현정권의 국민 편 가르기와 과거사 몰두에 지친 국민을 위한다면, 과거사위는 즉각 해체하는 것이 옳다"는 망발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 결국 보수언론들은 보수의 본령인 자유민주주의의 신봉자가 아니라 한갓 기득권세력의 퇴행적 역사인식과 정치적 이해관계의 대변자에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친일문제나 과거사문제가 나올 때면 빠지지 않는 상황론이나 국민전체책임론, 마녀사냥론이 공공연하게 다시 등장하고 있다. 사회의 투명성과 책임의식을 위해 온갖 실명제가 도입되고 있는 현실 속에 유독 친일 친독재 행위만은 익명으로 보호받아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시대적 상황은 고려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같은 여건이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용서와 화해는 진실규명과 반성이 전제될 때만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피해자가 엄존하고 있고, 같은 시대에도 타협하지 않고 다른 삶을 살며 다른 길을 간 많은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언론의 보도양태를 볼 때 우리사회 내부에 역사와 현실인식에 있어 메울 수 없는 엄청난 간극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코 근접할 수 없을 것 같은 인식의 격차는 우리사회의 부인할 수 없는 한 단면이다.

지금은 역사전쟁이 진행되고 있다. 잘못을 잘못이라고 인정하고 용기 있게 대면해야 한다. 보수·진보의 문제가 아닌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자유와 인권·생명존중·민주주의·양심과 사상의 자유 등이 선택 대상이 될 사안은 아니다. 이제 언론이 집단의 이해관계를 벗어나 최소한의 언론규범을 준수해야 한다. 달리 길이 없어 보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월간 <신문과 방송> 3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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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민족문제연구소 상임이사로 재직 중이며,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고 있다.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친일재산 국가귀속업무를 진행했다. 친일문제와 한일관계 등 근현대 과거사청산과 통일시대의 역사문화운동이 주요한 관심 분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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