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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의 반전, 마침내 대전으로 이전!

긴가 민가 소문만 무성하던 도청이전이 1930년 11월 10일 ‘충남도청 신축 예산안’이 발표되자 공주 유지들은 ‘공주 시민회’를 재정비(회장 丸山虎之助, 부회장 오경달) 한 뒤 3000여 원의 운동자금을 마련하는 등 반대운동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다.

1931년 1월 3일, 도지사 관사(현 공주사대부고 옆) 앞에서 500여 명이 모여 군중시위를 전개함과 동시에 30여 명의 진정위원단을 총독부에 파견하는 등 ‘도청사수’의 포문을 연다. 대전, 천안, 조치원 등의 유지들도 경쟁적으로 ‘시민대회’나 ‘도청유치 기성회’ 등을 조직하여 도청과 총독부를 압박한다.

이처럼 사태가 일파만파로 확산되자 총독부는 분란을 일소하고, 도청 이전을 조기에 매듭짓는다는 명목하에 1931년 1월 13일 충남도청의 ‘大田 移轉(대전 이전)’ 사실을 공식으로 발표하였다. ‘공주는 교통이 불편해 행정 중심지로 적당치 않으며 도청 건물이 낡고 협소해 민중의 편익을 도모하는데 적절치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공주지역의 반발 수위는 점차 높아졌다. 공주 유지들은 진정위원을 선발하여 총독부 특별회계의 예산 심의권을 가지고 있는 일본제국 의회까지 진출하여 진정과 로비활동을 전개하였다. 동시에 공주에서는 군중집회와 결의문 채택, 시장 상인들의 파업, 주변 면민들의 진정 투쟁을 주도하였다.

▲ 도청이전 관련 문서(좌). 도청이전 반대 탄원서(우).
ⓒ 최장문

▲ 도청이전에 대한 보상의 일환으로 공주에 만들어진 금강교
ⓒ 최장문

이 같은 사태에 직면하자 충남도당국은 공주 시민회 대표와 각 면장을 도청으로 불러들여 ‘이미 결정된 일이니 보상문제와 사후대책을 강구하는 것이 좋겠다’는 협박성 회유에 이어 경찰을 동원 시민회 사무실을 수색하고 간부를 구금하는 등 강경한 조치를 취하였다. 이에 맞서 공주 시민회도 ‘도청사수’와 ‘간부석방’을 요구하는 대중시위를 강행하였다.

2월 4일. 동경에서 대전과 공주의 희비를 바꾸는 전보가 날아왔다. ‘일본의회(중의원)에서 도청 이전 안이 부결되고 공주에 신축키로 결정되었으니 시민일동은 일층 분투 바란다’의 내용이었다.

희망에 부풀어 땅값이 치솟던 대전은 너무나 의외의 사태에 안절부절못하였다. 기관유치를 위해 대전에 설립되었던 대전토지주식회사도 해산되었다. 반면에 공주는 회생의 봄을 맞은 것처럼 희망과 기쁨을 되찾아 축제의 분위기 속에서 들뜨기 시작하였다.

희망의 유통기한은 그리 길지 못했다. 사이또 조선 총독은 대전에 살고 있던 귀족출신 시라이시를 동경에 급파하여 안면있는 귀족들에게 도청이전 지지를 호소했고, 자신은 수상과 귀족위원장에게 친서를 보내 도청이전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뜨거운 감자 도청 신축 예산안은 일본 귀족원으로 넘겨졌고, 귀족원은 3월 13일 중의원 결정을 무시하고 총독부안을 채택하였다. 공주는 금세 초상집처럼 처절해졌고 대전은 환호성이 터졌다. 공주에서는 횃불시위, 투석전 등이 일어났고 경찰은 50여 명을 구금하는 강경조치를 취하였다.

대세가 이미 판가름 났음을 감지한 공주유지들은 재빠르게 도(道) 내무장관을 찾아가 ‘향토애 때문이었지 다른 뜻은 없었다’는 취지의 사죄인사를 전달하면서 도청이전을 전제로 한 보상협상을 진전시키는 민첩함을 보였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도청이전은 마침내 1932년 10월 대전으로 옮겨졌고, 공주는 이에 대한 보상으로 금강교, 농림학교, 사범학교 등이 만들어졌다.

충남도청사! 대전의 역사를 담은 그릇으로 거듭나기를...

대전 근·현대사의 중심에 서서 현재의 대전광역시로 발전되는 과정을 함께 했던 충남도청사가 2012년이면 홍성·예산에 새집을 지어 이사를 간다고 한다. 80여 년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소꼽 친구가 이후의 활용방안이라는 숙제를 대전시민에게 남겨두고 떠나는 것이다. 수만 번 생각하고, 토론하며 고민해봐야 할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 도청 앞. 대한민국 정부수립 10주년 기념식전 광경(1958)
ⓒ 최장문

▲ 현 충남도청. 일제시대 충남도청 이전 반대(유치) 운동이 남긴 가장 큰 역사적 교훈은 ‘개발 차익’은 철저히 환수되어 ‘공공의 이익’을 위해 쓰여져야 한다는 것을 오늘도 말없이 외치고 있다.
ⓒ 최장문

최근에 인천, 부산, 목포 등에서 원도심의 근대 건축물을 활용하여 근대 역사관을 앞 다투어 만들고 있다. 지역민들에게 지역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여 지역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동시에 교육과 휴식의 공간으로 활용하여 성숙한 지역 공동체 문화를 만들어 가자는 방안이다.

대전도 충남도청을 중심으로 하여 원도심에 남아있는 근대 문화유산의 유기적 활용으로 문화적 특징이 없는 도시라는 오명을 벗고 근대 도시 대전의 정체성과 위상을 찾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It's Daejeon 3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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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세월속에서 문화의 무늬가 되고, 내 주변 어딘가에 저만치 있습니다. 자세히 보고, 오래보면 예쁘고 아름답다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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