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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도청이 대전에서의 80년 생활을 마감하고 2012년 예산·홍성으로 옮겨갈 예정이다. 근·현대 대전 역사의 중심이었던 충남도청사 공간은 대전 발전을 위한 새로운 변신을 준비하고 있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려 충남도청이 대전에 오기까지의 격동의 현장을 되돌아본다.

▲ 현 충남도청사.
ⓒ 최장문

근대의 상징인 철도는 날카로운 양 칼날이 되어 조선팔도의 발전 축을 바꾸어 놓았다. 일제는 합방을 전후한 시기에 경성을 중심으로 한 ‘X’자형 남북 철도망을 완성한 뒤 철도가 지나는 지점으로 도청을 이전한다. 그 결과 경기도청은 1910년 수원에서 경성으로, 평북도청은 1923년 의주에서 신의주로, 경남도청은 1925년 진주에서 부산으로, 그리고 충남도청은 1932년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되었다.

어여쁜 기생첩 하나를 두고 다섯 사내가 싸우다.

한·일병합 전후부터 충남도청을 경부선과 호남선이 지나는 대전으로 옮겨와야 한다는 여론(주로 대전거주 일본인 유지집단이 주도)이 심심찮게 대두되었다. 하지만 당시 대전은 인구 규모도 작았고 도청을 수용할만한 도시기반도 부족했다. 충남도청의 대전 이전(移轉) 소문이 여론을 타기 시작한 것은 1924년 진주 사람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경남도청이 부산으로 이전되면서부터이다.

1924년~1925년에 경남도청 이전을 둘러싼 지역간의 갈등이 ‘대한독립 만세’운동으로 일부 확산되자 총독부 일각에선 충남·북을 합병한 뒤 중간지점인 조치원에 설치해야 한다는 여론, 혹은 대전으로 이전해야 한다는 여론 등이 신문을 통해 유포되었다.

이때마다 공주지역 유지집단은 ‘공주 시민회’를 만들어 도청이전 반대의 뜻을 총독부에 전달하였고, 총독부는 도청이전 사실을 전면 부인함으로써 번번히 흐지부지 되었다. 1929년에는 도청이전을 적극 추진하던 야마나시 총독이 뇌물사건으로 경질되고 해군대장 출신 사이또오가 부임해 온다.

▲ 공주사대부고 자리에 있던 충남도청 전경. 포정사(布政司)로 되어있던 현판을 일제시대에 금남루(錦南樓)로 개칭하였다
ⓒ 최장문

▲ 대전으로 이전한 충남도청 상량식(1931)
ⓒ 최장문

▲ 대전 선화동으로 이전한 충남도청 전경(1932)
ⓒ 최장문

부동산 열풍은 그때도 대단했다. 개발정보에 밝은 사람들은 도청이전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가운데 토지 투기에 열을 올리기 시작한다. 가령 공주 갑부 김갑순은 일찍부터 대전역 부근과 대전 시가지 땅을 사들여 도청이전 부지를 기부채납하고도 막대한 개발 차익을 챙길 수 있었다.

공주지역에서 도청이전 반대운동이 본격화 된 것은 1930년 11월, 총독부가 정식으로 ‘충남도청 신축 예산안’을 편성하면서부터였다. 도청을 사수하려는 공주와 도청을 끌어오려는 대전, 천안, 조치원, 논산 간의 이전투구(泥田鬪狗)가 시작된다. “어여쁜 기생첩 하나를 두고 다섯 사내가 다투는 꼴”이라는 당시의 신문 논평은 그 때 분위기를 잘 보여주고 있다.

공주유지들은 ‘대전은 일본인 신흥도시, 공주는 백제왕도·조선감영 소재지와 같은 전통있는 조선 도시’라는 명분으로, 대전유지들은 ‘대전은 교통이 편리하고 발전 가능성이 큰 신흥도시, 공주는 몰락하는 황성옛터’라는 구호로 흠집내기 전략을 구사한다.

천안과 조치원도 물고물리는 도청유치 전에 가세한다. 천안은 ‘교통의 요지이자 충남서부 9개군(장항선이 통과하는 군)의 중심’이라고 주장하는 동안, 조치원은 ‘충남·북을 합하여 그 중심지인 조치원에 도청을 세워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It's Daejeon 3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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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세월속에서 문화의 무늬가 되고, 내 주변 어딘가에 저만치 있습니다. 자세히 보고, 오래보면 예쁘고 아름답다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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