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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서툰 솜씨로 쓴다. "민주주의 만세!"
ⓒ 강기희
난방도 되지 않는 방에서 죽은 듯 쓰러져 세 시간을 있었다. 잠이 몰려왔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독한 몸살을 앓은 것도 아니었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야지 하고 몸을 일으켜 보았지만 그것은 마음뿐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켜놓은 라디오에선 끊임없이 음악이 흘러나왔다. 어떨 때는 한없이 감미롭다가 어느 때엔 비장한 음악이 방안 가득 퍼졌다. 음악은 오래된 필름처럼 끊어졌다 이어졌다를 반복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음악은 들려오지 않았다.

@BRI@찰라와 같은 시간 방 안에 머물러 있던 내 정신은 유랑자처럼 먼 곳을 향해 떠돌고 육신만이 남아 찬 몸이 되어갔다. 밤은 깊어지고 다시 음악이 들려오기 시작할 때 쓸쓸한 거리를 떠돌던 정신은 서둘러 제 자리로 돌아왔다.

피곤에 젖은 육신을 두고 정처 없이 떠났던 정신은 사람은 있되 사람이 없는 그런 거리를 한없이 걸었다. 햇살은 강렬했으며 바람은 옷자락을 휘감을 정도로 강했다.

사람이 없는 거리에서 사람인 양 보이는 이들은 날리는 먼지를 모아 솜사탕처럼 둥글게 만들었다. 사람인 양 보이는 이들은 그것들을 씹어 먹으며 사람을 향해 뭐라 손가락질했다.

재즈 음악이 흐물흐물 문지방을 넘는 시간 정신은 꿈틀대는 육신과 합일했다. 육신은 차가운 방임에도 땀을 흘리고 있었고, 먼 여행을 다녀온 것처럼 '이상하게 다리가 아프네'라고 중얼거렸다.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를 부르던 그 시절의 중심엔 김지하 시인이 있었다

정신을 차리니 속옷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갈증이 심하게 났다. 물병을 입에 대고 땀이 식을 때까지, 갈증이 가실 때까지 들이켰다. 잠시 입안이 시원하다 싶었지만 원초적 갈증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냉장고를 뒤져 오래된 딸기를 찾아냈다. 무슨 딸기일까 생각해 보았더니 언젠가 밤늦은 시간 읍내에 사는 후배에게 술 하고 안주 좀 사와라 했더니 어머니 몫으로 사온 딸기였다. 곰팡이가 핀 딸기는 먹을 것보다 버릴 게 많았다. 버리기 아까워 살을 발라내듯 곰팡이를 손으로 문질렀다.

곰팡이를 제거하자 딸기는 입이 작은 소인국 사람들의 짓인 양 몇 번이고 베어 먹은 자국을 냈다. 그것들을 하나씩 주워 먹으며 갈증의 원인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찾아 올 사람 없는 산촌에서 개는 먼 산을 향해 부질없이 짖고, 담배를 붙여 물고 방안을 아무리 서성거려 보지만 목마름의 원인을 찾지는 못했다. 육신의 목마름이 아니라면 필시 정신적 목마름을 느낄 터. 책장을 뒤적이다 김지하 시인의 시집 <타는 목마름으로>를 뽑아 들었다.

출간된 지 25년이나 된 시집은 세월을 이겨내지 못하고 종잇장이 누렇게 변해 있었다. 첫 장을 펼치자 한때 가슴을 후려치던 시 한 편이 시야에 들어온다.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 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 김지하 시 '타는 목마름으로' 전문


아, 그랬다. 오랫동안 내 너를 잊고 있었다. 아니 잊은 게 아니고 너의 세상이 온 줄 착각하며 살았다. 내 몸이 구속당하지 않는다 하여, 내 팔자 핀 정신이 한 없이 늘어졌다 하여 너의 세상이 된 줄로만 알았다.

생각해 보면 내 발길은 언제나 너를 찾아 헤매었지만 진정 너를 만나지는 못했다. 민주주의, 너로 가장한 가면 쓴 것들이 시야를 흐리게 하는 통에 너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너는 그때나 지금이나 힘들고 외로운데 박수치고 환호하는 이들은 널 이용만 했구나.

아직 용도폐기 될 일 아닌데도 넌 신자유주의에 밀려 역사 속으로 유물처럼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구나. 미안하다, 미안하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쓰던 너 민주주의여. 그 시절엔 폭압이 두려워 너의 이름을 선뜻 부르지 못했다. 그저 치떨리는 노여움을 가슴에 품은 채 서툰 백묵 글씨로 나무판자에 '민주주의 만세'라고 쓰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 김지하 시인의 시집 <타는 목마름으로>
ⓒ 강기희

김지하 시인이 아니었다면, 어렵게 구해낸 민주주의를 영원히 잊을 뻔했다

김지하 시인이 아니었다면 너, 민주주의를 영원히 잊을 뻔했다. 어쩌면 군 오징어를 씹듯 옛날이야기를 들먹이며 너를 추억했을지도 모르겠다. 술판 벌어진 자리에선 양주잔 비워내며 너를 안주 삼는 이들도 있겠다. 너의 노래는 이제 노래방에서조차 잊혀진 지 오래다.

세상 사람들은 너를 잊은 채 87년의 민주화항쟁을 이야기하고 이젠 그 시절마저 넘어서자고 말한다. 20년이 지난 2007년 지금 너의 입은 입마개로 가리워져 있고 너를 대신하는 입들은 새로운 세상을 열자고 열변을 토한다.

진정 뜨거운 가슴으로 너를 부르며 '민주주의여 만세'를 외쳐보지도 않았는데 세상이 변했단다. 수천 길 지하 감옥에 감금되어 있던 너를 구해내기 위해 한 잎 꽃처럼 숨져간 이들의 넋이 아직 구천을 떠돌고 있는데, 너를 잊었다는구나. 미안하다, 미안해.

경상도 합천이라는 동네는 너를 모질게도 억압했던 전두환이라는 사람을 기리기 위해 공원 이름도 바꾼다고 한다. 죗값을 치렀다며 당당하게 해외여행도 가는 그들의 입에서도 가끔은 불경스럽게 너의 이름이 들먹여진다.

민주주의, 너를 구해내기 위해 곤욕을 치렀던 이들은 여전히 가난하기만 해 해외여행 한 번 가지 못했다. 그런데도 요즘은 너를 팔아 양복 입은 이들이나 너를 억압했던 이들이나 나란히 공항으로 향한다. 그 모습을 어찌 이해해야 하는지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서울이라 장안 한복판에 다섯 도둑이 모여 살았것다.
남녘은 똥덩어리 둥둥
구정물 한강가에 동빙고동 우뚝
북녘은 털빠진 닭똥구멍 민둥
벗은 산 만장아래 성북동 수유동 뾰족
남북간에 오종종종 판잣집 다닥다닥
게딱지 다닥 코딱지 다닥 그 위에 불쑥
장충동 약수동 솟을대문 제멋대로 와장창
저 솟구싶은 대로 솟구쳐 올라 삐까번쩍
으리으리 꽃궁궐에 밤낮으로 풍악이 질펀 떡치는 소리 쿵떡
예가 바로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이라 이름하는,
간뗑이가 부어 남산만하고 목 질기기는 동탁배꼽 같은
천하흉포 오적(五賊)의 소굴이렸다.

- 김지하 시 '오적' 중에서


김지하 시인은 1970년 시 '오적'을 발표하면서 민주주의를 향한 목마름을 만천하에 알렸다. 그 일로 시를 실었던 잡지 <사상계>는 정권에 의해 편집진이 구속되고 강제 폐간되는 운명을 맞는다. 시 '오적'은 당시의 사회 현실을 날카롭게 풍자한 작품이다. '오적'은 비록 재벌과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차관을 다뤘지만 그 칼날은 정권의 심장부를 향했다.

박정희 정권과 결탁한 부패의 원인들은 일반인이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강력한 권력을 지니고 있었고, 그것은 폭압정치와 민주주의 탄압으로 이어졌다. 당시 시가 발표되고 그 시를 본 박정권은 김지하 시인을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했다. 이른 바 오적 필화 사건이다.

민주주의를 잊고 있는 그대들은 과연 누구인가?

'오적'을 발표한 지 37년이 지난 지금이라고 오적이 없을까. 대상은 바뀌었지만 이 사회에는 여전히 오적이 존재한다. 세월이 좋아진 탓인지, 아니면 민주주의를 가장한 이들의 활개가 유난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요즘엔 오적이라는 말을 '신오적'이라 하여 자신들의 편의에 맞게 쓴다. 그것도 유행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더 놀랍다.

과거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이들이 신오적을 꼽았는데 그것이 참으로 생뚱맞다. 그들이 꼽은 신오적을 보면 민노당, 전교조, 민노총, 주사파 386세대, 노무현정부란다. 시의에 따라 변하긴 하지만 대체로 민주주의를 찾고자 하는 이들이 그들에겐 오적의 범주에 든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암튼 세상 좋아지긴 한 모양이다. 이것이 김지하 시인이 원하고 바라는 민주주의는 아닐진대, 그들은 아무렇게나 민주주의를 끌어다 쓴다. 이런 욕된 민주주의라니.

1974년 1월을 죽음이라 부르자
오후의 거리, 방송을 듣고 사라지던
네 눈 속의 빛을 죽음이라 부르자
좁고 추운 네 가슴에 얼어붙은 피가 터져
따스하게 이제 막 흐르기 시작한
그 시간
다시 쳐 온 눈보라를 죽음이라 부르자
모두들 끌려가고 서투른 너 홀로 뒤에 남긴 채
먼 바다로 나만이 몸을 숨긴 날
낯선 술집 벽 흐린 거울 조각 속에서
어두운 시대의 예리한 비수를
등에 꽂은 초라한 한 사내의
겁 먹은 얼굴
그 지친 주름살을 죽음이라 부르자

- 김지하 시 '1974년 1월' 중에서


시집의 두번 째 장을 펼치면 '1974년 1월'이라는 시가 나온다. 1974년 1월 8일은 '대통령 긴급조치 1호'가 발표된 날이다. 김지하 시인은 그날을 죽음이라 부르자고 한다. 그해 1월 8일은 모두가 죽음으로 항거해야 하는 날이었다. 그 시절은 박정희 정권에겐 말 그대로 긴급한 상황이기도 했다.

정권이 무너지는 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짐을 느낀 박정권은 2년만에 긴급조치 9호까지 만들어냈다. 대단한 발전이다. 그 발전의 모태엔 문익환이 있었고, 지학순이 있었고, 김남주가 있었고, 또 인혁당 사건으로 죽어간 그들의 절규와 치떨리는 가슴으로 불러보는 민주주의가 있었다.

그 시절 죽음의 거리를 떠도는 사람들은 사람이되 사람이 아니었다. 박정권은 입이 있으되 말을 하지 못하게 했고 생각이 있으되 어떤 표현도 하지 못하게 했다. 당시 죽음의 거리엔 사람은 아니되 사람인 양 거들먹거리는 금수들만 득시글거렸다.

그때 김지하 시인은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 박정권의 발악은 김지하 시인의 펜을 더 강하고 힘차게 만들었다. 그 시절 그의 삶은 구속과 석방으로 이어지는 고난으로 점철된 날들이었다. 그는 밟혀도 밟혀도 일어서는 질경이 같았다.

그럼에도 그가 끝까지 놓지 않았던 것은 그의 펜이었다. 그가 써낸 글은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되었고 억눌린 민중의 분노가 되었다. 그 분노가 폭발했을 때 비로소 민주주의는 우리의 곁으로 올 수 있었다.

신자유주의 물결이 밀려들어오는 2007년, 김지하 시인에겐 그때나 지금이나 민주주의에 대한 목마름이 여전하다. 뜨거운 가슴으로 불러야 겨우 한 발 다가오는 민주주의를 향한 기다림도 여전하다. 그가 긴 침묵을 깨고 세상을 향해 입을 뗀다.

민주주의를 잊고 있는 그대들은 과연 누구인가?
민주주의라는 가면을 쓰고 신자유주의를 주장하는 그대들은 또 누구인가?

이 밤, 죽음의 거리를 지나온 김지하 시인이 묻는 듯하다.

▲ 문학 행사장에서 독자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는 김지하 시인.
ⓒ 강기희

타는 목마름으로

김지하 지음, 아킬라미디어(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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