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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가 시작되는 반도의 끝 갈두마을을 앞에 두고 조선후기 문인화가 공재 윤두서 생가를 알리는 이정표가 보인다. 삶이 그렇듯 샛길이 없다면 무슨 재미가 있으랴. 오늘은 고산을 만나러 가는 길도 아니고 공재를 보러가는 길도 아니다.

공재 생가를 지나쳐 어란포구로 내달렸다. 영암에서 강진과 해남으로 이어지는 길은 한국전쟁기에 피난길이었고, 조선시대에는 귀양길이었을 게다. 1번 국도를 거슬러 오다 나주에서 영암을 지나 다시 2번 국도를 가로질렀다. 다산과 고산의 흔적들이 곳곳에 자리해 있다.

겨울답잖게 따뜻한 봄 날씨라지만 새벽 갯바람은 옷깃을 세우는 일로 막기 어렵다. 턱밑까지 지퍼를 올리고 벙거지 모자를 목까지 내렸다. 물김을 뜯기 위해 바다로 나간 탓에 만호바다는 텅 비어있다.

천덕꾸러기 대접을 받던 바지선들이 무거운 짐을 벗고 아침햇살을 맘껏 즐긴다. 어민들에게 창고나 다름없는 바지선은 배를 정박하지 않는 포구 후미진 곳이나 파도와 바람을 피할 수 있는 바닷가에 설치한다.

▲ 어란포구에 가득한 바지선, 어민들에게 바지선은 어구를 보관하는 창고다.
ⓒ 김준
▲ 물김을 채취해 어란포구로 돌아오는 채취선.
ⓒ 김준
논이 아닌 바다에서 김을 매는 사람들

속살을 파고들던 바람 끝이 무뎌질 쯤, 김을 가득 맨 배들이 어불도를 지나 빨간 등대를 스치듯 물보라를 튕기며 포구로 돌아온다.

남도사람들은 김을 채취하는 일을 '김을 맨다'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추석을 지나 가을에 김발을 양식장에 설치하는 것도 '김발을 맨다'라고 표현한다. 때로는 모두 '김발을 맨다'라고도 한다.

김 양식을 하는 어촌의 여름은 그늘에 앉아 김발을 만드는 일로 시작된다. 그늘이 없으면 햇빛 가리개를 치고 가족들이 모두 모여 김발을 만든다. 이렇게 김발을 만들어 바지선에 잘 보관해 둔다.

김 양식을 하기 위해서는 100여m가 넘는 굵은 줄을 닻이나 항목(나무 말목)을 이용해 2m 간격으로 바다 속에 고정시켜야 한다. 그리고 폭이 180㎝쯤 되는 김발을 줄에 매단다. 벼농사로 비유한다면 모심기쯤에 해당된다.

모심기를 위해서는 못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김 양식도 못자리에 해당하는 포자(씨앗)를 김발에 붙이는 작업이 김발매기 한 달 전에 이루어진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김발을 매다'는 말이 만들어진 것 같다. 김을 채취하는 것을 '김을 매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풀을 매다' '보리밭을 매다' 등에서 비롯된 것 같다.

한 고랑씩 줄을 잡아 풀을 뽑듯 줄지어 있는 김발에서 김을 뜯는다. 특히 옛날 김 양식은 지금과 달리 싸리나무나 대나무를 갯벌에 꽂아 김 양식을 했기 때문에 나무에 붙은 김을 뜯는 것이 풀을 매는 것과 같았다.

▲ 만호바다에서 물김을 채취하는 어민.
ⓒ 김준
명절에만 몇 장씩 배급받던 김

김발을 매는 것은 추석 전후다. 김 양식 중 가장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기 때문에 10여 년 전에는 마을주민들이 모두 참여해 공동 작업을 했다. 김값이 좋던 시절에는 모두 일본으로 수출되어 우리 밥상에서 구경하기 힘들었다. 명절에나 구경할 수 있고, 그것도 몇 장씩 배급을 주듯 세어서 나누어주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설 명절 가장 큰 선물이 '김 한 톳'이었다.

이 무렵 어촌마을의 당제(당산제)나 용왕제 등 정월 마을제의는 포자가 김발에 잘 붙고 김 농사가 잘되기를 기원하는 것으로 마무리되곤 했다. 이를 갯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지금은 인공포자를 이용하지만 당시는 포자가 많이 나는 바닷가에 김발을 집어넣어 붙이는 자연포자 방식이었다. 옆 마을 김 농사가 잘 된다 싶으면 정월 보름 전후해 몰래 갯벌에 갯흙을 훔치기도 했다. 그러면 다음해 김 농사가 잘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김 농사가 잘되는 마을에서는 이를 막기 위해 청년들이 양식장을 지키는 일도 있었다.

▲ '갯제'를 마치고, 김양식이 잘되게 해달라며 '물아래 용왕님'에게 헌식을 한다(전남 완도 약산면 어두리, 2003)
ⓒ 김준
충남 서천과 함께 최고의 물김 산지인 어란 포구에는 인근 어불도와 동현리 어민들이 채취한 김들이 모두 모아져 수협을 통해 위탁 판매된다. 어란진에는 해남은 물론 전국 각지의 김 공장들이 품질 좋기로 소문난 이 곳 물김을 사기 위해 줄을 선다.

어민들은 배에 가득 담긴 물김의 일부를 작은 그릇에 담아 중매인들에게 내놓는다. 물김을 살펴보고 만져본 중매인들이 구입가격을 적어보이면, 수협 중개인은 그 중 가장 높은 가격을 적은 중매인에게 물김을 판다.

중매인의 손을 거친 물김은 큼지막한 자루들에 담겨 크레인에 매달려 허공을 가르다 트럭에 자리를 잡는다. 이곳 어민들이 생산한 물김은 이제 공장을 거쳐 소비자들에게 판매될 것이다. 어둠이 걷히기 전 시작된 어란 포구의 바쁜 일상이 마무리 되는 시간은 오후 1~2시 무렵이다. 인근 식당에서 어불도와 인근 어민들이 늦은 점심과 소주잔을 기울이고 집으로 돌아온다. 시끄럽던 포구는 다시 적막에 휩싸인다.

▲ 물김은 수협을 통해 위탁판매가 끝나면 김공장으로 옮겨져 가공된다.
ⓒ 김준
어촌 마을 유지하는 규칙

어불도 사람들의 생명줄은 바다의 김발이 쥐고 있다. 그래서일까. 70여 호 중 60여 가구가 김발을 매고 있다. 농사처럼 김 양식도 잘되는 곳도 있고, 잘 안 되는 곳이 있다. 논과 밭처럼 바다를 개인이 소유할 수 없다. 마을(어촌계)이 국가로부터 면허를 얻어 주민(어촌계원)들에게 분배한다.

김 양식을 하는 어촌마을은 일찍부터 자원(바다)을 균등하게 분배를 하는 방법을 모색해왔다. 그 중 한 방법이 마을규칙으로 정한 '추첨'(주비 혹은 제비추첨이라 함)이다. 김 양식이 잘 되던 때는 추첨을 일 년에 한 번씩 했지만, 어촌인구가 줄고 먼 바다까지 나가 양식을 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면서 규칙은 마을회의록에만 남아 있다. 어불도는 지금도 3년에 한 번씩 자리를 옮겨 기회의 불평등을 막고 있다.

▲ 김발에 포자가 붙은 모습
ⓒ 김준
양식을 할 수 있는 바다 자원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외지인들이 들어오는 것을 통제하는 장치도 발달해 있다. 마을 밖에 살던 사람들이 마을로 이사온다고 해도 바다를 바로 이용할 수 없다.

바다를 이용하는 권리를 '행사권'이라고 한다. 행사권은 우선 어촌마을의 '집'을 사 이사를 해야 하며, 일정한 기간을 거주해야 주어진다. 어불도는 적어도 3~4년 마을에 이사 와서 살아야 권리가 주어진다. 양식할 자리가 없기 때문에 새로운 허가지역이 생기거나 기존에 어민들 중 양식을 포기한 사람이 생겨야 비로소 시작할 수 있다.

▲ 포자를 붙인 김발을 양식장에 설치하기 위해 작업중이다(무안 청계 복길마을, 2002)
ⓒ 김준
▲ 차양막 아래에서 김발을 만들고 있는 어민들(전남 진도 모도, 2006)
ⓒ 김준
@BRI@어불도의 김 양식은 1970년대 지주식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어불도 앞 갯벌지역에 가구당 30여 척(40여 m 길이의 김발을 1 척이라 함)의 김발을 막았다. 지금은 100~120미터(2~3척의 길이)의 김발을 평균 70줄씩 하고 있다. 1970~1980년대 김 양식의 중심은 완도였지만 최근에는 해남과 진도가 훨씬 활발하다.

해남지역은 어란·어불·송호·동현·내장·학가 등 해남과 진도 사이 만호바다에서 김 양식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특히 어란과 어불리의 주민들이 활발하게 김 양식을 하고 있다.

2월 중순 김 한 자루(규격화된 대형 포대 자루)는 6만원에서 7만원에 거래되었다. 어불도에서 김 양식을 하는 김영수(70)씨는 70줄의 김발을 매고 있는데, 하루에 10줄을 매어서 30~40자루를 생산하고 있다.

12월에서 시작해서 다음해 3월까지 김 수확을 한다. 관리를 잘 하고, 자리가 좋은 곳은 5회까지 수확을 하지만 보통 3~5회 채취를 한다. 김 양식이 잘되고 값이 좋을 경우 한 줄에서 100만원의 소득을 보지만, 좋지 않을 경우 50여만 원에 그치는 경우도 있다. 물론 갯병이 오거나 날씨가 좋지 못할 경우 김을 구경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좋은 김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날씨가 너무 따뜻해서는 안 되며 물발(조류)이 좋아야 한다. 그래서 주민들은 어불도와 가까운 안통(포구와 가까운 곳)의 김들이 먼저 '자빠진다'(끝난다)고 한다. 대신 '바까태(먼 바다)가 더 좋다'고 하는데, 먼 바다일수록 시설비, 인건비 등 투자가 많고 관리도 힘들어 자본과 노동을 갖춘 젊은 사람들이 선호한다.

김 양식이 환경을 오염시킨다?

▲ 해양쓰레기 대부분 육지에서 비롯되지만, 양식과정에서 생산되는 쓰레기와 바다오염문제도 심각하다. 바다의 날 이벤트성으로 해안에 밀려온 쓰레기를 줍는 정책이 아니라, 해양환경 오염을 막기 위한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 김준
김 양식이 어민들 생활에 큰 도움을 주고 있지만 피해도 적잖다. 가장 큰 피해는 바다오염의 문제다. 해양생태계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이 해수온도라지만 조류변화도 이에 못지않다. 김 양식 시설은 바다생태계의 입장에서 보면 조류소통을 막는 장애물이다. 옛날과 달리 양식이 끝난 후 모든 시설을 철거하지 않고 고정시설을 바다에 놔둘 경우 더욱 그렇다.

여기에 양식 부산물이 그대로 바다에 가라앉아 있어 더욱 심각하다. 뿐만 아니라 부표와 김발 등 양식시설 대부분이 섞지 않는 플라스틱 제품이라 처리가 쉽지 않아 바닷가에 방치되고 있다. '바다의 날' 해안가에 밀려온 쓰레기를 줍는 정책이 아니라 어민들의 어업활동이 쓰레기 생산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하루빨리 환경피해를 주지 않는 처리시설이나 제품이 개발되어야 한다. 이제 국가는 도로·철도·항만 등 눈에 보이는 사회간접자본 만이 아니라, 잘 보이지 않지만 주민들의 삶에 큰 영향을 주는 것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그 피해가 어민은 물론 국가의 부담으로 돌아 올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어지는 기사는 어불도 두번째 기사로 '작은 섬에 남긴 전쟁의 생채기'입니다.


태그:#김, #어불도, #해남,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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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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