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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는 귀성길. 마음은 이미 고향에 가 있으나 더딘 차량 흐름이 졸음과 지루함을 덤으로 가져다준다. 잠시 맑은 공기도 쏘일 겸 고속도로를 벗어나 우리 문화를 찾아본다.

이렇게 고속도로 근처의 문화유산은 지루함을 달래주고 머리를 맑게 해주는 귀중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늘 귀성길이면 한두 곳의 문화유산을 답사하곤 했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몇 년 전에 들렀던 전북 김제의 금산사를 찾았다.

법주사와 함께 미륵의 도량으로 알려진 금산사. 이곳을 다시 찾게 된 것은 견훤을 떠올리며 이 시대의 정치를 재고해 볼 수 있다는 것과 나아가 '구세주'인 미륵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게다가 금산사IC를 나와 10여 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이니 귀성길에 들르기는 안성맞춤인 셈.

견훤이 갇혀 지낸 금산사

▲ 견훤성문. 견훤이 쌓았다고도 하고, 금산사에서 왜구을 막기 위해 쌓았다는 설도 있다.
ⓒ 백유선
동학농민군의 마지막 전투지였던 원평을 지나 조금 가다 보니 곧 금산사 주차장이 보인다. 매표소를 지나면 거의 무너질 듯 서 있는 홍예문이 방문객을 맞는다. 흔히 견훤이 세운 석성의 문으로 알려져 있어서 '견훤성문'이라 불리고 있다.

후백제를 세워 후삼국을 통일하려던 야망을 펼치던 견훤과 이곳 금산사는 인연이 깊다. 한때 미륵임을 자처했다고 하는 견훤이 이 절을 자신의 원찰로 삼고 중수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견훤석성이 그 증거인 셈이나 이는 전해지는 이야기일 뿐 확실하지는 않다.

@BRI@견훤은 자식 농사에 실패했다. 그가 후삼국 통일의 주역이 되지 못한 것은 그 때문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그래서 옛 성현들은 수신제가(修身齊家) 다음으로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를 이야기했을 것이다.

견훤이 넷째 아들인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가 맏아들 신검에게 붙잡혀 유폐되었던 곳이 금산사이다. 무려 3개월 정도를 이곳에서 갇혀 지내던 견훤은 간신히 탈출하여 왕건에게 투항했다.

그리고는 고려군의 선봉이 되어 자신의 세운 나라에 맞서 자신의 아들과 싸워야 했다. 가슴이 새까맣게 타들어갔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는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지 며칠 만에 울화가 병이 되어 죽고 말았다.

이곳에 오니 적전분열(敵前分裂)이란 말이 떠오른다. 아마도 우리 역사를 살펴보면서 가장 반성해야 할 표현 중 하나일 것이다. 그 때문에 망한 나라가 많다. 고조선이 그랬고 고구려가 그랬다. 후백제도 그 뒤를 따른 셈.

더구나 대업을 앞두고 아버지와 아들의 싸움이라니. 부모 형제가 권력을 두고 다투는 모습을 역사에서는 흔하게 본다. 멀게는 중국의 수, 당에서 가까이는 조선에서 그랬다. 속고 속이고, 때로는 서로 죽이기까지 했다.

오직 정치의 세계에서만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그러니 정치의 세계는 다른 어떤 곳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는 곳이라는 평을 듣는다. 그저 영화 '타짜'와 같은 노름판과 비교한다면 가장 적절한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맑은 공기를 마시며 부처의 세계로 다가가면서 이전투구의 정치판을 떠올리는 것은, 대선을 앞둔 정당들의 행태를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뉴스를 통해 보아야 하는 것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난 차라리 '쓰레기'를 외치는 '죄민수'의 코미디 프로가 더 좋다.

▲ 금산사 일주문. 새로 만들어 거대한 규모지만 아직은 다소 생소한 느낌이다.
ⓒ 백유선
이런 생각을 하며 잠시 가다 보면 새로 세운 일주문이 보인다. 맑은 계곡 위에 세워진 해탈교를 지나 금강문과 천왕문을 통과하여 보제루를 본다. 누문 형태의 마지막 관문이다. 이제 저 관문만 통과하면 속세를 떠나 부처의 세계로 들어서게 된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역시 예상대로이다. 이 문을 통과하고 나니 전혀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사진으로 늘 접하던 미륵전을 비롯해 언덕 위의 방등계단과 여러 전각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 중 오래 눈길을 사로잡으며 카메라 셔터에 손을 가게 하는 것은 미륵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3층의 건물이란 유명세 때문일 것이다. 금산사는 신라 말 미륵신앙을 설파한 진표율사에 의해 대가람의 면모를 갖추었다고 한다. 미륵전이 언제 처음 만들어졌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현재의 건물은 임진왜란 후에 다시 만들어진 것이다.

▲ 금산사 미륵전.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3층 건물이지만 내부는 통층이다.·
ⓒ 백유선
거대한 미륵불을 보며 미륵이 이룰 새 세상을 생각해 본다. 미륵은 하늘나라 도솔천에서 중생 구제를 고민하며 수행하고 있는 보살이다. 미래 언젠가는 부처가 되어 지상에 내려와 중생을 구제해주기로 예정되어 있다. 그가 내려온 후 지상에서는 불국토, 즉 유토피아가 건설된다.

미륵의 출현과 불국토의 건설은 기독교의 메시아사상과 비슷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예수의 부활과 재림, 그리고 지상에서의 천년왕국 건설과 최후의 심판으로 새로운 신의 나라가 도래한다. 미륵신앙 역시 비슷한 구조이다.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사람들은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절대자의 출현 즉, 미륵의 출현을 기대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을 미륵이라고 하는 자들이 등장한다. 특히 신라 말과 같은 혼란기에는 어김없이 자신이 미륵임을 주장하는 사람이 등장했다. 그 중 한 사람이 우리가 잘 아는 궁예이다. 견훤 또한 그러했다고 전해지나 확실하지는 않다.

▲ 금산사 미륵전의 편액. 대자보전, 용화지회, 미륵전은 모두 미륵불을 봉안한 법당임을 나타내는 말이다.
ⓒ 백유선
최근에도 그런 모습이 있었다. 종말론이나 재림 예수를 빙자하는 사이비종교 역시, 미륵을 자처하며 새 세상을 꿈꾸었던 자들의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모두 메시아나 미륵의 출현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생긴 일이다.

그러나 미륵은 출현하지 않았다. 이제는 미륵은 언제 올지 모르는 메시아로만 남아있지 않았다. 민중들은 미륵을 그들의 소박한 꿈과 희망의 대상으로 변화시켰다. 이제 미륵은 농사도 잘되게 해주고, 때로는 아들을 낳게 해주고, 때로는 병도 치료해주는 소박한 신앙의 대상이 된 것이다. 조선 후기의 일이다.

이렇게 미륵은 마을로 내려왔다. 우리나라의 곳곳에는 마을 사람들에 의해 미륵불로 불리는 불상이 수없이 많다. 대개는 민중들의 모습을 닮아 소박한 모습이다. 자연석에 약간의 손질만을 가한 것도 있으며, 또 때로는 남근석의 모양을 가진 것도 미륵님으로 불리기도 한다. 모두가 소박한 기원의 대상으로 변모한 마을 미륵신앙의 산물이다.

▲ 금산사 미륵전 벽면. 이런 낙서는 우리 문화 수준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 백유선
거대한 금산사의 미륵불상을 보며 마을의 미륵님을 떠올린 것은, 나 역시 세상에 대한 꿈과 희망이 소박해졌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리라.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단 한 번의 변혁보다는 좀 더 현실적인 것, 자식이 건강하게 공부 열심히 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 같은 것이 아닐까?

산신이 여자네

대장전을 비롯해 대적광전을 보고나니 뒤편에 삼성각이 눈에 띈다. 금산사에 오면 항상 찾아보던 곳이다. 다름 아닌 여자 산신이 있기 때문이다. 산신은 흰머리에 흰 수염을 한 할아버지 모습의 그림으로 묘사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금산사에는 보기 드물게도 산신 조각상이 있고 게다가 남성이 아닌 여자 산신이다. 아줌마처럼 친근감을 주는 다정한 모습이다. 산신령 중에 여자가 있었나?

▲ 금산사 삼성각의 여자 산신상. 따뜻한 어머니의 모습이다.
ⓒ 백유선
금산사는 모악산의 남쪽에 자리 잡고 있다. 모악산은 큰 산을 뜻하는 고어 '엄뫼'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를 한자로 적는 과정에서 엄뫼는 어머니의 뫼, 즉 어머니의 산이라는 뜻의 모악(母岳)이 되었다고 한다. 즉 모악산은 어머니의 뫼이니 이 산을 주재하는 산신 역시 여성일 수밖에 없는 셈이다.

산신 앞에 서니 자연스럽게 두 손이 모인다. 불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자연스럽게 두 손을 합장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산신상을 통해 마음 따뜻한 아줌마, 포근한 어머니를 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견훤성문을 지나며 화투판보다 못한 정치판을 떠올리며 어두워졌던 마음이, 아줌마의 따뜻함을 간직한 산신상을 보며 다시 밝아졌다. 절에 오면 이렇게 무언가 한가지만으로도 마음 편안함을 느끼게 해준다. 그래서 나는 절이 좋다. 마음의 정화가 절로 되니 말이다.

▲ 금산사 방등계단과 적멸보궁. 방등계단은 부처의 사리를 봉안한 곳이며, 적멸보궁에서는 창문을 통해 사리탑에 직접 예배할 수 있기 때문에 불상을 안치하지 않는다.
ⓒ 백유선
귀신사에서 본 '남자의 성기'

고향을 향해 달려야 하지만 금산사 입구에서 3km 정도의 거리에 있는 귀신사를 외면할 수가 없다. 단청이 없는 고풍스런 대적광전의 모습이 자꾸 날 부르며 손짓하고 있기 때문이다. 좁은 마을 길을 지나 자동차로 곧바로 절 앞에까지 이를 수 있어서 금산사에 오면 늘 들르는 곳이다.

본래는 금산사를 말사로 거느릴 정도로 큰 사찰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세가 역전되었다. 큰 절이었음을 보여주는 주춧돌을 비롯한 석재들이 한쪽에 정리되어 예전의 영화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아담하면서도 단청이 없는 소박한 건물이 방문객을 반겨준다.

▲ 귀신사 대적광전. 단청이 없는 모습이 단정해 보인다.
ⓒ 백유선
대적광전의 비로자나불은 건물에 비해 규모가 지나치게 크기도 하지만 소조불이란 점 때문에 한 번 더 살펴보게 된다. 즉 흙을 빚어 구워서 만든 불상이다. 하지만 금으로 코팅되어 있기 때문에 천리안이 아니라면 그 재료를 알 수 없다. 금산사의 거대한 미륵불도 석고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안내문을 읽지 않고 이를 알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 귀신사 대적광전 비로자나불. 흙으로 빚은 소조불이다.
ⓒ 백유선
그다지 정교해 보이지 않은 조각 양식이 친밀감을 준다. 너무나 완벽한 조각, 예술적으로 칭찬을 받는 불상 앞에 서면 왠지 위축된다. 하지만 완벽해 보이지 않은 다정한 불상이 친근감 있게 다가오는 것은 나만의 느낌만은 아닐 것이다.

대적광전을 뒤로하며 언덕 계단을 오르면, 다른 곳에 서는 보기 드문 유물을 볼 수 있다. 탑이 법당 앞이 아닌 언덕 위에 세워진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도 사자 모양의 동물 위에 남근 모양의 조각이 올려져 있기 때문이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절이 있는 곳의 지형이 풍수지리적으로 '구순혈(狗脣穴)'이라도 한다. 즉, 개의 음부를 닮은 지형이라는 뜻이다. 당연히 음기가 셀 수밖에 없는 곳이다.

우리 조상들은 음기가 센 곳에서는 늘 이를 누르기 위해 고민했다. 한양의 북대문을 늘 닫아 두었던 것도 음기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고 전해지며, 남원에서는 지리산 여근바위의 음기를 막기 위해 돌로 성 모양의 구조물을 쌓기도 했다.

이 절에서는 어떤 방법을 택했을까? 음기를 막기 위해 이 절에서는 정공법을 택했다. 음기를 양기로 막은 것이다. 즉 남근을 세워 지형의 음기를 막은 것이다. 그 어느 방법보다도 효과적이고 쉽게 이해가 되는 방법이었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 귀신사 석수. 사자 등에 남근석을 올려놓은 모양이다.
ⓒ 백유선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니 꼼꼼히 살펴본다. 남근의 모양이 다소 어색해 보이기는 하나 분명 남근이다. 안내판에는 이런 내용을 설명하기가 곤란해서인지, 땅의 나쁜 기운을 막기 위해 남자 성기 모양의 조각을 세웠다고 적고 있다.

옛사람들의 지혜를 생각하며 계단을 내려올 무렵, 아직 초등학교 3학년 아들 녀석이 안내판을 열심히 읽더니 한마디 물어본다.

"아빠, 성기가 고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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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콘서트>, <청소년을 위한 한국사>(공저), <우리 불교 문화유산 읽기>, <한번만 읽으면 확 잡히는 국사>(상,하)의 저자로 중학교 국사 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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