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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12월 법관양성소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변영만(卞榮晩)은 이듬해인 고종43년(1906년) 3월 22일 박사(博士) 임명을 받는다. 법관양성소 박사는 교관과 더불어 후진 사법관리를 양성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법관양성소는 설치 초기 교육기간이 6개월(우등일 경우 3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법무 관리를 양성하기에는 지나친 속성으로, 충분한 교육이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삼권을 분립하는 근대적 사법제도로 가는 과도기 상황에서 법관양성소의 존재 가치는 가볍게 여길 수 없다.

@BRI@당시 이곳에서 수학하던 그는 숱한 고뇌 속에 법무 관리의 길을 걸었다. 법관양성소 졸업 직전인 11월 말 교관이던 정명섭(丁明燮)이 비분강개하며 올린 상소가 내내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을사늑약 역적들의 머리를 참하고 조약을 파기하라는 상소를 목도한 변영만은 거취에 대해 격렬한 고민을 했을 것이다. 정명섭의 상소내용이다.

"성상께서 마음속으로 무슨 요량이 있으신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일의 절박함이 이제 목전에 다다른 상황인 만큼 폐하께서는 만물을 다 감싸주시는 인자함 대신에 용기 있는 결단을 덕으로 삼으시고 속히 역적들의 머리를 참하시어 천하 사람들에게 사죄하소서. 그리고 이른바 조약을 즉시 파기하시되, 저들이 혹 파기를 거부하는 야비함을 드러낸다면 법규에 어긋난 조약은 무효라는 이유를 대며 준엄한 말로 물리치시고, 아울러 이런 연유를 각국의 공사관에 선포하여 증명을 받으소서."

법관양성소 거쳐 법관전고소 합격... 보성전문 법률과서도 수학

▲ 법관전고소 합격과 보성전문 법률과에서 우등을 했다는 당시 신문 보도.
ⓒ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변영만은 법관양성소 박사를 지내면서 법관전고소(法官銓考所)에 들어갔다. 1906년 12월 4일자 황성신문에는 변영만이 다른 11명의 동료와 함께 법관전고소 검사 시험에 합격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법관양성소에 머물 것 만 같았던 삶의 변화를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같은 달 12일 관보에도 그 같은 사실이 실렸다. 법관전고소는 법관 임용을 위해 전형을 하는 곳이다. 변영만은 이곳에서 홍면희(洪冕憙)를 만나는데, 그는 법관양성소 선배로 후일 변영만과 또 다른 인연을 맺는다.

변영만은 법관전고소에 있으면서 학구열을 계속 불태웠다. 기록에 따르면 1907년 3월에 보성전문학교 법률과 학년말 시험에서 우등을 했다. 야간학부였던 것을 보면 법관전고소 소속으로 일하면서 밤에는 보성전문학교를 다녔던 것으로 추정된다.

보성전문은 고종이 신설한 학교로 1905년 4월에 학교 문을 열었다. 이 학교는 후일 고려대학교로 학통을 잇는다. 성균관에 이어 서울대 법대의 학통을 잇는 법관양성소와 고려대 법대의 보성전문 법률과를 두루 수학한 변영만. 당대 최고의 엘리트였음을 알 수 있다.

1908년 변영만은 판사로 임용된다. 그 해 말 그는 판사서임을 받고 첫 임지로 목포구재판소 판사로 발령 받았다. 그 무렵은 우리나라 사법 역사에서 중요한 시기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우리의 국권을 야금야금 빼앗은 일제가 1907년에는 ‘한국내정에 관한 통감의 권한에 대한 협정’(정미7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사법권까지 모조리 일제의 관할로 넘어갔다. 심지어 통감이 추천한 일본인을 우리 내각의 관리로 임명하는 조항까지 들어 있었다. 변영만은 이런 풍토에서는 더 이상 관리로서 국가의 녹을 먹는다는 것이 부질없다고 판단, 판사이던 1908년 미련 없이 법복을 벗었다.

1908년 사법권 피탈되자 판사 사임... 변호사·저술 활동

▲ 일제가 금서로 정한 도서 목록을 관보에 게재한 것.
ⓒ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요즘과 마찬가지로 당시는 판사에서 법복을 벗으면 변호사로 개업이 가능했던 시기였나보다. 이후로 그가 변호사로 활동했던 흔적이 짧게나마 남아있기 때문이다. 다만 변호사 생활에 그리 흥미를 가진 것 같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저술 활동에 치중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 무렵 <세계삼괴물>(1908)과 <이십세기의 참극 제국주의>등 일제를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서적을 번안하거나 직접 써서 발간했다. 이들 책은 후일(1910) 일제가 치안에 방해가 된다는 명목으로 <황성신문> 등과 함께 금서로 묶어 발간과 배포를 금지시키기도 했다.

변영만은 저술 활동과 함께 애국계몽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해이기도 하다. 1908년 1월에 만들어진 기호흥학회에 관여했다. 8월 25일 발간된 기호흥학회 월보 창간호에 그는 ‘대호교육(大呼敎育)’이란 제목의 논설을 실었다. 교육의 중요성을 갈파하는 글이다. 창간사 논설로 그의 글을 실은 이유를 알 듯하다.

기호흥학회는 대외적으로는 교육진흥이었으나 실제로는 민족의식과 독립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기여한 단체였다. 을사조약 후 국내 대부분의 애국계몽 운동자들은 국권회복의 길은 오직 교육을 진흥시키고 산업을 발달시키는 데 있다고 생각해 이 단체를 만든 것이다.

이 단체는 그러나 일제에 의해 탄압을 받다가 1910년 해산됐고 월보 역시 발간이 금지됐다. 일제가 압제의 발톱을 서서히 드러내면서 한반도를 본격적으로 유린하기 시작할 무렵이다.

변영만은 법복을 벗고 신의주에 머물고 있었지만 그곳에서 변호사 활동을 한 것은 아니다. 변호사를 개업하기 위해서는 해당 지방재판소 변호사명부에 등록하고 <관보>에 공고가 나야하는 데 그런 기록이 없다.

그는 아마도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안중근 의사 변호를 위해 여순으로 가려고 대기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때가 1910년 2월 무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성변호사회가 안 의사의 변호사로 변영만을 파견키로 한 것이 2월 2일이었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다음 호는 안중근 의사 변호와 관련된 일화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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