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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덕귀 여사 좌담회에 박영숙 이현숙, 이은주 , 양은선, 이정옥 씨가 참석했다.
ⓒ 여성신문
[이정자 여성신문 편집위원] 제4대 윤보선 대통령의 부인으로 1년8개월간 영부인이었던 공덕귀 여사의 삶은 여사의 자서전 출간에 깊이 관여했던 이현숙 대한적십자사 부총재의 말대로 “영부인 이후의 삶이야말로 본래의 리더십을 충분히 발휘한 삶”이란 표현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부총재에 따르면 “교회 활동과 해위(윤보선 대통령의 호)의 반독재 투쟁으로 투사가 될 수밖에” 없었고, 이 과정에서 민주화 인권운동의 리더십을 한껏 발휘했다. 여사와 운동을 함께 한 박영숙 한국여성재단 이사장도 “공 선생 말씀에 따르면 자신이 영부인이었다는 게 (소외되고 억눌린) 이들에게 힘이 되기 때문에, 또 그것이 사회에 영향력을 발휘하기 때문에 자신이 안 나설 수 없었다고 하더라”고 전한다.

인도선교사를 꿈꾸던 팔방미인 최우등생

▲ 4·19 혁명 후 60년 8월 대한민국 4대 대통령이 된 남편 해위 윤보선, 두 아들 상구·동구와 함께 1년 8개월 간의 청와대 생활을 시작한 공덕귀 여사.
ⓒ 여성신문
공덕귀는 1911년 4월 21일 경남 충무(지금의 통영)에서 대한제국 군인인 공도빈씨와 방말선(공마리아)씨의 5녀 2남 중 둘째딸로 태어나고 성장했다. 35세에 혼자된 어머니는 바느질로 자녀들을 키워냈고, 공덕귀에게는 용감하고 자랑스런 어머니였다.

공마리아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호주 선교사들과 성경 공부나 찬송을 배우는 등 교류가 많았으며 동네 여인들은 그의 성경 이야기를 좋아했다. 어머니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가담하여 투옥된 일이 있고, 재건교회를 세워 장로로서 일생 주님을 위해 일했다. 공덕귀는 믿음의 여장부인 어머니의 뒤를 밟으며 호주선교회와 더불어 학창시절의 외연을 넓혀나간다.

그는 별난 데 관심이 많고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하는, 매사에 적극적인 성격이었다. 호주 선교사는 그에게 늘 좋은 멘토였다. 공덕귀는 유치원 조보모, 통영 진명여학교 야간 선생을 했다. 공립보통학교 졸업 후의 꿈은 인도 선교사였다.

21살의 늦은 나이에 호주 선교부 장학생 선발에 합격하여 원했던 미션스쿨 동래일신여학교에 입학했다. 훤칠한 키에 피아노와 수영에도 뛰어난 팔방미인으로 ‘만 가지 약장수’로 불렸고, 졸업식에서는 우등상, 도지사상, 4년 개근상까지 휩쓴 최우등생이었다. 호주 선교사 부인의 한국어 선생이 되어 선교사를 따라 가 있던 거창에서 금지된 곡을 교회행사 때 불렀다 하여 5일간의 감옥생활을 겪은 이후, 장학생으로 선발돼 요코하마 신학교에서 활기 넘치게 4년간 신학공부를 했다.

동문인 박용길 선생(고 문익환 목사의 부인)과 같이 주일학교를 인도했다. 졸업 후 29살에 송창근 목사의 경북 김천 황금동교회 전도사로 부임하여 한국교계의 거목 정대위, 조선출, 김정준 목사들과 인연을 갖는다. 이곳에서도 공덕귀는 황금동교회 독립운동사와 관련해 대구 도경의 고춧가루 물 고문을 받기도 했다.

다시 송 목사의 제의로 요코하마 공립신학교(후에 ‘도쿄여자신학전문학교’로 개명) 4학년에 정규생으로 입학, 공부를 하고 졸업 후 김천으로 와서 그해 8·15를 맞았다. 송 목사가 곧바로 사직을 하고 상경한 후 공덕귀는 12월 29일 상경, 다음해 1월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 여자신학부 교수가 되었다. 한경직, 송창근, 김재준, 정대위, 조선출 목사 등 신학의 대가들이 다 모여 있는 곳이었다.

프린스턴신대 장학금 획득... 결혼으로 유학 무산

▲ 구속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서울구치소 뒷산에서 구속자 가족 등 관계자들과 함께 부활절 새벽송을 부르고 있는 모습.
ⓒ 여성신문
교직에 있으면서 공덕귀는 공부에 대한 열망이 더 생겨 프린스턴 신학부 전액 장학금을 확보하고 수속을 밟았다. 그런데 송창근 목사가 유학서류를 빼돌려 유학은 무산된다. 이 무렵 3년 전부터 말이 오가고 있던 윤보선씨(해위)와의 재혼 자리를 여러 목사들이 권했고, 해위 자당께서도 사람을 주기적으로 보냈다. 유학의 기회를 놓친 그를 주변에서 결혼의 길로 몰아갔고 친정어머니도 좋아라 하셨다. 김재준 목사만은 공 여사의 마음을 헤아려 40년 동안 공든 탑을 무너뜨릴 생각이냐 하시며 마음을 돌이키려 애썼다.

“1949년 1월 6일, 안국동 8번지로 귀양을 왔다.”

신학자가 되려고 했던 공덕귀 여사는 법도와 예절이 중시되는 명문대가의 생활 속으로 완전 방향전환을 하는 나날을 보냈다. 윤씨 가문은 초대교회 기독교 가문으로, 시아버님은 윤치소 장로이시고 시어머님은 예수교에 입문하여 9남매에 딸린 70명의 대식구를 위해 믿음과 은혜로 자기희생의 부덕을 보이신 ‘인간문화재’ 같은 분이었다. 공덕귀 여사 스스로 “살림은 제로였으나 시어머님은 아무 내색 안했다”고 말한다.

39세에 상구를 낳고 부산 피난 중 42세에 동구를 낳아 남편과 시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남편이 서울시장이었고, 다음에 상공장관이 되고 민의원이 되어도 별 감흥이 없었고 한번도 유세장에 따라가 본 적이 없다”고 공덕귀 여사는 술회했다.

20개월의 청와대 생활 “아주 조용한 영부인”으로

해위가 대통령이 되자 보안상 이유로 안국동을 억지로 떠났다. 이후 1년 8개월은 아주 조용한 영부인으로 지냈다. 정치에 참견도 하지 않았고 일체의 봉사활동도 하지 않았다. 시어머니와 남편, 그리고 아이들을 보살피는 주부의 자세를 가졌다. 외교적 방문객이 있을 때 우아한 자태로 손님과 환담을 나누는 활동은 많이 볼 수 있었다. 영국대사 부인의 방문, 매카나기 미국대사 부인과의 환담, 유엔군 모범장병 초대만찬, 미 국무장관 등의 예방시 영부인의 역할을 품위 있게 해냈다.

YWCA에서 주관하는 외교관 부인들의 ‘가든 클럽’(Garden Club) 연차 전시회에 참석하고, 메디컬 센터의 아동병원 개설에도 영부인으로서 참석했다.

밤낮없는 데모, 민주당의 능력 상실, 점차 무엇인지 모를 불안한 시국을 보며 그는 “주여, 이 백성을 어찌하시렵니까?”라며 “이 나라를 버리지 말아달라”고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 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5·16 새벽 3∼4시, 공 여사도 깨어 있었다. 국방장관의 전화를 받은 해위가 “어머님을 모시고 아이들과 조카사위 집으로 가라”고 했다. 장도영 참모총장으로부터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는 보고를 받은 것이다. 해위만 남겨둔 채 떠났다. 생명의 위태로움을 경험했다.

“오, 하나님! 이 백성은 어쩌다 이 모양이 되었습니까? 총칼로 나라를 송두리째 차지하다니. 주여,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는 기도밖에 할 수 없었다. 해위는 계엄 추인을 3일 만에 하고, 5월 19일 밤 단독으로 하야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군사위원회측은 “유일한 헌법기관인 대통령의 부재는 국제관계상 절대 안된다”고 극구 제지했다. 대통령은 당분간 그대로 머물기로 하여 9개월을 흘려보냈다.

해위의 하야와 대선 실패…정계 은퇴로 이어져

▲ 유신체제 하 시국사건에 대한 투명한 ‘공개재판’을 촉구하는 부채를 들고 시위 중인 공덕귀 여사(가운데).
ⓒ 여성신문
해위는 62년 3월 22일 하야성명을 발표하고 노모를 모시고 청와대를 떠났다. 공 여사는 “꿈에 그리던 민주주의를 꽃 피우려 할 즈음 총칼 앞에 중책의 자리를 박차고 나와야 하는 아픔이 왜 없었겠는가”라고 적고 있다.

해위는 재야세력을 규합하여 민정당(民政黨)을 창당하고, 대통령 후보에 지명되어 선거운동을 펼쳤지만 15만표 차이로 졌다. 공 여사는 선거 결과를 “대적 보따리 들어먹는 도적들에게 송두리째 도적 맞은 꼴이었다”고 했지만, 세 번의 저격을 피한 경험에 비춰 감사한 마음을 갖기로 했다. 이 선거를 분기점으로 해위는 군정 종식과 이 나라 민주 회복을 위해 투쟁하며 신명을 바칠 것을 다짐하였다.

공화당은 1969년 3선 개헌안을 내놓았다. 공 여사는 ‘가관’이라고 말한다. 3선 개헌 저지투쟁에도 불구하고 공화당은 새벽 2시 국회 제3별관에 모여 3선 개헌안과 국민투표 법안까지 벼락치기로 통과시켰다. 공 여사는 해위의 불운과 국민의 불운이 어찌 이리도 큰가를 하늘 앞에 되물어야 했다. 해위는 이 선거를 끝으로 정계를 은퇴, 평범한 시민의 자리로 돌아갔다.

‘구속자가족협의회’ 결성해 회장으로 활약

박 대통령은 74년 4월 학생 150여명을 빨갱이로 몬 민청학련 사건을 발표,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하였고, 인혁당이 배후라고 결부시켜 무차별 탄압과 운동권 학생 제거를 명분화했다. 39명의 형량이 확정되고 인혁당 사건의 8명은 24시간 내 처형되었다.

7월, 해위는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로 김동길, 박형규, 김찬국씨와 군법회의 법정에 섰다. 학생들에게 여비를 주었다는 혐의였다. 공덕귀 여사 역시 ‘구속자 가족’이 되었다. 이때부터 기장 여신도회 방이었던 기독교회관 301호는 민청학련 사건 구속자 가족의 방이며, 호소와 위로의 피난처요 안식처가 됐다. 7월부터 정기 목요기도회가 기독교회관에서 오전 10시에 열렸고, 명동성당에서도 지학순 신부를 위한 기도회가 열렸다. 구속자 가족연대가 강화되고, 용기가 살아났다.

여사는 교회여성협의회 인권위원장일뿐 아니라 전직 대통령 부인이어서 방패막이가 될 것이라 믿었다. 차이고 연행되고 감시당하고 구속되고 하면서 단식농성, 철야농성, 시위를 밥먹듯 하는 동안 여성들은 사나워졌다. 그들도 정치세력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이 살벌한 시국에 공 여사는 교회여성연합회 초대 인권위원장(1974년 5월∼77년)이 된다. 그는 매일 출근을 해 인권 강연회를 열고 양심수들이 갇혀 있는 교도소로 날마다 쏘다녀야 했다.

3.1절 민주구국선언문 발표, 8일간 구류 살기도

▲ 공 여사의 영부인 시절 활동은 외교사절 접대, 여성단체 활동 참석, 의료기관 방문 등 의례적이고 조용한 것이었으나 “자연스러운 우아함과 동양적 세련됨을 갖췄다”는 평을 듣곤 했다. 사진은 영국대사 부인 등 외교사절 부인들을 청와대에서 접견하는 모습.
ⓒ 여성신문
76년 3·1절을 기해 민주구국선언문을 발표했다. 오후 6시 명동성당에 700여명이 참석하였고 윤보선, 함석헌, 김대중, 정일형, 문동환, 이문영, 안병무, 이해동, 서남동, 윤반웅, 이우정 등 서명자 11명이 검거되고 박용길 장로가 연행됐다. 이태영, 이희호 여사도 다음날 조사를 받았다. 공 여사도 8일간 구류를 살았다. 이 사건에 변호사 27명이 자진변론을 맡고 나서 피고인보다 숫자가 더 많았다. 1년여 재판을 끌었다.

구속자 가족인 이희호, 박용길, 휘이 문, 박영숙, 김석중, 이종옥, 고기손, 박순리와 이우정, 공덕귀가 NCC 인권위원회 사무실에 모여 ‘3·1 사건 가족대책협의회’를 구성하고 공덕귀에게 회장을 맡겼다. 구속자 가족협의회를 이미 운영해본 적임자라는 것이다. 부활절에 구치소 뒷산 동네에 몰래 모여 새벽송을 크게 불러 가족에게 용기를 전했다.

공판 때마다 민주인사가 법정 주변을 가득 메웠고, 법원 거리는 농성장으로 변했다. 금요기도회는 계속되고 정부는 무척 곤혹스러워졌다. 11월 항소심 판결에서 3∼5년형, 자격정지 5년이 선고됐다. 그리고 77년 말에 3·1 선언 사건 관련자들이 전원 석방됐다. 76년 말에는 여러 구속자 가족을 아울러 ‘양심수 가족협의회’를 재발족했다. 77년 4월 1일 감옥에 있는 양심범과 그 가족들의 모임은 박 정권 아래서의 모든 정치재판에 대해 무효화 선언문을 내놓았다.

여성노동자 인권·복지 위해 앞장서 싸워

77년 봄 교회여성연합회 회장이 된 후 80년 4월 정부의 산업선교회 활동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여성근로자들의 호소문이 연합회로 쌓이기 시작했다. 이후로 여성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을 지원하는 활동에 나섰다.

열악한 작업환경, 연장근무와 야간근무, 폭행, 체불, 잔업수당 무시 등 근로현장은 무법 상태였다. 산업선교회 목사들이 노동법 교육을 함으로써 여성근로자들은 똑똑해지기 시작한다. 방림방적 노동자들은 체불임금대책위 위원장을 맡은 공 여사를 보면서 약자들의 인권을 지키는 사회 양심세력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공 여사는 경제성장이 밑바닥 사람들과 여성들의 억울한 희생 위에서 이뤄지고 있는 현실을 가슴 깊이 아파했다.

78년 3월 해직교수협의회를 비롯하여 유신체제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겠다는 노동자, 문인, 교수, 청년, 학생들이 일어나자 연금, 연행, 협박 등 탄압도 더욱 심해갔다. 5월에 여사가 부회장으로 있는 ‘한국인권운동협의회’를 7월 5일 ‘민주주의 국민연합’으로 발전시켜 모든 단체들이 반독재 민주구국투쟁을 하겠다는 일종의 선전포고를 준비하였다.
79년 박 대통령이 심복에게 살해당한 후 80년 권력을 잡은 전두환 장군에게 자문을 한 정치·사회 지도자들이 민주화운동 진영으로부터 소외되는 시기를 맞게 된다. 그 중 해위도 해당되어 70년대 민주화운동 동지들의 발걸음이 끊기기 시작했다. 구속자 가족들은 공 여사를 점차 멀리하기 시작, 70년대 동지들로부터 심한 상처를 입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 여사의 활동은 계속된다. 80년대 70세에 들어서도 ‘5·18 광주 민중항쟁’ 구속자 가족 지원활동에 참여하고, 시인 김지하와 ‘인혁당 사건’ 구속자 석방운동을 전개했다. 72세에 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사업협의회 여성분과위원장을 맡아 교회일치운동을 이끌고, 75세에는 ‘교회일치여성협의회’ 초대회장이 되어 5년간 기여한다. 79세 되던 해에 해위가 서거하고, 81세에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회’ 결성에 참여했다. 97년 86세로 소천했다.

ⓒ 여성신문
공덕귀 여사 일대기

1911년 4월 21일 경남 통영시에서 공도빈씨의 7남매 중 둘째딸로 출생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 발발. 통영공립보통학교 입학
1932년 부산 동래 일신여고 입학
1936년 일본 요코하마 공립여자신학교 입학
1940년 김천 황금동교회 전도사로 부임. 독립운동 혐의로 경찰서 연행돼 고문 받음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1943년 일본 도쿄신학전문학교 편입학
1944년 귀국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 조선신학교 전임강사로 부임
1949년 1월 6일 함태영 목사의 주례로 안국동자택에서 윤보선 씨와 결혼
1949년 6월 윤보선 씨 상공부 장관으로 임명
1950년 6·25 전쟁 발발. 임시 수도 부산으로 피난
1958년 윤보선 씨가 제4대 국회의원에 당선
1960년 4월 19일 4·19 혁명 발발
8월 13일 윤보선 씨가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으로 취임
1961년 5월 16일 군사정변 발생
1962년 3월 22일 윤보선 대통령 사임 후 안국동 자택으로 돌아옴
1972년 예수교장로회 여전도회서울연합회회장
1974년 5월 운보선 씨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실형 선고 받음. 구속자가족협의회 회장 맡음
1976년 양심범 가족협의회 회장이 됨
1977년 방림방적 체불임금 대책위원회 위원장. NCC인권위원회 후원회 부회장. 한국교회여성연합회 회장
1978년 한국 기독교 학생총연맹 (KSCF) 이사장
1980년 인혁당 사건 구속자 석방운동 지원
1987년 구로병원 이사장
1990년 7월 18일 윤보선 씨 서거
1992년 김옥라 각당복지재단 이사장과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회’ 결성
1997년 11월 24일 86세 나이로 타계


지인들이 말하는 내조와 자아실현 사이의 갈등
‘조롱에 든 새’ 신앙과 사회운동으로 다시 날다

▲ 공덕귀 여사는 해위와의 결혼 직후 “1949년 1월6일 안국동 8번지로 귀양을 왔다”며 도미 유학의 꿈이 꺾인 것에 대해 자조 섞인 자평을 했다.
“민주화운동을 할 때 어머님은 ‘영부인’ 타이틀을 과시용이 아닌 억울한 여공들을 위해 활용하셨다”며 “위험한 곳에 나갈 때마다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방패’처럼 앞장서시면서도, 끝까지 영부인의 품위를 유지하셨다”는 맏며느리 양윤선 여사의 회상은 영부인 이력이 개인의 삶과 사회에 어떤 영향력을 갖는지를 시사한다.

공덕귀 여사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박영숙 한국여성재단 이사장, 이현숙 대한적십자사 부총재, 이종옥 여사, 이은주 청와대 시절 비서, 맏며느리 양윤선씨 등 지인들의 좌담회 내용과 각종 참고문헌을 참조해 여사의 삶을 재구성해 본다.

‘영부인’이란 타이틀로 먼저 기억되는 공덕귀 여사. 근거리에서 그를 지켜본 지인들의 그에 대한 감회 중 빠질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엘리트 신여성으로서 포기해버린 주체적 삶에 대한 ‘회한’이다.

자서전 <나, 그들과 함께 있었네>(도서출판 여성신문) 집필에 깊이 관여했던 이현숙 대한적십자사 부총재는 “공 선생님은 자기실현을 못하신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너무 크셨다. 유학을 못간 것, 선교사가 못된 것, 이런 것들이 가슴에 박혔다”며 “그것은 지금도 모든 여성들이 겪는 딜레마와 비슷한 거다…”라고 회상한다. “조롱에 든 새”,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내 모습인가” 등으로 표현함으로써 스스로의 무능력, 무기력을 내비치기도 했다고 한다.

민주화·인권운동 동지였던 박영숙 한국여성재단 이사장 역시 “그분을 만나면 가슴속에 쌓아둔 그런 아쉬움이 참 크셨다는 것이 묻어 나오곤 했다”며, 그 아쉬움을 달랜 것은 바로 “그래도 아들 하나 없는 집안에 가서 두 아들을 낳고 훌륭하게 키워냈다는 것, 그것으로부터 위안을 삼곤 했다”고 전한다.

박 이사장이 “왜 그러셨어요?”라고 물어보면 그에 대한 공 여사의 대답은 늘 같았다. (결혼) 안 했으면 상구(맏아들, 국제로터리 3650지구 총재)·동구를 못 낳았을 거라고. 박 이사장은 “자아실현을 못한 그런 한이 후에 우리와 함께 하면서 민주화운동, 인권운동, 교회개혁운동 등으로 발산되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 갈등을 해결한 것은 바로 신앙. 교회활동과 민주화·인권운동은 공 여사의 신앙심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가깝게는 가족 추모예배시 윤치영, 윤일선 박사 등 쟁쟁한 윗어른들이 다 계신데도 전도사 이력을 가진 전문성으로 공 여사가 예배인도를 하며 리더십을 발휘하곤 했다. 소속교회인 안동교회에선 여전도회가 제대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기초를 닦음으로써 여신도들의 주체성을 기르고자 했다.

며느리 양은선씨는 “어머님은 교회 안 성평등을 대단히 강조하셨다. 여신도들은 왜 부엌에서 밥이나 하느냐며 나무라곤 하셨다”고 회상한다. 유신체제 하에서 가택연금 당한 남편을 대신해 이런저런 심부름을 할 땐 자신의 역할이 생긴 것에 대해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양씨는 “교회여성연합회 회장을 하시면서 기생관광, 미스코리아 문제 등 여성문제, 사회·환경문제, 원폭피해자 문제 등 나설 수 있는 사안엔 다 나서셨다”며 때론 일본 기독교인과의 교류로 입수한 관련 자료를 정보부 사람들이 와서 다 빼앗아갔던 사건을 기억해낸다.

박 이사장은 “공 선생님이 여전도회 회장을 맡았을 때가 바로 독자적 리더십이 가장 잘 발휘된 때”라며 여신도 차별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고, 자택 정원에 교회에 소극적인 청년 신도들을 초청해 수완 좋게 리더십을 발휘하곤 했다고 회상한다. 그는 민주화운동을 하며 자연스럽게 겸양과 헌신의 덕목을 갖춰 갔다.

“운동하는 과정 중 내가 공 선생님께 가장 미안했던 것은 경찰이나 기동대가 우리 시위대를 제압하면서 내뱉는 수치스럽고 쌍스러운 욕들이었다. 선생 같은 점잖은 분이 결코 들어보지 못했을 입에 담을 수 없는 그런 말들… 너무나 민망스러웠다. 그런데도 한마디 불평 없이, 다음에 또 그런 모욕을 당할까봐 거부하는 일없이, 언제나 변함없이 그 자리에 나오셔서 우리의 방패가 되시곤 했다.”

박영숙 여성재단 이사장의 그에 대한 따뜻한 기억이다.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도서

한국 기독교 여성 인물사 2(정석기, 쿰란출판사, 2001). 영부인론(함성득, 나남출판, 2001). 내가 사랑한 여성[젊은 여성에게 보내는 글](김대중, 에디터, 1997). 대통령부인의 올바른 역할에 대한 좌담회(박금옥, 한국여성단체협의회 회지 ‘여성’ 中  ,1997). 나, 그들과 함께 있었네(공덕귀, 여성신문사, 1994).

논문

퍼스트 레이디 역할에 의한 유형화 연구: 한국과 미국의 퍼스트 레이디를 중심으로 (최고은, 고려대학교, 2001). 한국 영부인론 : 대통령부인의 유형과 역할 연구/ 정치인 아내의 바람직한 역할 및 위상 (이승희· 배선희, 한국여성정치연구소, 1997). 한국 역대 대통령 영부인들의 정치적 역할에 관한 연구(고승현, 단국대학교,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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