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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해 11월 9일 자유주의연대가 주최한 '일심회 사건의 교훈과 올바른 대응' 긴급토론회. 김영환(맨왼쪽)씨가 참석해 발언을 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시대정신> 편집위원 김영환! 자네는 1999년 <월간조선> 6월호를 통해 전향하면서 북한을 타도 대상으로 규정하는 것이 현재의 시대정신이라고 공개적으로 당당히 선언하였네. 그리고 북한을 민주화하고 해방하는 혁명가로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맹세하였네. 세계 변혁 운동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변절이었네.

자네의 변절과 전향 행각에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들 하지만 자네와 함께 살며 자네를 가르친 그 당시 가까웠던 동료들은 자네의 행각에 하나도 의아해하지 않다네.

오직 분하고 원통한 것은 살인적 고문에 의해 몸이 망가지고 병고에 시달리느라 정상적인 사회활동과 노동력을 상실해 중요한 시기에 자신의 능력을 운동발전에 기여하지 못한 것이라네.

나는 세계 변혁운동의 역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남한 변혁운동 약사의 한 단면을 기술한다는 차원에서 23년 전인 1984년 1월로 되돌아가 '강철 시리즈'의 허상과 이른바 뉴라이트의 본질을 파헤치려고 하네.

84년 1월 서울 구로3동 자취방에서 첫 만남

영환이! 우리가 처음 만난 1984년 1월 20일경 서울 구로3동 이광우의 자취방이 생각나나. 고교 동창인 광우는 내게 자취방을 불쑥 찾아온 자네를 "서울대 공법학과 2학년(82학번) 김영환"이라고 소개했지.

학교에서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묻자 자네는 "OB팀(고전연구회)에서 활동한다"고 했지. 학내 사정에 과문한 내가 "무슨 맥주회사 야구팀이냐"고 묻자 자네는 "단재 신채호와 정약용 선생을 연구하는 학교 동아리 모임"이라고 설명해 주었다네.

자네를 처음 만났을 때의 단상은 이것이 전부였네. 자네는 대학 2년 선배인 광우와 나의 대화와 토론을 곁에서 묵묵히 듣고만 있었지. 그러다가 내가 고향에서 올라와 광우의 자취방에서 자고 가는 날이 빈번해지자, 지적 호기심이 컸던 자네는 사상학습을 함께 하자고 졸랐지.

그 당시 학원 밖에서는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을 둘러싼 논란이 벌어졌고, 학내에서는 이른바 무림(투쟁지양론)-학림(직접투쟁론) 논쟁이 치열할 때였네.

그래서 광우와 나는 사상학습과 이론무장을 한 뒤에 셋이서 함께 현장에 들어간다는 맹세를 하고 자네에게 항일혁명 역사와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론 그리고 주체사상의 기본원리를 설명해 주었지(필자는 당시 '광주사태'를 계기로 80년 5월부터 군입대 전까지 1년여 동안 라디오로 '김일성 방송대학 주체철학 강좌'를 청취했음 - 편집자).

"북한에는 주체사상이 있더라. 그러나 중요한 결론은 현장에 들어가는 것이다. 현장에 들어가 사상을 몸으로 배우면서 대중과 하나가 되어 대중의 힘을 믿고 대중의 힘을 끌어내야만 신군부를 타도하고 외세를 몰아내고 이 땅에 자주적인 조국통일을 실현할 수 있다. 그러려면 우리 자신들이 먼저 현장에 들어가야 한다."

그렇게 해서 광우는 화장품 용기를 만드는 공장으로 들어갔고, 나는 자동차 고무를 만드는 공장으로 들어간 것을 영환이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자네는 현장에 가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네. 그러다가 두 번째 만남은 그로부터 1년 반쯤 지난 1985년 10월경 구로3동의 거리에서 우연히 이뤄졌지.

자네가 이번에는 반드시 현장에 들어간다기에 함께 자취생활을 하기로 했지. 자네는 보증금 20만원만 대고 나는 매달 월세 5만원씩을 내기로 했지.

나는 그때 기숙사가 있는 회사에서 임금투쟁을 하다가 해고당한 상태였고 박영진을 비롯한 6명의 선진노동자들과 제2의 구로연대파업을 실현시키기 위해 구로 독산지역을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었지. 그러나 그 중요한 시기에 자네는 현장에 들어가기로 한 약속을 또 어기고 오히려 '사상도둑' 행각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지.

운동권 스타가 된 김영환과 공포에 휩싸인 운동권

영환이, 왜 내가 그토록 3년간 자네에게 현장에 들어가라고 종용했는지 아는가. 그것은 내가 자네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자네의 본질과 한계 그리고 가능성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일세.

그것은 자네에게 노동의 고귀함을 깨닫게 해 주관적 맹동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네. 그렇지 않으면 자네의 경우 현실을 망각하고 주위를 배려하지 않는 극단적 이기주의에 빠져 결정적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네.

아니나 다를까, 자네는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혁명론'을 영어 대문자 다섯자인 NLPDR로 간단히 손끝만 튕겨 각색함으로써 NL계열의 '대부'로 십수 년을 칭송받아왔네.

또 자네는 85년 10월말 청계천에서 라디오를 구입해 내가 알려준 김일성 방송대학 주체철학 강좌를 청취해 베껴서 표절한 '강철시리즈'로 마치 자신이 남한내 주체사상의 대부인 것처럼 대중을 착각에 빠트리면서 하루아침에 주체 박사, 김 선생 등으로 추앙받는 일약 운동권 스타가 되었지.

그 반면에 주위동료와 진정한 전위들, 훌륭한 민주인사들이 신군부의 철퇴를 맞고 피를 흘리며 모든 것을 파괴당한 것을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네. 자네의 그 이기주의적 행각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회의 선각자들이 꿈도 실현해 보지 못하고 좌절하고 그와 더불어 역사가 수십 년 후퇴했는지 아는가.

자네의 그 소영웅주의적 모험 행각을 계기로 86년 봄과 여름에 인노련, 서노련 등 수많은 조직들이 파괴당하고 10월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당 사건, 11월에는 반제동맹당 사건이 터지면서 운동권에는 공포 분위기가 순식간에 확산되었다네.

그해 12월 10일 세계인권 선언일에 나도 시흥7동 대로변에서 불법 체포되어 남산 안기부에 끌려가 영문도 모른 채 밤새도록 온몸이 발가벗겨지고 손목과 발목에 수갑이 채워진 채 몽둥이에 살점이 묻어나도록 고문을 당하였네.

그러나 자네도 알다시피 그때까지 내가 한 일이라고는 구로 독산지역 선진적 노동자회 회원으로 제2의 구로연대파업을 성공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선진적 노동자의 임무'를 집필하고, 박영진 열사가 죽자 그 장례를 주도하고 추모 사업회에 관계한 것 밖에는 없다는 것을 잘 알지 않는가.

안기부 고문 수사관들한테서 처음 들은 NLPDR

안기부의 정형근 단장과 그 부하들이 "너 NLPDR 알지?" 하면서 무조건 몽둥이로 머리와 등짝 허벅지를 후려칠 때 앞이 캄캄하고 기가 막힌 심정을 자네는 알 수 있겠는가. 나는 NLPDR이라는 것을 안기부 고문 수사관들한테 처음 알았으니 이 무슨 기구한 사연인가.

37일간 피눈물을 흘리며 고문을 참아냈지. 그 후유증으로 인해 20년이 지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을 때도 그때 고문당해 모세혈관이 파괴된 허벅지가 쑤셔대고 벌레가 슬금슬금 기어다니는 느낌이 와 긁어줘야 시원한 느낌이 온다네. 지금도 집중력이 떨어지고 몸을 가누기가 힘들어 누웠다 일어났다 하면서 이 글을 쓰고 있네.

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이라는 역사적 대사변기를 앞둔 암울했던 시기에 자네가 조직적으로 한 것이라고는 오직 구학련 내의 주도권 싸움이었지. 자네가 한 것이라고는 그 가치로 볼 때 손톱만큼 밖에 안 되지만 그로 인한 피해는 태산도 무너뜨릴 만큼 컸다네. 그래서 우리 사건은 일명 구학련 사건이라고 서술되어 있지만 그때 자네의 동기생인 구학련 총책 정대화는 지금까지도 얼굴조차 알 수 없었네.

영환이 자네는 그 당시에 감옥에 있었기에 민주화·노동운동을 했다고 말하지만 자네는 민주화·노동운동하고는 거리가 한참 멀다네. 자네의 시작과 끝은 오직 구학련일 뿐이네.

자네는 오직 구학련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NLPDR을 표절해 '강철 시리즈'를 집필하고, 그 표절의 대가로 '왕초'의 표식을 달고 멋모르는 대학 후배들을 호령하는 '주사파의 대부'가 되었으니 말일세.

이제 다시 우리가 처음 만났던 23년 전으로 돌아가 보세. 자네는 '인간의 본성은 자주성과 창조성과 의식성을 가진 사회적 존재다' 라는 명제를 아직 잊어버리진 않았겠지. 그 중에서도 인간의 의식성이 결정적 역할을 하며 의식성이란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속성으로서 의식성을 버리면 자주성도 창조성도 없다는 것도 기억하겠지.

엄동설한에 모든 것이 얼어도 민족의 품은 한없이 넓고 따뜻할 걸세

솔직히 말하지만 자네와 뉴라이트 세력들은 전향하면서 인간의 속성 중의 속성인 의식성도 함께 버렸네. 그와 함께 자주성도 버리면서 철저히 외세에 예속되어 있지. 지난 10년 동안 전향한 후의 총결을 보면 자네들은 창조성도 함께 버리면서 아무것도 새 것을 창조하지 못하고 있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네는 의식성을 버리면서 그것을 즉각 '시대정신'과 '뉴라이트'라는 개념으로 대체했지만 자기 정신을 버린 곳에 자기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공허한 벌판을 헤매고 있다는 생각이네. 그러다가 자네들은 멀리서 '선거'라는 간판이 모이자 그 쪽을 향해 "신보수우익 총궐기하여 빼앗긴 정권을 탈환하자"라고 주장하고 있네.

그러나 의식성을 지닌 국민은 반드시 의식 있는 권력을 만들 것이며 의식 있는 정권을 창출할 걸세. 이 역사의 전진은 아무도 막지 못하네.

결론은 자네는 지금 민족과 민중의 편에서 이 역사의 전진에 동참하며 구원받을 것인가 아니면 역사의 밀림에서 계속 헤맬 것인가 그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는 것이네.

이 엄동설한에 모든 것이 얼어도 민족의 품은 한없이 넓고 따뜻할 걸세. 영환이, 자네와 상을 마주보고 그해 겨울 맛있게 동태찌개를 끓여 먹던 때가 눈에 선하네. 그래도 우리의 청춘은 그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심진구씨는...

▲ 심진구씨
심진구씨(47)는 고교 때부터 헤겔철학과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문해 고교 졸업후 80년 5월부터 1년여 동안 라디오로 김일성 방송대학 주체철학 강좌를 청취했다.

84년 군에서 제대후 당시 서울대 공법학과 2학년인 김영환을 만나 그에게 '김일성 방송대학 주체철학 강좌'를 소개했고, 이를 계기로 김영환은 ‘강철 시리즈’를 집필해 학생운동권에 처음으로 주체사상을 전파했다.

심씨는 85년 S식품에 입사해 박영진 등과 함께 '구로독산지역 선진적 노동자회'를 결성해 '선진적 노동자의 임무'를 집필했다.

이후 86년에는 박영진 열사 추모 사업회 위원으로 활동하다가 그해 12월 민족해방노동자당 사건으로 체포되어 안기부에서 37일간 고문과 조작을 당했다. 그는 팸플릿 '선진적 노동자의 임무'를 집필해 반포한 혐의(국가보안법 위반)로 5년을 구형받았다.

이후 90년대에는 경기도 안성과 안산에서 노동·통일운동을 하다가 2000년대 들어서는 비정규 일용 노동자 무상취업 지원체 '일사랑' 회장을 지냈으며 현재는 용접기사로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다.

태그:#김영환, #시대정신, #NLPDR, #뉴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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