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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명만(卞榮晩)·영태(榮泰)·영로(榮魯) 3형제를 일컫는 부평삼변이란 이름은 어디서 유래됐을까. 이는 중국 북송시대 문장가이며 정치가였던 소순(蘇洵)·소식(蘇軾)·소철(蘇轍) 삼부자를 일컬어 삼소(三蘇)라고 했는데, 변씨 형제도 그와 비견되는 천재성을 가진 명문장이란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부평삼변은 삼화부윤 지낸 변정상의 아들

▲ 변정상의 과거급제 내용을 적은 고종 <일성록>
ⓒ 국사편찬위원회
이들 3형제는 삼화부윤을 지낸 변정상(卞鼎相)의 아들이다. 고종26년(1889) <일성록>에 따르면 변정상은 과거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등과해 공직에 진출한다. 삭령·흥양·강령 등지에서 군수를 지냈으며 교섭주사, 외부주사, 외부참서관 등을 역임했다.

<고종실록>에는 고종 39년(1902)에 외부 참서관이던 그를 경흥감리 겸 경흥부윤에 임용하고 주임관 5등에 서임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후 고종은 재위 43년(1906) 4월 정3품이던 그를 삼화감리에 임용하고 주임관 4등에 서임했다.

같은 해 10월에 다시 삼화부윤과 주임관 2등에 임용하는 등 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이는 고종의 총애를 받은 것으로 짐작되는 대목이다. 그에 대한 기록은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구한말 1909년(융희3년)에 쓰여진 <궁중차석>에는 중추원 부찬의(주임관 3등) 관직에 있던 것으로 나타났다.

고위 관직에 있던 터라 기록이 적잖았다. <조선왕조실록(고종편)> <관보> <일성록> <승정원일기> 각종 궁내부문서 등에서 변정상의 흔적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그의 마지막 관직은 중추원 부찬의로 짐작된다. 1908년(융희2년) 중추원 부찬의 이인직이 신병으로 직무수행이 어려워 물러난 자리를 채운 것이다.

과거로 출사해 승승장구... 한일합방 직전 사직

중추원 부찬의 자리는 삼화부윤 다음에 임용된 것으로 을사오적인 이완용 내각총리대신이 1908년 3월에 기안해 궁내부에 올린 것이다. 기록을 확인하는 순간 머리가 쭈뼛이 서고 소름이 돋았다. 친일파의 가장 앞잡이이던 이완용이 천거한 것인가? 그렇다면 혹시 같은 친일파?

변정상 이력

▲1894.7.1 교섭통상 주사
▲1895.4.1 외부주사 판임관 3등
▲1896.1.13 흥양군수 주임관 6등
▲동년 1.31 의원면직
▲1896.2.3 강령군수 주임관 6등
▲1899.8.3 의원면직
▲1900.3.30 외부참서관 주임관 5등
▲1901.5.9 승정3품 지릉감동별단
▲1902.3.14 경흥감리 겸 부윤 주임관 5등
▲동년 9.24 의원면직
▲1906.4.10 삼화감리 겸 삼화항재판소판사 주임관 4등
▲동년 10.1 삼화부윤 주임관 2등
▲1907.12.31 주임관 1등
▲1908.4.2 중추원 부찬의
이런 저런 망상이 떠올랐다. 자칫 글을 그만 써야 할 지경에 직면할 수 있다는 걱정이 들었다. 다행이 희망을 갖게 한 것은 당시 문서 기안자는 당연히 내각총리대신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친일인명사전을 만드는 민족문제연구소에 문의를 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명단에 없었다. 연구소 유은호 상임연구원은 "친일파로 분류된 자들은 국권을 빼앗긴 한일합방(1910) 이후에 '조선총독부 중추원'에 속해 있던 자들"이라고 설명했다.

산강재 변영만에 대한 기록이 별로 없을 것이란 기우(杞憂) 이후에 또 한번 마음 졸였던 순간이었다. 하기야 변정상이 친일파였다면 어떻게 변영만이 친일파 청산을 위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활동을 할 수 있었겠는가. 다시 생각해 보니 왜 삼화부윤이란 직책으로 그를 소개하는지 이해할만 했다.

중추원 부찬의는 자칫 친일파로 오해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나중에 찾은 것이지만 1897년 3월에 발행된 대조선독립협회회보 9호에는 독립협회에 보조금(후원금)을 낸 명단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변정상은 효성도 지극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흥양군수로 재임 중이던 1896년 각의(閣議)에 의원면직서를 제출한다. 이유는 '부친 병 구환'이었다. 그의 뜻을 내각대신 유길준(兪吉濬)이 받아 내각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에게 보낸 것이다.

김홍집은 그의 뜻대로 흥양군수 직을 1월 31일부로 면직하지만 2월 3일자로 다시 강령군수로 발령을 낸다. 어찌된 일인지는 몰라도 변 군수의 효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변정상은 과거에 급제해 등용한 후 오랫동안 선정을 베풀면서 승승장구했다. 그러다가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뼈를 묻고자 했던 공직을 홀연히 떠난다.

부평삼변 3형제 등 모두 7남매 다복한 가정

친일은 하지 않겠다는 그의 뜻이라고 짐작될 뿐. 부평삼변은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서 반일, 항일의 의지를 가슴 속에서 불태웠을지 모른다. 삼형제의 항일 행적은 나중에 다루기로 한다.

▲ 안동교회 제직자(1942). 아랫줄 좌측에서 네번째가 변영하 전도부인이다.
ⓒ 안동교회
변정상은 부인 강재경(姜在卿)과 사이에 3남 4녀, 7남매를 낳았다. 그러나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호적 정리가 원만치 않았던지 호적상에는 3남 1녀만 기재돼 있다. 기재된 딸 경임(慶妊)이 둘째딸(二女)로 올라 있었는데 그는 원래 넷째 딸이 되어야 맞다.

장남 변영만 위로 누나 둘이 있고 영태와 영로 사이에 딸, 그리고 경임이 막내인 것이다. 딸들에 대한 기록을 더 없을까 하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첫째 또는 둘째딸로 추정되는 영하(榮河)에 대한 기록은 우연치 않게 찾게 됐다.

서울 안국동에 있는 안동교회가 펴낸 <안동교회 90년사>(2001)에서 잃어버린 퍼즐 한 조각을 찾은 것이다. 자료에 따르면 안동교회에서 권사로 끝으로 재직한 영하 여사는 '변영태의 누나'로 소개되고 있다.

"때마침 교회에서 수고하시던 변영하 전도부인(전 외무부장관 변영태 씨의 누님)이 연로하셔서 사표를 내시고 전도부인이 계시지 않았다."(164쪽)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로써 삼화부윤 변정상의 3남 2녀를 확인했다. 더 이상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할 듯하다. 변영로와 제일 큰 누나와는 18년 터울이 났다. 이는 변영로가 태어날 무렵에 시집을 갔을 나이란 의미다.

이름만이라도 알면 어렵지만 일말의 희망을 갖고 찾을 수 있으련만. 세기가 바뀐 지금, 그들 가족을 한 자리에 모시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접어야 했다.

덧붙이는 글 | 4회는 산강재 변영만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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