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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마스 햄슨
ⓒ thomashampson.com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지껏 봤던 공연 가운데 최고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오케스트라, 가수 그리고 청중의 삼박자가 잘 들어맞는 조화로운 작품이었다. 공연이 끝난 후 새벽 세시까지도 아내와 공연에 대한 이야기를 하느라 잠 못들었다. 한동안 이런 흥분상태가 쉽게 가라앉지 못할 거다.

올해로 20회에 접어든 콜로라도 말러 페스티벌은 볼더라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열리는 행사였다. 하지만, 2005년 9월 비엔나에 기반한 국제 구스타프 말러 학회로부터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런 노력이 결실을 이루어 저명한 바리톤, 토마스 햄슨(Thomas Hampson)을 초청할 수 있었다. 햄슨 자신도 바로 이 단체로부터 금메달을 획득한 바있다. 나도 이 지역에 4년동안 살았지만 한번도 말러 페스티벌에 관해서 들어본 적이 없다. 햄슨 덕분에 말러 페스티벌 자체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콜로라도 말러 축제에 토마스 햄슨이 온다는 건 축제 역사상 구데타와 같은 일이라고, 말러 축제 창립자이자 음악감독인 로버트 올슨(Robert Olson)이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토마스 햄슨은 말러 축제에 참가해서 노래를 부를 뿐아니라, 음악을 배우는 학생들을 위해서 손수 마스터 클래스(Master Class)를 열기도 했다. 그의 말러에 대한 애정이 강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BRI@사실 겨울은 음악가들이 한참 바빠지는 시기다. 햄슨 같이 유명한 성악가가 1월에 짬을 내기란 여간해서 쉽지 않다. 햄슨을 데려오기 위한 노력은 199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말러 축제의 회장인 스탠 로텐베르그(Stan Rottenberg)는 1995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말러 모임에서 토마스 햄슨을 만나서 초청을 처음으로 제안하였다.

그후로 스탠은 햄슨을 만나는 자리마다 청을 넣었지만 성사를 시키지 못했다. 마침내 스탠과 로버트가 2005년에 금메달을 따자마자, 햄슨에게 접근해서 간곡히 다시 한번 부탁을 했다. “햄슨씨, 금메달을 딴 말러 축제와 금메달리스트 햄슨이 힘을 합쳐서 대지의 노래를 해보는 게 어떤가요?”

▲ 마스터 클래스하는 토마스 햄슨
ⓒ thomashampson.com
말러의 <대지의 노래>(Das Lied von der Erde)는 테너와 바리톤의 독주로 구성되어있다. 일반적으로 남자 테너와 여자 메조 소프라노가 노래하는 조합인데, 이번 공연에서는 테너와 바리톤이 불렀다. <대지의 노래>는 특이하게도 낮은 부분의 노래가 더 낭만적이고 서사적이다. 그래서 바리톤이 사실상 이 노래의 주인공이다.

구스타프 말러(1860~1911)는 <대지의 노래>를 작곡할 무렵에 죽음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 그의 어린 딸이 갑작스럽게 죽었고, 자신도 불치의 심장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런 자신의 경험이 녹아있는 가장 “개인적인” 작품이 바로 <대지의 노래>다. 이 노래는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뛰어난 완성도를 가졌다는 평을 자주 듣는다.

중국 고대의 시인인 이백을 비롯한 다른 시인들의 시를 번역해서 만든 이 작품은 교향곡에 가깝다. 말러는 대지의 노래를 통해서 삶과 죽음, 기쁨과 슬픔, 디오니소스와 아폴로의 대립적 세계관을 그만의 방식으로 풀어냈다. 말러는 교향곡은 인생처럼 항상 세상을 품어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이 노래를 통해서 죽음까지 껴안으려 했던 그의 따뜻한 세계관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햄슨의 해석에 따르면, 이 작품은 19세기 독일의 초월적인 철학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죽음과 슬픈 인생을 다루지만, 굴복하지 않고 솟아오는 대지의 기운이 서려있는 게 <대지의 노래>다. 말러는 누구보다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햄슨은 강변한다. 햄슨이 말하길, “제가 비록 들을 수는 없지만, 말러가 그의 손으로 우리를 감싸 안으며 겁먹지 말라고 힘을 주는 걸 느껴요.”

말러의 음악은 1980년대 중반 이후로 주욱 햄슨에게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햄슨은 1995년 2월 카네기 홀에서 지휘자 제임스 레바인(James Levine)과 함께 <대지의 노래>를 처음 공연하였고, 같은해 지휘자 버나드 하이팅크(Bernard Haitink)와 더불어 짤스부르크에서 노래한 후부터 <대지의 노래>는 그의 주된 레파토리가 되었다.

매진이 될까 두려워 몇 달전부터 예약했지만, 정작 공연장에는 빈자리가 드문드문 보였다. 클래식 음악계의 뜨거운 스타는 역시 테너였던가? 세계 3대 바리톤으로 토마스 햄슨, 흐보로토프스키, 브린 터펠이 흔히 들어가지만, 이들이 쓰리 테너만한 인기를 누리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아니면 말러가 모짜르트나 베토벤에 비해서 인기없고 어려운 작곡가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차로 네시간 거리인 콜로라도 스프링스에서 말러 축제를 보기위해 달려온 아저씨 한분도 만났다. 이렇게 열성적인 말러의 팬들이 주된 관객이라면 이 정도면 흥행에 성공한 셈이다.

▲ 라트라비아타 공연에서
ⓒ thomashampson.com
1부는 Colorado MahlerFest Orchestra가 말러의 미완성 교향곡 가운데 하나인 'Adagio' from Symphony No.10을 연주하였다. 일반적으로 교향악단에서 남성들이 압도적인데 비해 여성 연주자가 더 많았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비전문적인 연주자가 꽤 섞여 있었다.

이 근처 동네에서 살면서 취미생활로 연주하는 사람들이 말러 페스티벌을 위해서 모였다.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차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화음으로 연주하고 있었다. 이 곡은 처음 접하는 곡이라서 조금 어려웠다.

휴식 시간후 곧바로 시작된 <대지의 노래>는 청중의 가슴을 뒤흔들어 놓았다. 존 게리슨(Jon Garrison)이라는 테너의 독창으로 시작된 2부는 토마스 햄슨의 열창으로 마무리되었다. 햄슨은 노래를 부르면서도 마치 오페라에서 연기하듯 감정에 몰입했다. 햄슨은 자신의 차례가 오기 몇분 전부터 고개를 숙이고 감정을 잡았다. 서서히 고개를 들면서 햄슨은 말러 음악의 화신이 된다. 눈빛 하나, 손짓 하나에도 빈틈이 없었다.

악보를 넘기는 손길도 음악에 맞춰서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아내와 나는 햄슨이 완벽을 추구하려는 그의 모습에 감동받았다. 뉴욕 메츠에서 하는 공연이나 꽉차지 않은 시골의 공연이나 똑같이 대하는 그의 자세는 본받을만 하다. 슬픔에 잠긴 노래를 할때는 눈물이 맺히는 듯하고, 기쁨을 흥얼거리는 눈빛은 천진난만 그 자체였다. 이 짧은 시간에 변화무쌍한 감정의 골을 보여줄 수 있는 그의 노래내공은 대단했다.

햄슨의 우렁찬 성량은 오케스트라에 전혀 압도되지 않았다. 햄슨은 전혀 뭉개지지 않고 정확한 발음과 풍부한 성량으로 무대를 지배했다. 무대의 주인공이 되는 느낌이 무엇인지 알게 해준 공연이었다. 독일어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음악이라는 만국의 언어로 말러가 의미한 <대지의 노래>가 어떤 것인지 잘 전달되었다. 햄슨의 연기가 노래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열정적인 무대가 끝나고 청중들의 기립박수와 부라보가 이어졌다. 이 공연장에서 많은 공연을 지켜봤지만,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일어서서 박수치는 건 처음봤다. 나도 팔이 떨어져라 박수를 쳤지만, 햄슨과 오케스트라가 보여준 공연에 보답하기에는 모자랐다. 우리는 내심 앵콜곡을 기대했지만, 거기까지 준비하지는 못한 모양이다.

▲ 공연후 싸인회 갖는 토마스 햄슨
ⓒ 류동협
공연이 끝난 후, 사인회 시간이 마련되었다. 그의 CD 한장을 가져오지 못한 게 후회스러웠다. 클래식계의 대스타의 사인을 받을 수 있으리라 미처 예상을 못했던 탓이다. 막상 앞에 서니 떨려서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2008년에 한국으로 공연갈 계획있다고 자세히 알려줬다. 햄슨의 대단한 팬인 아내와 사진 한장 찍어줄 수 있냐고 말했더니, 흔쾌히 승락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세를 취해주었다.

중요한 순간마다 떨리는 나의 성미탓에 사진이 흔들려 속상해하고 있으니, 햄슨이 다시 한번 찍으라고 자상하게 배려해주었다. 그에게는 스타의식에 젖은 거만함은 없고, 팬을 배려하는 겸손하고 따뜻함만 있다. 우리뿐 아니라 다른 팬들과 마음으로 대화하고 있는 모습을 곁에서 한참 보고 있었다.

아직도 햄슨과 악수한 손에는 그의 온기가 남아있는 것 같다. 공연 한번 보고 와서 이렇게 감동이 오래 가긴 처음이다. 팬들을 감동시키는 그의 매력과 완벽을 추구하는 그의 음악세계는 슬럼프를 모르는 현재의 햄슨을 탄생시켰다.

다양한 레파토리만큼 깊이 있는 그의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아내는 나보다 정도가 심해서 컴퓨터 바탕화면에 햄슨과 같이 찍은 사진도 깔아놓았다. 마치 연애를 하듯 아직도 그의 손길이 느껴진다고 한다. 우리 부부의 햄슨 공연보기는 올해 최대의 이벤트로 등록되었다. 그 콘서트홀에서 내가 느낀 가장 큰 즐거움은 스타나 내가 음악을 좋아하는 똑같은 사람이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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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동협 기자는 미국 포틀랜드 근교에서 아내와 함께 아이를 키우며, 육아와 대중문화에 관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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