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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대 말 <이중간첩 이수근 사건>에 연루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이씨의 처조카 배경옥(69)씨.
ⓒ 오마이뉴스 권우성

간첩 혐의로 스물아홉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뻔했던 그가 쉰하나에 출소한 뒤 예순아홉이 돼서야 억울한 간첩 누명을 벗게 됐다. 38년만의 일이다. 배경옥. 그는 67년 귀순해 69년 이중간첩 혐의로 처형된 이수근의 처조카다.

파월 노동자로 베트남에 살던 배경옥씨가 이수근을 만난 건 69년 여동생의 결혼식 때문에 잠깐 귀국했을 때였다. 여동생의 혼인을 앞두고 갑자기 찾아온 이모부 이수근은 당시 중앙정보부 판단관으로 일하며 대국민 반공강연을 주로 하고 다녔다.

이모부 이수근은 67년 귀순 직전까지 김일성 수행기자 출신으로 <조선중앙통신> 부사장을 역임한 고위층이었다. 당시 이수근의 귀순은 사상과 경제 등에서 북한과 모든 측면에서 대립하던 박정희정권이 체제우위를 나타낼 수 있는 호재였다.

실제 박정희정권은 이수근을 '체제우위' 홍보수단으로 활용했다. 아마도 이수근은 남이나 북이나 사람을 활용하는 것에 염증을 내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수근은 남도 북도 아닌 제3국 희망

ⓒ 오마이뉴스 권우성
69년 동생의 결혼 이후 도로 베트남으로 돌아가려던 배경옥씨는 우연히 택시에서 여권을 잃어버려 난감한 상황이 됐고, 여행사를 통해 부랴부랴 새로 여권을 만들던 사이 이수근이 자신도 위조여권을 만들어달라고 요청했다. 한국을 탈출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모부는 늘 술에 취해 살면서 가족을 그리워했어요. 당시 중정 감찰부장이었던 방준모씨가 자신을 괴롭힌다고 토로했었습니다. 이모부가 반공강연에서 북한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면 방씨가 찾아와 시키는 대로 하라고 윽박지르고 때렸던 모양입니다. 이모부 발밑에 대고 권총을 쏘며 협박했다는 거예요. 자유를 찾아 귀순했는데 자유 없이 괴롭힘을 당하니까 차라리 스위스 같은 중립국에 가서 북한에 있는 가족을 초청해 글이나 쓰면서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었습니다."

이모부라지만 이모(김순배)를 북한에 두고 혈혈단신 홀로 월남했다는 사실 때문에 배경옥씨의 마음 한켠에는 이수근이 달갑지 않았다. 가족을 떼놓고 혼자 살겠다고 삼팔선을 넘었다는 것 자체가 배씨의 상식으로는 좀체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채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던 이모부가 사상이 자유로운 제3국에서 이모랑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그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씨는 여행사에 이수근의 위조여권을 부탁했다. 배경옥은 "나에게 죄가 있다면 이수근의 위조여권을 만든 것뿐"이라고 주장한다.

69년 1월 27일 김포공항을 출발해 홍콩에 도착한 이수근과 배씨 일행은 한국영사관 직원들이 공항에서 이들을 체포하려고 하자 격투가 벌어졌다. 홍콩경찰은 이들을 연행했고, 이수근과 배경옥은 억류됐다.

홍콩당국에 정치적 망명과 캄보디아행을 주장한 이수근과 동행한 배경옥은 캄보디아 경유지인 베트남 탄손누트 공항 기내에서 출발을 대기하던 중에 베트남 당국의 협조로 한국으로 압송됐다. 그 뒤로 중정의 조사를 거쳐 69년 5월 이수근과 배경옥은 각각 사형을 언도받았다.

"나는 그들 앞에서 한 마리의 짐승이었다"

항소를 포기한 이수근은 사형이 확정돼 두 달 만에 집행됐고, 배경옥은 무기징역형을 받았으나 중간에 감형됐다. 20년. 배경옥씨가 감옥에서 보낸 세월의 합이다.

"그 시절, 남산 5국 하면 굉장히 유명했습니다. 중정에서 조사받을 때 저는 10여명 되는 조사관 앞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짐승 취급을 당했어요. (눈물) 눈이 많이 내린 추운 겨울이었는데 처음부터 겁주면서 고문을 했죠. 예전에 군대에서 쓰던 228 전화기가 있어요. 전기발전도 가능한 전화기인데, 그걸로 전기고문을 당했습니다."

빨리 죽는 게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죽는 것도 맘대로 되지 않았다. 38년 전의 능욕을 떠올리던 배씨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소스라치는 공포와 억압, 38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의 인생 속에서 현재화 돼 있었다.

"사람이 열흘동안 잠을 안 자면 헛소리를 하게 돼요. 무조건 빨리 끝내고 싶다는 생각만 들어요.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모를 겁니다. 중정이 있던 남산 5국에서 서대문구치소로 향할 때까지 11일간 단 한번도 다리 뻗고 자지 못했어요. 그저 의자에 앉아 조사받다 졸면 3교대로 바뀐 조사관들이 고문하면서 '세월 좋아 재판하지, 너 같은 자식은 단숨에 없애버려야 한다'고 협박했어요. 끔찍합니다."

고인 눈물방물이 뺨을 타고 주르륵 흘렀다. 38년 전 기억을 되살릴 때마다 충혈된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떨어졌다. 슬픔을 넘어 차라리 허탈이었다.

"불러주는 대로 쓰라고 강요했습니다. 이모부 이수근으로부터 공산주의 교육을 받았다, 북한으로 보내는 편지를 작성해서 홍콩을 통해 소련(러시아)으로 발송했다, 사회주의 이념교육을 받았다, 계속 반복됐습니다. 당치도 않은 것들로 저를 공산주의자로 몰아세웠죠. 받아쓰기였습니다. 반복적으로 저를 세뇌했어요. 저는 그들에 의해 조작된 공산주의자가 돼서 사형까지 받게 된 겁니다."

엉겁결 간첩이 된 터라 꿈을 꾸는 게 아닌가 착각도 했었다. 공권력에 의해 자행된 무자비한 폭력을 당하느라 구속영장도 없는 불법 감금이라는 생각은 감히 해보지도 못했다. 중정 '고문관'들이 옷을 벗겨 고문하면 당했고, 저항도 못했다. 엄청난 국가폭력 앞에서 말 한마디 할 수 없었던 존재의 무기력함은 차라리 슬픔이었던 것이다.

빨갱이 낙인... 사회와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아

▲ 배경옥씨가 당시 손가락사이에 막대를 끼우고 조이는 고문을 받았다며 재연해 보이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배경옥씨는 모진 고문 끝에 조작된 조서에 따라 간첩이 됐다. 너무 억울했지만 간첩인 배씨의 사정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60년대 '빨갱이'로 낙인찍히면 사회와 가족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어머님 가슴에 못을 박은 게 가장 한이 됩니다. 올해 아흔넷인 어머님께 이제라도 제가 간첩 누명을 벗게 됐다고 말씀드리게 돼서 다행입니다. 나로 인해 고통을 당했던 형제들에게 이제 나는 간첩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 떳떳합니다. 다만 한 가지…."

그는 아들 얘기를 꺼내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한동안 눈물을 흘리면서 격정을 참으려 애를 썼다.

"제 아들은 간첩의 아들이 되기 싫어서 자살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차라리 감옥에서 일찍 나오던지, 아니면 늦게 나왔어야 했는데 아들 녀석의 결혼 즈음에 출소하는 바람에 고민을 많이 했던 모양입니다. 간첩의 아들이라고 하면 처가에서도 좋지 않은 소리를 듣게 될까봐 고민하던 아들은 무주 구천동 강가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다섯 살배기 아들과 갓 백일을 넘긴 딸을 뒤로 하고 20년간 징역살이를 한 그는 아버지로서 아무런 역할을 못했다. 그래서 일생동안 단 한번도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자란 자식들에게 미안한 마음뿐이라고 했다.

배경옥씨는 지난해 10월 확정판결에 대한 재심을 청구했다. 이달 24일엔 네 번째 심리가 열린다. 재판부가 판단할 일이지만 그는 이번 재심청구가 꼭 받아들여지기를 갈구한다. 그의 억울한 호소가 받아들여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당시 이 사건의 책임자였던 김형욱 중정부장은 이미 저세상사람이 됐고, 그 밑에 있던 사람들도 따지고 보면 다 불쌍한 사람들 아니에요? 먹고살려고 상부에서 시키는대로 했을 뿐일테니까요. 예전에는 원망을 많이 했지만 세월이 가면서 그들은 하수인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이미 책임자는 죽었으니 분풀이 할 대상도 없어요."

"근대사의 한 조각 수정될 수 있어 다행"

ⓒ 오마이뉴스 권우성
초월했다. 예전에는 왜 하필 나인가, 무수히 되뇌었지만 지금은 그냥 웃는단다.

"그 시절, 나 한 사람만 억울하게 조작된 건 아니잖아요. 많은 사람들이 간첩으로 조작돼서 국가보안법이나 반공법 위반 혐의로 처벌받았고. 돌이켜 생각해보면 우리 민족의 비극인 것 같아요. 우리가 둘로 나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아예 벌어지지 않았을 테니까요. 다만 다시는 그런 비극의 시대가 오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는 늦게나마 우리 근대사의 한 조각이 바로 수정될 수 있게 돼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다만 가슴에 한이 되는 건 어머니라며 목이 메었다.

"사형 선고 받았을 때 어머니한테 제일 죄송했습니다. 자식을 먼저 보내야 하는 어머니 마음이 어떠셨겠습니까. 한낱 미물의 생명도 존중해야 하는데 그때 당시 사람 목숨을 너무 중히 여기지 않았던 것 같아요. 이 세상에 태어난 생명은 누구나 귀중한 것 아니겠습니까. 새든, 동물이든, 사람이든, 그 누구든 내가 뭘로 태어나야지 작정하고 나온 사람은 없잖아요."

징역살이 20년간 도합 5년은 족히 독방에서 생활했다. 발을 펴면 벽에 닿을 정도의 작은 방, 겨울밤 식기에 물을 떠놓고 잠들면 아침이면 꽝꽝 얼어붙어 얼음덩이가 돼 있던 그 방에서 사는 동안 혀가 굳어 말이 안 됐던 적이 있었다. 맘속으로는 말이 나오는데 사람들에게는 발음이 제대로 전달이 안 됐다. 그때부터 그는 독방의 자그마한 창살을 향해 미친 사람처럼 혼잣말을 해댔다. 혀를 굳게 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였다.

보통사람이라면 자신에게 능욕을 감행한 '고문관'들을 찾아 이제라도 복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것 같다. 그에게 물었다. 38년 전의 일이지만, 지금이라도 그들을 찾아 최소한 항의라도 해야 하지 않겠냐고.

"공소시효가 다 지났어요. 살아있다고 하더라도 다 늙었을텐데요. 스물아홉이던 제가 이제 예순아홉입니다. 그리고 이름도 몰라요. 자기들끼리도 이름을 부르지 않았어요. 김 상무, 이 전무, 김 사장 뭐 이런 식이었어요. 그러니까 누군지도 몰라요. 고소 못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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